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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68172335
· 쪽수 : 392쪽
· 출판일 : 2015-06-20
책 소개
목차
서문 / V
제1부 공주의 말과 글, 그 삶의 자취
1920년대 공주에서의 한글 연구 3
「독락정기(獨樂亭記)」 소고 23
김인겸(金仁謙)과 그의 재일 한시 42
<금행일기(錦行日記)>에 나타난 19세기 중엽의 공주 57
제2부 공주의 산천, 계룡산과 금란구곡
초혼단(招魂壇)에서 숙모전(肅慕殿)까지 73
계룡산과 갑사 다시 보기 104
정안의 ‘금란구곡(金蘭九曲)’에 관하여 117
1920년대의 계룡산 -「鷄龍山記」의 내용과 의미- 129
제3부 공주의 정신, 그리고 현재와 미래
공주의 인물과 정신 233
우금티의 한과 꿈 244
공주대 교명 변경 반대 운동 260
공주대와 대학의 나아갈 길 282
대추골의 추억 310
공주의 현재와 미래 323
저자소개
책속에서
제1부 / 공주의 말과 글, 그 삶의 자취
1920년대 공주에서의 한글 연구
1. 푸는 말
한글은 우리 민족이 내세울 수 있는 세계적인 자랑거리의 하나다.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자기 나라 말을 적을 수 있는 고유의 문자를 가진 나라가 얼마 안 되고, 특히 그 문자가 남의 문자 차용이 아닌 독창적 창조물인 경우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한글은 해당 분야의 많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인류가 만들어낸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탁월한 문자다.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는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원래의 소리에 가장 가깝게 표현해 낼 수 있는 문자 또한 한글밖에 없다. 그래서 아직 문자가 없는 동티모르 같은 나라에서는 한글을 그 나라의 음성언어를 적는 문자로 채택하기도 했다. 또한 유엔 문맹 퇴치 기구 같은 데서는 아직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가장 배우기 쉽고 활용하기 편리한 한글을 보급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알파벳 발음을 표기하는 국제음성부호보다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유용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한글은 표음문자로서 그 어떤 문자보다 최고의 기능과 활용 가치를 갖고 있다. 또한 한글은 다른 문자의 차용이나 변환이 아니라 독창적으로 새로 만들어진 문자라는 특징도 있다. 사람의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조직적이고 과학적인 체계로 자음이 만들어졌고, 이 세상 만물의 구성 원리에 따라 모음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한글에는 우주의 원리, 세상살이의 도리가 내재되어 있다. 한글을 배우게 되면 단순히 문자만 배우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의 원리와 구조에 대한 공부도 아울러 수행되는 독특하고도 출중한 문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반포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다시피 푸대접을 받아왔다. 세종 임금은 한글을 반포하면서 분명히 “우리말과 글이 중국과 달라서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으니 이를 잘 활용하여 일상생활에 편하게 이용하라”고 가르쳤건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어려운 한자(文)를 배워 말과 글자가 다른 이중적인 언어생활을 영위해 왔다.
한글을 제대로 대접하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우리 문화가 위기에 처했던 시기였다. 우리의 혼과 역사를 지키려는 주시경 같은 우국지사들은 국권 운동의 일환으로 한글 존중과 보급에 앞장을 섰다. 한문에 비해 언문이나 반절이라는 이름으로 박대를 받던 한글에 대한 연구, 신문과 잡지를 통한 보급의 확산, 체계적인 교육의 실시 등으로 한글은 우리 민족의 중심 문자로 발돋움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글이라는 당당하고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나라 문자로서 일부에서나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한글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곧 치욕적인 식민지 체제가 되면서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총독부의 정책으로 또 다시 한글은 천대 내지 무시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불온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심지어 그 문제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옥사를 하는 분도 나왔다. 그러니 한글이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된 것은 광복 이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광복 이후에 정부가 새로 세워지고, 새로운 교육이 시작되면서, 한글이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로서 비로소 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정치적으로 광복이 되었다 해도 하루아침에 한글이 그런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미리 대비가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가혹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한글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목숨을 걸고 앞장섰던 선인들이 있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어학회 사건을 비롯하여 많은 한글 연구 관련 인사들의 투옥과 희생은 식민지 시대 내내 지속되었던 것이다. 당시는 한글 연구가 바로 독립 운동과 다를 바 없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공주는 시세로 보아 소규모 지역 도시에 속한다. 그러나 과거 백제,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 오랜 세월 충청도 지방의 수부(首府) 도시 역할을 했었다. 당연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1920년대 충청도의 도청소재지였던 공주에서 한글 연구가 시작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지금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이 있었던 것조차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이 작은 글에서는 1920년대 공주에서 한글 연구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 당시 한 신문 보도 기사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2. 한글 반포와 한글날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한글은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에 의해 1443년(세종 25년)에 창제되어 그 3년 후인 1446년에 반포되었다. 그러니까 올해 2014년은 한글 반포 568돌이 되는 해다. 우여곡절을 거쳐 국가기념일로 환원된 한글날은 10월 9일이다. 이 한글날의 유래도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한글날 기념식을 처음으로 거행한 것은 1926년이다. 이 해는 1446년 한글이 반포된 이후 8회갑(480돌)이 되는 해였다. 기념식은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와 <신민사>의 공동 주최로 식도원(食道園)이라는 요릿집에서 거행하였는데 수백 명이 참석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성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26년에 처음으로 기념식을 거행한 날은 10월 9일이 아니라 11월 4일이었다. 이 날이 음력으로 9월 29일이었기 때문이다.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을 책자로 완성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에 근거하여 9월 29일을 반포한 날로 보고 기념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기념식을 거행하는 중에 이 날을 부를 명칭이 있어야 하겠다는 의논이 나와서 논의한 결과 ‘가갸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에 한글을 배울 때 <가갸 거겨…> 하면서 배웠기 때문에 ‘가갸날’이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아직 ‘한글’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전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신문 지상 등에서는 ‘가갸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가갸날’이란 명칭을 1928년부터 ‘한글날’이란 이름으로 고치고 날짜를 양력으로 바꾸어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한글날 기념식을 음력 9월 29일에 거행했기 때문에 이를 양력으로 하면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는 날짜가 바뀌게 되는 불편함이 생겼다. 1931년에 들어 와서 모든 생활이 양력을 중심으로 삼는 데 비해 한글날은 음력으로 지내는 것이 불편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1446년 음력 9월 29일이 양력으로는 어느 날에 해당하는가를 계산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온 날이 10월 29일이다.
양력으로 기념식을 치르기 시작한 해는 1932년 무렵이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이희승과 이극로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부터 양력으로 기념식을 했다고 하는데, 양력 계산 방법은 이미 1931년에 신문 기사로 소개되었고, 또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내기로 했다는 신문 기사도 있어서 정확한 것은 더 따져봐야 할 일이다.
그런데 한글날의 양력 계산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져, 전문 기관에 문의한 결과 양력 계산은 맞지만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는 게 좋겠다는 일치된 의견이 나왔다.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10월 29일이지만, 양력은 1582년 이후 그레고리력으로 바뀌었으므로 양력 계산을 그레고리력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날짜가 10월 28일이었다. 그래서 1934년부터는 10월 28일에 한글날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극로의 기록에 따르면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는 대부분의 집회를 금지하는 총독부의 정책과 시대적인 정황상 기념식을 거행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더구나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념식을 주관할 사람들이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가는 일이 일어나 한글날 기념식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10월 9일에 공식적으로 한글 반포 기념식을 거행하게 된 것은 광복 이후인 1945년부터이다. 한글날이 10월 9일로 된 것은 1940년 7월에 경북에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에 나오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 말미에 “정통 11년 9월 상한(正統 十一年九月 上澣)”이란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 따라 한글이 9월 상한, 즉 상순(上旬)에 반포된 것으로 보고 9월 상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다시 계산한 것이다.
훈민정음 반포 500돌이 되는 1946년에는 10월 9일 한글날을 정부에서 ‘공휴일’로 지정하여 조선어학회 주관으로 덕수궁 중화전 앞뜰에서 각계 대표를 비롯하여 시민과 학생 등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하였고,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여 한글날이 명실 공히 법령상 공휴일로 되었다.
이후 한글날 기념식은 1956년까지 한글학회 주최로 거행하다가 1982년부터 2005년까지는 정부(문화부)에서 주최하였다. 그러다가 1990년 11월 5일에 공휴일이 많아서 경제 활동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여 2005년까지는 기념일로만 되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과 뜻있는 시민들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환원해야 한다는 서명 운동과 청원을 한 결과 16대 국회에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는 문제를 발의하여 논의하였고, 드디어 17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하여 2005년 12월 29일 법률 제7771호로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게 되었다.
3. 1920년대의 공주
공주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지역이다. 이는 공주가 그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자연 조건이 좋아 사람이 살기 적합한 지역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 후로도 공주는 우리 역사에서 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해 왔다.
삼국시대에는 한성에서 밀린 백제가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의 기틀을 새로 짜고 쇠락하였던 국가를 부흥시키는 거점 역할을 하였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4천 여 점의 유물들은 당시 백제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였고, 그 힘을 바탕으로 당시 국제적인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고, 문화가 얼마나 찬란하게 꽃을 피운 나라였던가를 실증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60여 년 동안 힘을 기른 백제는 곧 부여로 천도를 하여 막강하고 수준 높은 제국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난 뒤 백제 부흥 운동의 거점도 공주였으며, 통일 신라 시대에도 공주에는 웅천주가 설치되어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와 더불어 여전히 구백제권역의 행정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 당시 웅천주는 13개 군과 29개의 현을 통할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공주의 위상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고려 태조 23년 웅천주에서 공주로 이름이 바꾸어 그게 오늘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또 성종 2년 전국에 12목이 설치될 때 공주는 그 목의 하나였다. 잠시 부침이 있기는 했으나 고려 시대 말까지 공주는 절도사가 근무하는 지방 행정의 중심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도 공주목의 위상은 계속 이어지다가 선조 31년 충주에 있던 충청감영이 공주로 옮겨오면서 공주는 명실 공히 충청도의 수부 도시가 되었다. 구한말에 공주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었다든가 또 우금티에서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처절하게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게 되었다든가 하는 일들은 공주가 그만큼 주요 거점 도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주는 갑오개혁 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공주부가 되어 27개 군을 거느렸는데, 이는 전국 23개 부 중에서 가장 많은 군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1896년에는 충청남도의 37개 군을 관할하는 관찰사 주재지가 되었다.
1910년에 관찰사가 도장관으로 바뀌고 1920년대에 다시 도지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되면서 공주는 충남의 수부 도시로서의 위치를 내 주고 말았지만 그 후에도 공주는 여전히 충청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기능을 담당하였다.
1908년까지만 해도 공주군의 인구(77,922명)는 충남(680,886명)의 약 11.4%를 차지했다. 1904년에서 1908년 사이 공주에 설립된 근대 사립학교는 모두 10개였다. 교원 38명에 생도 수는 446명이나 되었다. 이런 통계는 공주가 충청도의 핵심 선두 도시였다는 증좌가 된다 할 것이다.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전은 공주에 비교도 되지 못할 만큼 열세의 도시였다. 한 예로 도지사가 연초에 초도 순시를 할 때 면담해야 할 유력 인사 수에 있어서 1927년에 작성된 자료에는 공주가 77명이고 대전은 22명에 불과했다. 도청이 이전되던 해인 1932년에도 공주는 64명이었던 데 비해 대전은 35명에 불과했다. 인구를 봐도 공주군의 1930년 인구는 약 12만 명으로 충남 전체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같은 해의 공주면 인구는 13,116명이고 대전면은 21,696명으로 대전이 많으나 이는 대전에 철도가 부설되고 도청 이전 소문에 따라 급격하게 인구 증가가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시가지 인구만을 보았을 때 1915년에 6,264(공주) 대 6061(대전), 1923년에 8,304(공주) 대 6,728(대전), 1930년에 10,116(공주) 대 16,442(대전) 명으로 192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는 공주 인구가 대전 인구보다 많았었고 도청 이전이 기정사실화되었던 1930년대 들어와서야 인구수가 역전되었던 것이다.
1918년 공주에는 시가지 정비 계획이 수립되고 그에 따른 공사가 진행되어서 근대적인 도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공주의 구체적인 모습은 한 신문기자가 공주를 방문하고 나서 쓴 기행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기행문에 의하면 당시 공주는 도청 소재지로서 도시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교통의 요지이며, 김갑순 등 신흥 부호들이 활약하는 도시로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면모가 잘 갖추어진 근대 도시 공주는 근대적인 건물과 기관을 순례하는 견학 코스가 개발되어 있을 정도였다. 또한 도로가 잘 발달되어 전국에서 상업적인 자동차 운행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학교도 많이 설립되어 1931년 공주읍의 인구가 1만 3천명이었을 때 학생 수가 무려 1732명이나 되었었다.
따라서 1920년대의 공주는 충청도의 수부 도시답게 최신 문명의 혜택이 가장 먼저 주어지는 곳이었고, 가장 새로운 지식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공주에는 일찍이 일본인이 많이 이주하여 살았고, 영명학교를 비롯한 기독교 계통의 학교 설립으로 인해 선교사를 비롯한 서양 사람도 적지 않게 들어와 살고 있었다. 아울러 공주에는 대지주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었던 바 이들의 자제들이 일찍 고향을 떠나 신학문을 섭렵하고 귀국하여 자리를 잡기도 했다. 이들과 더불어 공주의 학교에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근대적인 학문을 가르치던 교사들에 의해 공주에 근대적인 문화 예술의 도입과 더불어 신학문이 뿌리를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 지식인들은 당연히 최신 소식을 전하는 신문을 구독했을 것인데, 이에 따라 공주에 세상의 새로운 소식들이 다른 곳보다 훨씬 빠르게 전파되었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은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한글 연구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타 지역보다 먼저 접하게 했을 것이고, 동시에 이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관심이 촉발되어 뜻있는 인사들로 하여금 공주에서도 그런 추세에 따라 그에 선두로 동참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