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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88964471289
· 쪽수 : 261쪽
· 출판일 : 2010-12-09
책 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옮긴이의 말
1장 과학적 자연주의
-왜곡된 위대한 진리
1. 과학적 자연주의
2. 과학적 자연주의의 출현
3. 중세시대 그리스 자연주의의 수정
4. 초자연주의적 기계론: 초기 근대의 종합
초자연적 개입으로서 기적
영혼의 불멸성
전능한 신
5.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에서 무신론적 유물론으로
6. 왜곡된 형태의 과학적 자연주의
2장 기독교 신앙
-왜곡된 위대한 진리
1. 기독교 복음의 본래 가르침들
2. 기독교 신앙의 초기 왜곡들
3. 주요 왜곡: 무로부터의 창조
4. 무로부터의 창조와 악의 문제
전통적인 전-결정적 신론의 신정론
전통적인 자유의지 신론의 신정론
5.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로 인한 다른 왜곡들
3장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
-새로운 종합
1. 근대 자유주의 신학
2. 근대 자유주의 신학
신의 활동
종교적 경험
실제적 존재로서의 신의 실존
죽음 이후의 삶에서의 구원
3. 새로운 세계관의 부상
4. 파악과 비감각적 지각
5. 범경험주의와 정신-육체의 관계
6. 범재신론
범재신론과 악의 문제
신의 존재
다양한 신의 인과관계
4장 기독교 신앙
-오만에서 소심으로, 소심에서 예의바른 확신으로
신을 삼위일체적으로 생각하기
설득을 통한 창조
설득을 통한 성육신
설득을 통한 성화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속에서
서문
근대 세계는 기독교 신앙에 실제적인 면과 지적인 면에서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였다. 이 책은 기독교 신앙에 제기된 이런 지적인 도전들 중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근대과학의 세계관과 갈등 속에서 보여준 널리 알려진 광경이다. 이것은 종종 “과학과 종교,” “과학과 기독교 신앙,” 또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기독교 신앙이 과학 자체와 갈등을 가질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의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 지구의 나이가 단지 몇 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 혹은 인간은 직접 창조되었지 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생겨나지 않았다는 생각 등 천문학이나 지질학 그리고 생물학과 같은 경험과학이 새롭게 발견한 것들로 인해 도전받는 여러 관념들과 여전히 결합되어 있었다.
분명히 그러한 관념들과 결합된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에 이르는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들에게 신앙과 과학의 관계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도전이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과학이 결합하고 있는 세계관, 즉 과학적 자연주의라고 널리 불리는 세계관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 도전이 보다 심각한 이유는 그것이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에 이르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경험 사실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과학의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는 근대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기독교인들과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전이 존재하게 된 까닭은 과학적 자연주의가 단지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에 이르는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중요성을 지닌 그 어떤 종교적 세계관이라도 제어를 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널리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부분적인 실마리는 과학적 자연주의가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에 깊은 혼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이 혼동은 과학적 자연주의의 두 가지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기초적generic 혹은 최소한의minimal 의미에서, 과학적 자연주의는 단지 이 세계의 기본적인 인과과정에 초자연주의적 개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자연주의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완전히 구현되었다. 분명히 이런 의미 의 과학적 자연주의가 그동안 나타났던 여러 모양의 기독교 신앙과 갈등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신앙 자체와 갈등을 빚는다거나 건강한 형태의 기독교 신앙까지 억제한다고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나는 거기에 갈등이 있지 않다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나는 참으로 이런 기초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자연주의는 기독교인들이 열렬하게 채택해야만 할 위대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이 위대한 진리가 재생되었을 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그 위대한 진리는 내가 과학적 자연주의샘(Naturalismsam)이라고 부르는 극히 한정적인 형태의 자연주의로 구현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과학적 자연주의는 기독교 신앙은 물론이요, 우주에 관한 다른 중요한 종교적인 관점과도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중심과제는 과학적 자연주의의 이 두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그러고 나서 가능하다면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자연주의를 가려내는 이중적 과제를 가진다.
그러나 이 왜곡된 형태의 과학적 자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그 자체로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 사이의 명백한 갈등을 극복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이 일반적으로 수용해 왔던 최근 수 세기 동안의 주도적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 이런 기초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적 자연주의와도 양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과학적 자연주의가 왜곡된 위대한 진리라면, 이와 똑같이 기독교 신앙도 그러하다고 논증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요한 왜곡은 2세기 후반경에 도입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비성서적인 교리와 연루되어 있다. 이 성서후기의postbiblical 교리는 악이라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끌고 왔던 신의 전능에 관한 교리를 생산해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기초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자연주의와도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근원적 토대가 되어 왔다.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는 신의 창조에 관한 이 왜곡된 견해가 극복될 때에만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다음과 같은 니콜라스 베르자예프의 제안을 따를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에서 “무”가 절대적인 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무를 의미한다고 봄으로써, 신이 우리 세계를 혼돈chaos―“혼돈하고 공허한a formless void”(창 1:2-역자)―상태에서 창조하였다는 성서적 견해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외견상의 작은 변화는 악의 문제로부터 기독론,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에 이르는 실제적인 모든 논쟁에 대하여 엄청난 함축성을 가진다.
나는 기초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과학적 자연주의와 좋은 소식(복음)에 관한 기독교의 본래적인 가르침 양자 모두 위대한 진리라고 진실로 믿는다. 만약 그렇다면, 진리란 하나이기 때문에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서로 조화로워야만 할 것이다. 이 양자는 각각의 전통이 자신의 진리를 왜곡하여 스스로를 오류에 빠뜨렸기 때문에 결국 서로 갈등하게 되었다.
내가 둘 다를 진리로 보면서 또한 왜곡되었다고도 보는 것은 과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명백한 갈등에 대한 나의 처리방식이 주로 하나를 진리로 보고 다른 하나를 오류로 보는 유행하는 대부분의 관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 공동체의 많은 선도적 대표자들은 과학의 세계관이 우주에 관한 최종적인 진리에 가깝다고 여기며, 기독교나 다른 종교의 믿음의 방식들이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과 다르면 그건 단지 신화나, 환상, 오류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보수주의로부터 근본주의적인 신학자들은 그들 공동체의 세계관이 실재에 관한 최종 진리에 가깝다고 확신하면서, 과학적 자연주의는 완벽한 오류이고,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은 오직 과학 공동체가 초자연주의적인 사고틀로 복귀할 경우에만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관점은 양자 간의 토론에서 양자 모두 동일한 정도의 잘못을 하였지만, 또 한편에서는 각자가 매우 위대한 진리를 방어하고 있다는 것―이 점은 양자 간의 논쟁이 왜 그렇게 격렬하고 또 거의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지 설명하는 것을 돕는다―을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 논쟁이 해결될 수 없다고 보진 않는다. 양편의 잘못으로부터 진리를 갈라냄으로써, 우리는 양편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관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것은 과학과 기독교 신학이 동일한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각각 전체적인 진리의 다른 면에 집중하는 서로 매우 다른 학문적 기획방식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어떤 믿음을 공통적으로 소유할 수도 있다. 한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가 하는 작업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일요일에는 이런 세계관을, 주중에는 다른 세계관을 신봉하는 일이 없이 양쪽 공동체에 충분히 참여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