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6551453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21-12-21
책 소개
목차
노란 종이배 * 007
노을에 묻다 * 047
말코 엄마 * 089
사람의 결 * 129
유령 * 175
피어라 돈꽃 * 211
피었다 돈꽃 * 251
해설 | 박명순 * 288
작가의 말 * 311
저자소개
책속에서
가을 바다는 유난히 짙은 청람색이다. 바닷가에 이르자 선재가 쪼르르 달려가 종이배를 띄우기 시작했다. 잔물결이 조금 밀려왔다 조금 더 뒤로 물러난다. 물 위에 띄운 노란 종이배는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물결 따라 흔들리다가 자갈밭으로 도로 돌아온다. 선재는 밀려온 종이배를 띄우느라 정신없이 자갈밭 이쪽에서 저쪽으로 달려갔다 달려왔다 한다.
현옥은 선재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물을 훔쳤다. 얼마나 형이 보고 싶으면 저럴까. 선재의 간절한 기다림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흐르는 세월도 선재가 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우지 못하리라. 선재가 띄우는 종이배는 먼바다로 나가지 못해도 마음은 물결을 타고 서해를 돌아 진도 바다에 당도할 것이다. 명재가 가라앉는 배의 선실에서 다급하게 문자로 “선재야, 사랑한다.”라고 썼던 그 마음에 닿을 것이다.(「노란 종이배」 중)
그런 외삼촌이 달라진 건 말코가 사라지기 즈음해서다. 평소에는 말코를 몹쓸 역병 취급했는데 슬며시 두둔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외모는 거죽에 불과한 것이고 심성이 그 사람의 본모습이라면서 말코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사람의 도리를 아는 말코야말로 아버지에게 ‘과분한 여자’라고 못 박았다. 나는 외삼촌의 그런 태도가 몹시 궁금하여 몇 번 묻다가 포기했다. 외삼촌이 대답 대신 도덕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궁금증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훗날에 풀렸다. 외삼촌은 내가 가정을 꾸리고 그런대로 사는 걸 보고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말코는 지혜로운 여자였다. 느이 애비에게서 얼마쯤 재산을 빼돌려 내게 맡겼다.”(「말코 엄마」 중)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선고문 낭독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됐다. 박동길은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예견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다만 궁금한 건 김 선생이었다. 탄핵 심판을 앞두고 성가실 정도로 자주 걸려온 우국충정의 전화가 탄핵 선고 후 딱 끊긴 것이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우연히 만난 뒤 수십 차례 김 선생의 전화를 받았지만, 박동길은 단 한 번도 그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온 전화는 하나같이 대리운전업체의 번호였다.
아, 김 선생의 시간이 이렇게 고단하게 흘렀구나. 박동길은 비로소 김 선생의 삶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가슴이 저렸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20여 년 동안 자기 근황을 알리지 않았고 이번 만남에서도 내색하지 않았다니… 촛불집회에서 몸에 태극기를 두르고 호기를 부리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사람의 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