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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시기의 산신 성황신과 지역사회

한국 전통시기의 산신 성황신과 지역사회

변동명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3-10-15
  |  
17,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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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시기의 산신 성황신과 지역사회

책 정보

· 제목 : 한국 전통시기의 산신 성황신과 지역사회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고고학/인류학
· ISBN : 9788968490545
· 쪽수 : 390쪽

책 소개

이 책은 한국의 산신과 성황신을 지방 토착세력과의 연관 속에서 살피고, 산신과 성황신을 전통시기 한국 지방사회의 내부로 이끌어주는 안내자로 활용하려 한다. 산악신앙과 성황신앙에 나타나는 지역 토착세력의 의지나 관련 활동을 검토함으로써, 지역사회 내부의 움직임을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목차

서장 _13

1부_ 산신山神과 지역사회

제1장 무등산신앙無等山信仰과 광주光州 / 24
머리말 / 24
1. 광주인光州人의 무등산신앙無等山信仰 우대 요구 / 28
2. 무등산신앙無等山信仰 우대 요구의 배경 / 31
3. 무등산신앙無等山信仰 우대 요구의 사회적 의미 / 42
맺음말 / 45

제2장 금성산신앙錦城山信仰과 나주羅州 / 48
머리말 / 48
1. 금성산신제錦城山神祭의 국행제사國行祭祀로의 승격 / 52
2. 나주羅州 팔관회八關會와 금성산신앙錦城山信仰 / 66
3. 금성산신錦城山神의 우대 요구 / 86
맺음말 / 97

제3장 순천順天의 산신山神ㆍ성황신城隍神 / 100
머리말 / 100
1. 산신山神ㆍ성황신城隍神으로 추앙된 인물 / 103
2. 산신山神ㆍ성황신城隍神의 인격신화人格神化와 그 배경 / 115
맺음말 / 140

제4장 감악산신紺岳山神 설인귀薛仁貴와 적성積城 / 144
머리말 / 144
1. 소사小祀 감악산紺岳山과 산신山神 설인귀薛仁貴 / 152
2. 지역과 국가의 수호자 감악산신紺岳山神 / 168
3. 유교사회의 전개와 감악산신사紺岳山神祠의 분화
: 감악사紺岳祠와 설인귀사당薛仁貴祠堂 / 180
맺음말 / 191

2부_ 성황신城隍神과 지역사회

제1장 성황신城隍神 신숭겸申崇謙과 곡성谷城 / 196
머리말 / 196
1. 신숭겸申崇謙의 출신과 활동 / 199
2. 신숭겸申崇謙의 곡성谷城 성황신城隍神 추앙 / 214
3. 신숭겸申崇謙의 덕양사德陽祠 배향 / 224
맺음말 / 235

제2장 성황신城隍神 김인훈金忍訓ㆍ손긍훈孫兢訓과 양산梁山ㆍ밀양密陽 / 238
머리말 / 238
1. 김인훈金忍訓ㆍ손긍훈孫兢訓의 출신과 활동 / 242
2. 김인훈金忍訓ㆍ손긍훈孫兢訓의 양산梁山ㆍ밀양密陽 성황신城隍神 추앙 / 259
3. 조선 유교사회와 양산梁山ㆍ밀양密陽의 성황신城隍神 / 283
맺음말 / 288

제3장 성황신城隍神 김홍술金洪術과 의성義城 / 291
머리말 / 291
1. 김홍술金洪術과 진보현眞寶縣ㆍ의성부義城府 / 294
2. 김홍술金洪術의 의성義城 성황신城隍神 추앙 / 305
3. 김홍술金洪術의 충렬사忠烈祠 배향 / 321
맺음말 / 334

제4장 성황신城隍神 소정방蘇定方과 대흥大興 / 337
머리말 / 337
1. 소정방蘇定方과 대흥大興 / 340
2. 소정방사蘇定方祠(소도독사蘇都督祠)의 창건 / 343
3. 대흥大興 성황사城隍祠와 성황신城隍神 소정방蘇定方 / 354
맺음말 / 366

종장 _368

찾아보기 _381

저자소개

변동명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림대학교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전남대학교 교수 [저서] 『고려후기 성리학수용연구』 (일조각, 1995) 『한국중세의 지역사회연구』 (학연문화사, 2002) 『여수해양사론』 (전남대학교출판부, 2010) 『한국 전통시기의 산신·성황신과 지역사회』 (전남대학교출판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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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머리말

처음 산신에 관심을 가졌던 게 1990년 말엽의 일로 기억한다. 20년이 훌쩍 넘어선 옛일이거니와, 지방사가 중요하다며 낯선 주제를 내밀곤 하시던 고故 최영희崔永禧 선생님의 과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였다. 자료를 찾느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읽어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나주 금성산신에 관한 기록이 자못 흥미를 끌었다. 허나 그뿐이었다. 학위논문 및 그 후속 연구에 매달리느라 산신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이색적인 그 자료에 어찌 접근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미뤄뒀다는 게 보다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던 중 10년가량이 흐른 어느 날 문득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광주 무등산신에 관한 <고려사>의 짧은 기록을 대하는 순간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하여 곧장 써내려 간 것이 이 책 본문의 첫머리에 실린 글이다. 처음 눈길을 준 것은 금성산신이었지만, 막상 글로 쓰기는 무등산신이 먼저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둘은 서로 긴밀하게 얽힌 관계였으므로, 굳이 양자를 구별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료가 적은 무등산신을 먼저 다뤄본 다음 금성산신을 본격적으로 검토하려는 게 본래의 계획이었고, 또한 실제로 그리 되었다.
이후 다른 고장의 경우를 살피고, 더불어 대상 시기를 앞뒤로 연장해가며, 성황신으로까지 눈길을 돌려 글을 쓰는 사이, 또 다시 10년여가 흘렀다. 짧지 않은 기간이건만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세월만 허비했을 뿐, 빈약한 내용이 충실해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분량이 크게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무능과 나태를 변명삼아 내세우기도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지난 20년여 동안 머리에서 맴돌았던 산신과 성황신이라는 단어를 잠시 잊으려 한다. 부족한 대로, 그 사이 오갔던 상념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마무리할 기회를 다시 찾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기왕에 썼던 글들을 더듬으며 반성하는 기회로 삼는 것도, 한 권의 책으로 묶는 의의이지는 않을까 자위한다.
책으로 엮느라 이제까지 써온 글을 정리하는 동안, 고故 이기백李基白 선생님과 최영희崔永禧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던 시절이 떠오르곤 하였다. 최영희 선생님의 과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산신에 착목하였음은 앞서 이른 대로이다. 다만 이기백 선생님께는 전혀 말씀을 드린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불쑥 금성산신을 발표하고는 그것이 실린 학술지 한 권을 보내드렸다. 다소 뜻밖이라 여기셨을 터인데, 시답잖은 내용임에도 용기를 북돋아주시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혹여 어리석은 제자가 낙담하고 좌절할까봐 격려의 말씀을 내리선 것이라는 게 요즘의 생각이다. 학문의 엄정함을 생명보다 귀히 여기시던 선생님의 가르침에 멀리 미치지 못하여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이 책을 엮기까지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입었다. 김당택金塘澤 선생님께는 차마 감사의 인사조차 드리기가 민망하다. 늘 곁에서 돌봐주시며 못난 제자가 의욕을 잃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산신과 성황신 연구를 앞서 개척한 선학들과 그 뒤를 이어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느라 분투 중인 동료 연구자들의 학은도 잊지 않으려 한다. 인문학공동체를 지향하며 늦은 만남을 아쉬워하는 무등공부방의 선배와 동료들을 비롯하여, 그 동안 저자에게 격려와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모든 분들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2013년 여름
운암서실에서 저자


서장

인간이 산악을 숭배하고 신앙한 것은 오랜 옛적 이래의 일이었다. 옛 사람들은 하늘 높이 솟은 산을 통하여, 인간이 하늘[天] 즉 신神의 세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높은 산을 매개삼아 인간이 신의 세계로 접근할 수가 있으며, 또한 신들이 인간의 세계로 내려올 때에도 마찬가지로 높은 산을 거칠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처음 내려왔던 곳이 태백산太白山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이었다든지, 혹은 사로斯盧 6촌의 촌장들이 처음 알[卵]에 들어 있는 혁거세赫居世를 발견하였던 곳이 양산楊山 아래의 나정蘿井 곁이었다는 건국신화들은, 모두가 옛 사람들의 산에 대한 그러한 관념을 반영하는 설화였다. 그리하여 그처럼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매개하는 존재라고 믿었던 산을, 옛 사람들은 마치 하늘을 섬기듯이 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의 산악에 대한 그와 같은 숭배 내지 신앙은, 곧 그 산악의 산신에 대한 숭배와 신앙에 다름이 아니었다. 자연에 존재하는 산악 자체에 대한 그것이라기보다는, 그 산악의 주재자라고 믿었던 산신에 대한 숭배와 신앙이었다. 곳곳의 크고 작은 산마다에는 하나같이 그곳을 지배하는 산신이 존재한다고 믿어 왔으며, 그리하여 사당을 짓거나 단을 쌓으며 그 산신을 모셔 왔다. 이른바 산악신앙이란 본시 그와 같은 산신에 대한 숭배와 신앙에 다름이 아니었다.
한편 성황신앙城隍信仰은 인공 구조물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산악신앙과 차이가 있었다. 여기에서 성城은 성벽城壁을, 황隍은 그 성벽을 둘러싼 공호空濠 즉 물이 담기지 않은 해자垓字를 뜻한다. 이 황隍에 물을 채운 것이 해자垓字 즉 지池인데, 그러므로 성황城隍은 곧 성지城池로서 외부에 의한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구축한 인공적인 방어시설을 가리키는 명칭이라 하여 좋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방어시설에 그것을 주관하는 신神이 깃들여 고을을 수호해 주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이른바 성황신城隍神과 성황신앙城隍信仰이 등장하게 된 유래이다.
한국의 성황신과 성황신앙은 대체로 중국에서의 그와 같은 습속이 전해져 뿌리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의 즈음에 지방의 유력자인 호족豪族들이 지역 수호신으로서의 성황신에 주목하기 시작하였으며, 늦어도 고려 성종대(981~997) 무렵이면 한국에서도 성황신앙이 자리를 잡을 터전이 마련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후 성황신앙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분포 범위를 확대해 갔으며, 고려 중엽의 인종대(1122~1146)와 의종대(1146~1170)를 거치면서는 개경을 비롯하여 널리 전국으로까지 확산되어 뿌리를 내렸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서는 대략 전국의 모든 고을에 성황사城隍祠가 설치되어 그 기능을 발휘하였을 것으로 짐작들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신과 성황신은 그 개념이라든지 유래 등에서 드러나는 위와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대체로 전통시기 지역의 토착세력과 깊은 관련을 맺은 가운데 그 숭배와 신앙이 전승되어 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였다. 제의祭儀와 같은 산신과 성황신 숭배에 수반되는 각종 의식이나 행사는 으레 저들 토착 유력계층에 의하여 주도되는 게 한국 전통시기의 관습이었다. 따라서 산신과 성황신은 그것이 소재하는 고장의 위상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 숭배와 신앙을 주도하는 해당 지역의 토착세력을 상징하는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존재이기도 하였다.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유력한 가문의 시조나 이름난 조상이 지역의 산신이나 성황신으로 추앙되는 거와 같은 산신과 성황신의 인격신화人格神化 현상도, 그러한 데에서 말미암은 일이었을 것임은 이를 나위가 없다.
나아가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정비되면서는, 각 지역을 단위로 민간에서 이뤄지던 그러한 산신과 성황신 숭배가 국가적인 차원으로 격상되기도 하였다. 나라에서는 왕경王京을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의 산신과 성황신을 그 비중에 따라 대大ㆍ중中ㆍ소사小祀로 구분해서 국가적인 사전체계祀典體系에 편입시키었다. 그리고는 왕경에서 파견한 관리 내지는 해당 지역의 지방관으로 하여금, 토착 사회세력을 대신하여 산신과 성황신에 관련된 각종 제의와 행사를 주관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이로써 해당 지역의 독자성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토착세력을 회유ㆍ포섭하고 국가적인 위협 요소를 억제ㆍ진압하며, 그리하여 국가와 지역사회의 안녕과 발전을 기약하고자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위와 같은 전개를 보인 한국의 산신과 성황신을 지방 토착세력과의 연관 속에서 살피려 한다. 산신과 성황신의 개념이나 유래由來 내지 관련 의례儀禮나 혹은 산신사山神祠(堂)ㆍ성황사城隍祠(堂)의 위치와 같은 산신ㆍ성황신 내지 그를 향한 신앙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그와 관련을 맺거나 혹은 그러한 신앙행위를 주도하던 인간들이 그것을 통하여 정치ㆍ사회적으로 획득하고자 도모하는 바가 무엇이었던가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과연 어느 시기에, 어떠한 사람들이, 무슨 연유에서 산신과 성황신을 떠받들며 신앙하였고, 그 후의 추이는 어떠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 말하자면 전통시기의 산신과 성황신 숭배와 신앙이 지니는 정치ㆍ사회적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더듬어, 그 역사적 의의를 헤아리려는 게 이 연구의 목표인 것이다.
또한 이 연구에서는 산신과 성황신을 전통시기 한국 지방사회의 내부로 이끌어주는 안내자로 활용하려 한다. 산악신앙과 성황신앙에 나타나는 지역 토착세력의 의지나 관련 활동을 검토함으로써, 지역사회 내부의 움직임을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전통시기의 산신과 성황신은 흔히 지역사회의 수호신이자 상징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역의 유력자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의 결속을 추구하는 등 그 주도권을 공고히 하고자 내세운 것이 곧 산신이고 성황신이었다. 따라서 지역의 주도적인 사회세력과 산신ㆍ성황신에 관한 연구는, 중앙과 지방의 관계나 혹은 지방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지역 간 내지 지역 내의 주도적인 사회세력 사이에 벌어지던 갈등과 같은, 생동하는 지방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 연구를 통해 그동안 전체사全體史에 매몰되어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던 지방사地方史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중앙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를 받는 대상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만으로 존재 의의를 지니는 가운데 독자적 단위로 한국 역사의 형성에 참여해 왔던, 지역사회의 역동적인 모습의 한 측면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이 연구는 총 2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는 산신을 그리고 2부에서는 성황신을 각각 지역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검토하였다. 1부와 2부는 또한 각 4편의 글로 구성되었는데, 대체로 글을 끝마친 시기의 선후를 기준으로 배열하였다. 여러 지역의 산신과 성황신을 다룬 연구의 특성상, 고찰한 시기의 선후를 고려하여 논문을 배열하는 것이 읽는 이에게 한층 편의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글쓴이가 처음 산신과 성황신에 관심을 보였던 데서 출발하여, 점차 그 대상과 시기를 넓혀가던 경로를 따라 차근차근 논의에 접근함으로써, 더불어 호흡을 같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부에서는 먼저 무등산신無等山神을 둘러싼 몇몇 움직임을 살피었다. 주로 고려 후기의 그것을 광주光州 등의 지역사회 움직임과 연결지어 해석해 보았다. 13세기 후반에 8년 간격으로 나타나는 두 기록에 주목한 결과인데, 원종 14년(1273)과 충렬왕 7년(1281)에 광주인光州人들이 잇달아 무등산신앙의 우대를 조정에 요구한 게 그것이었다. 흔치 않은 경우로서 그리 된 배경과 의미가 궁금하거니와, 그것을 전남 지역사회 내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 및 토착 사회세력의 새로운 대두와 그들의 중앙 진출이라고 하는, 당시 지방사회에서 일던 변화의 바람에 초점을 맞추어 풀이하고자 시도하였다.
다음으로, 나주羅州의 금성산신앙錦城山信仰을 검토하였다. 고려시기 이래 금성산 일원에는 산신을 제향하기 위한 사당이 5곳이나 자리하였다고 한다. 왕경王京의 주산主山인 송악松嶽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이색적인 사례이다. 나주 고을의 독특한 위상을 반영한 현상이 아닐 수 없거니와, 그리하여 금성산이 처음 국제國祭에 오른 경위를 비롯하여, 나주에서 팔관회八關會가 개최되기에 이른 사정이라든지, 혹은 백제부흥운동 및 삼별초 난의 진압과 관련하여 언급되곤 하였던 금성산신을 둘러싼 논란 등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따져 보고자 시도하였다. 고려시기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나아가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두고 고을 혹은 고을을 대표하는 유력한 사회세력 사이에서 벌어지던 갈등과 같은, 살아 움직이는 지역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의도에서였다.
세 번째로, 순천順天의 산신과 성황신을 살피었다. 전통시기 순천지역에서는 3인의 역사상 실존 인물이 산신 혹은 성황신으로 섬겨져 왔다. 박영규朴英規와 김총金? 및 박난봉朴蘭鳳이 그들이었다. 한 고장에서 3명이 그처럼 유사한 성격의 신神으로 떠받들어진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거니와, 저들 3인의 생애를 더듬으며 더불어 언제 그리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저들이 신으로 좌정하기에 이르렀는지를 헤아려, 순천지역의 내부 사정과 함께 지역을 이끌었던 토착세력의 성쇠를 아울러 밝히려는 게 연구의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계는 물론, 지역 내에서 유력한 사회세력 사이에 벌어지던 주도권 다툼과 같은 생동하는 지방사회의 단면을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1부의 마지막에서는, 경기도 감악산紺岳山의 산신山神에 얽힌 의문을 해명하려 하였다. 감악산은 한반도 중부의 전통적인 교통요지이던 적성현積城縣의 진산鎭山으로서, 이 고장은 삼국시기 이래 고구려부흥운동이 벌어지던 즈음에 이르도록 치열한 쟁탈의 대상이었다. 한데 그러한 감악산의 산신으로 신라인新羅人들이 당唐의 장수인 설인귀薛仁貴를 떠받들었다고 한다. 쉽사리 믿기지 않는 일로서,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그리하여 설인귀가 본디 적성 출신이었다는 설화가 난무하였다고도 한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거니와, 그리하여 통일신라시기에 설인귀가 감악산신으로 추앙된 배경을 더듬는 데서 시작하여, 고려왕조에 들어 감악산신 설인귀가 지역과 국가의 수호신으로 공인되는 경위 및 조선朝鮮 유교사회의 전개 속에서 감악산신 설인귀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살아남았다가 끝내 잊히기에 이르기까지를 추적하였다. 그로써 한국 고대의 쟁패전에 침략자로서 끼어든 외국인 장수가 산신으로 전화轉化하여 또 다른 모습으로 한국사에 흔적을 남긴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되새기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러는 과정에서, 왕경인과 지방인의 관계라든지 지역사회에 저류하던 삼국유민의식三國遺民意識의 추이, 지방관 및 향촌사족과 전통적인 토착세력 사이의 경쟁과 타협 등이 한층 생생하게 포착되리라는 기대도 또한 없지 않았다.
2부에서는 먼저, 곡성谷城과 그 고을의 성황신인 신숭겸申崇謙을 고찰하였다. 신숭겸은 궁예弓裔의 기장騎將으로 활동하던 중 왕건王建의 정변에 참여하여 고려의 개국공신에 올랐던 인물이다. 한데 황해도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는 그가 사후 언제인가 전라도 곡성의 성황신으로 추앙되었으며, 조선시기에는 다시 같은 고을의 덕양사德陽祠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그리 된 사정이 궁금하거니와, 그의 출신과 생애를 확인하고 더불어 사후에 그가 곡성의 성황신으로 좌정하기에 이른 과정 및 조선왕조에 들어 거듭 새로운 사우祠宇에 배향된 연유 등을 따져, 그 경위라든지 함축된 의미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신숭겸의 출신이나 본관에 얽힌 몇몇 문제를 비롯해서, 곡성의 위상 변화 및 중앙의 지배력 강화에 대한 토착세력의 대응이나, 또는 향촌사족의 성장과 조상숭배의례의 유교화 현상 등을 더듬어, 전통시기의 곡성 지역사회를 들여다보는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김인훈金忍訓과 손긍훈孫兢訓을 각각 고을의 성황신으로 추앙한 양산梁山과 밀양密陽의 경우를 살피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인물인 두 사람의 출신이나 활동이라든지, 사후 언제인가 그들이 고을의 성황신으로 추앙된 경위 및 조선시기 들어 위상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황신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사실이 지닌 의미 등을 헤아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양산과 밀양 고을의 위상 변화나 혹은 중앙의 지배체제 확립에 대한 지역 유력계층의 대응 양상을 밝혀, 중앙과 지방의 관계는 물론 지방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지역 내지 지역 내의 주도적인 사회세력 사이의 경쟁과 같은, 살아 움직이는 지방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시도하였다.
세 번째로, 의성義城과 그 고을의 성황신으로 기록에 전하는 김홍술金洪術을 검토하였다. 진보성주眞寶城主이던 김홍술이 의성의 호족으로 등장하게 된 경위나 지역 내 다른 유력 호족과의 관계, 그리고 김홍술이 사후에 의성의 성황신으로 추앙되기에 이른 사정 및 조선후기 들어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된 의미 등을 밝히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로써 후삼국시기 호족의 존재 양상이라든지, 혹은 중앙의 체제정비에 따른 고을 위상의 변화를 둘러싼 토착세력의 고심과 대응, 유교적 예제의 시행을 두고 벌어진 전통적인 토착세력과 지방관 및 향촌사족 사이의 갈등과 타협, 씨족 내에서의 사회적 분화에 따른 파계별派系別 소장성쇠가 사우의 건립에 미친 영향 등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마지막으로,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의 성황신이었다는 소정방蘇定方을 둘러싼 몇몇 의문을 해명하려 하였다. 대흥은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으로서, 백제부흥군이 처음 일어선 고장이자 또한 마지막까지 저항한 근거지였다. 한데 그러한 고을에서 당唐의 장수인 소정방을 성황신으로 모시었다고 한다. 아울러 대흥현의 대잠도大岑島에는 소정방사蘇定方祠 혹은 소도독사蘇都督祠라고 하여 소정방을 향사하는 사당이 하나 더 위치하였다고도 한다. 쉬이 납득되지 않는 현상이거니와, 소정방과 대흥현 사이의 연고를 더듬는 데서 시작하여 소정방사가 창건된 배경이라든지 혹은 소정방이 대흥현의 성황신으로 추앙되었다가 결국 잊혀가기까지의 경위 등을 검토함으로써, 고대 한반도의 쟁패전에 끼어든 외국의 한 장수가 지방의 자그만 고을에서 신격화되고, 또한 역사의 물결 속에서 전화轉化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에 이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헤아리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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