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65701637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14-02-03
책 소개
목차
전쟁 1부
전쟁 2부
에필로그
리뷰
책속에서
나는 필사적인 울부짖음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내 울음소리가 아니라 어머니의 비명이었다. 그녀는 내 성별을 확인하고 히스테릭한 비명을 내질렀다. 잔혹한 실망감의 표시였다. 어머니에게 모든 남성적인 것은 (음경만큼 남성적인 것이 또 있을까) 불쾌와 억압, 평생에 걸친 환멸의 표상이었다. 섹스는 어머니에게 환희를 안겨주지 못했다. 황홀경으로 그녀를 인도한 적도 없었다. 9개월 전 그녀의 남편이자 내 아버지가 다시 한 번 섹스 욕구에 사로잡혔을 때 그리고 그 순간 우연히 자기 아내가 옆에 있는 것을 알아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여자아이를 잉태하리라는 간절한 희망으로 섹스를 허락했다. 아들 셋을 끝으로 (첫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이번에는 폭력의 상징물을 지니지 않은 존재가 태어나리라는 희망으로. 그러나 나는 내 가족 가운데 음경을 가진 다섯 번째 존재로 태어났고, 어머니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된 바이지만) 평정심을 잃은 어머니는 분만 침대에 나와 단둘이 남겨지자마자 베개로 나를 짓눌렀다. 세상을 불행하게 할 또 하나의 남성성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 나를 구한 것은 마침 병실에 들어온 산파였다. 그렇게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났다. 새파래진 얼굴로, 환영받지 못한 채.
나는 뒤지는 버릇을 들였다. 서랍, 장롱, 빗자루 보관함, 널브러진 바지, 어머니의 가방. 모든 것을 뒤졌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아버지의 우표 수집책이었다. 고르고 골라 보관해둔 양질의 우표들. 아버지가 그것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았기에 잠시 망설였다. … 우표에 손댈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사무실 계단을 올라오는 아버지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발소리는 절대 다른 사람의 것과 헷갈릴 일이 없었다. 걷는다기보다 행군하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직 몇 초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얼른 수집책 여섯 개를 내려놓고 서랍장을 닫은 뒤, 서랍장 열쇠를 아버지의 비밀 장소(오른쪽에 있는 주석 잔)에 넣어두었다. 거실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라틴어 단어를 외우며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론도 없이 즉각 본론으로 들어갔다. “따라 와. 할 일이 있어.” 나는 안심했다.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명령, 어제도, 그전에도 같았던, 양해 없는 노동력 착취는 우표 도둑질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의 순간을 앞당겼다. 아버지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시키는 동안 나는 우표 판매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나는 비게를에게 연락했다. 그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고, 우리 집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림질 직공인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몹시 뻔뻔스러웠고, 불손했다. 실업학교 학생이었고, 어린 도발가였다. 그가 이 우표 도둑질의 중개인, 즉 장물아비가 되어줄 예정이었다. 그는 내가 믿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탁구게임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언젠가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길 가다가 네 아버지랑 마주치면 난 반대편으로 돌아가.” 적임자였다.
과거에 아버지가 열정적으로 배운 테니스 기술은 전혀 다른 영역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그는 포핸드로 내 오른쪽 얼굴을 그리고 잘 훈련된 백핸드로 왼쪽 얼굴을 후려쳤다. 포핸드, 백핸드, 포핸드, 백핸드, 포핸드, 백핸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버지 손가락에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기운이 남아 있었다면, 입술을 비죽이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렇지. 저 늙은이는 아직 결혼한 상태였지. 나는 곧 아버지 손끝에서 파멸로 치달은 결혼에 대한 분노를 함께 느꼈다. 모든 것을 향한, 세상을 향한, 아내를 향한,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분노. 그 분노의 크기는 나의 그것과 견줄 만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힘(분노)의 크기가 같은 적이었다.
“무릎 꿇어!”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바지 벗어!” 나는 바지를 벗었고, 속옷은 엉덩이가 드러날 만큼만 내렸다.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데타가 건네준 회초리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피부가 화끈거리기 시작하면서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상체를 걸상에 걸치고, 손으로 걸상 다리를 움켜쥐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누구인가. 아버지의 아들? 우표 도둑? 나치에게 붙잡힌 러시아 포로? 폴란드인? 유대인? 인생에서 그가 저지른 모든 실수에 대한 분풀이 대상?
데타는 자신의 주인이자 스승인 아버지 옆에 붙어 서 있었다. 이 늙은 여자는 잔뜩 흥분한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외쳐댔다. “안드레아스, 뼛속까지 악한 놈!” 마치 나에게 쓰인 마귀를 쫓아내려는 것처럼 아버지의 가격에 박자를 맞추며 몸을 떨었고, 얼굴은 시뻘게졌다. 그녀는 죄인을 벌하는 가톨릭 신자의 환희와, 자기가 갈망하는 남자를 향한 경탄에 빠져 무아지경이 되었다. 충직한 종 데타에게 프란츠 사버 알트만은 영웅적인 존재였다. 종교가 금지한 구타 행위를 서슴지 않는데도. 그녀는 아버지의 개였다. 20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가스실을 지키는 충견이 되고도 남을 여자였다. 그만큼 그녀는 타인의 고통을 환희에 차서 바라보았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아버지는 나를 때리기 시작한 날부터 내가 집에서 도망쳐 나온 날까지 한결같은 원칙을 고수했다. 회초리가 부러질 때까지 때리기. 그나마 운 좋은 날에는 (물론 그것은 불행 중에 그나마 운이 좋은 불행을 말한다.) 열 번이나 스무 번 정도 내리쳤을 때 회초리가 부러졌다. 그러나 이번처럼 회초리의 품질이 아주 좋은 경우, 아버지는 멈출 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