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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법사상사

선진 법사상사

김지수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4-09-23
  |  
20,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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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법사상사

책 정보

· 제목 : 선진 법사상사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철학
· ISBN : 9788968491429
· 쪽수 : 448쪽

책 소개

본서에서 연구한 ‘선진先秦’ 시대의 대표적인 유儒ㆍ묵墨ㆍ도道ㆍ법法 4가家의 여섯 분 성현의 법사상은, 명실상부하게 시대를 앞서가며 동서고금을 통해 영원히 인류의 희망의 빛이 될 ‘선진先進’ 법사상임을 확신한다.

목차

서문 5

제1편 유가儒家의 법사상
제1장 孔子의 법사상 / 24
제2장 맹자의 법사상 / 77

제2편 묵가墨家의 법사상
제3장 묵자墨子의 법사상 / 176

제3편 도가道家의 법사상
제4장 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법사상 / 244
제5장 장자莊子의 법철학 / 336

제4편 법가法家의 법사상
제6장 관자管子의 법사상 / 380

강의안 / 415
Abstract(中文摘要) / 430

책을 마치며(跋文) 443

저자소개

김지수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북 부안 곰소 출생. 전주고, 서울대법대(중국문학 부전공), 서울대학원 법학석사, 國立臺灣大學 法律學硏究所 3년 遊學, 서울대학원 법학박사, 한국학술진흥재단 박사후 연수생. 2001년부터 전남대 법대 및 법전원에 재직 중. [번역서] 「불가록不可錄」,「운명을 뛰어 넘는 길(了凡四訓)」, 「화두 놓고 염불하세(印光大師嘉言錄)」, 「절옥귀감折獄龜鑑」, 「의심 끊고 염불하세」,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遺敎經」, 「중국의 법조윤리 규범집」, 「묘림승구도기」 등이 있고, 저서로 「天道와 人法」,「생명 도덕 法文史哲學」,「지혜의 법과 생명법학」,「하늘이 알고 신이 알며 내가 알고 니가 안다-四知」,「법 없이도 잘사는 법」, 「제갈량 평전」,「포청천과 청렴정직 문화」, 「공자가 들려주는 관계의 미학」, 「채식명상 20년」, 「선진 法思想史」,「傳統 中國法의 精神」, 「傳統法과 光州反正」, 「유불선 인생관-道 닦고 德 쌓자」, 「中國의 婚姻法과 繼承法」 등이 있다. 네이버 블로그: “천인대동전당(天人大同典堂)” 티스토리 블로그: “보적념불당(寶積念佛堂)” 유튜브: “明鏡止水 寶積 명경지수 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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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편 유가儒家의 법사상

제1장 공자孔子의 법사상

1. 들어가며

한漢나라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이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지성至聖’이라고 칭송한 이래, 공자는 2천여년 동안 전통 중국 사회에서 ‘지성선사至聖先師’ ‘만세사표萬世師表’ ‘소왕素王’ 등으로 추앙해왔다. 당唐대에는 문선왕文宣王으로 존숭하여 천자의 예악禮樂을 행했고, 송宋 진종眞宗은 공자를 황‘帝’에 봉하려고도 했다. 주돈이는 ‘만세무궁왕萬世無窮王’으로, 소옹邵雍은 萬世의 王으로 존숭했다. 허나 명 세종(世宗: 嘉靖9년, 1530, 경인년)은 최고 절대권력의 자존심 탓에 공자를 왕으로 부르기에는 심기가 몹시도 불편했던 모양이다. 장총張?이 그 뜻을 알고 아부하며, 공자는 ‘先聖先師’로 부르면 되니 왕으로 부르지 말고, 사당도 ‘묘廟’로 부르고 ‘전殿’으로 부르지 말며, 소상塑像은 허물고 나무 신주神主로 대체하자고 거들었다. 이에 려관黎貫 등이 당송 이래의 관례를 거론하며, 사람에겐 “천지보다 존귀한 게 없고 부모 스승보다 존귀한 게 없는데, 폐하도 천지와 부모는 존경할 텐데, 유독 (천지와 부모 같은 스승인) 공자를 왕으로 부르는 걸 참람하다고 여기십니까?”라고 설득하자, 자기 부모를 존숭하는 걸 비방하는 말로 여기고 크게 노하여 삭탈관직하고, 끝내 공자의 왕호와 ‘大成’ ‘文宣’ 의 호칭을 뺐단다. 그래서 신위神位는 ‘至聖先師孔子’로 고치고, ‘大成殿’은 ‘先師廟’로, ‘大成門’은 ‘묘문廟門’으로 고쳤다.
실로 중국 역사상 공자만큼 중국 전통 사회의 역사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 없을 정도로, 공자는 중화민족 전통문화의 상징 그 자체가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에 元나라 때 세워진 공자의 신도비神道碑에는, 공자의 역사적 위대성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다.

“공자보다 앞선 성인은 공자가 아니면 알려질 수 없었고,
공자를 뒤이은 성인은 공자가 아니면 본받을 수 없으리.”
(先孔子而聖者, 非孔子無以明; 後孔子而聖者, 非孔子無以法.)

공자의 가르침(사상)은 한무제漢武帝 때 동중서董仲舒를 중심으로 제자백가를 퇴출하고 유가만을 존숭하는 ‘유가독존’(罷黜百家, 獨尊儒術) 정책과 송나라 때 형성된 성리학(理學)을 통해 전통 중국의 국교로 드높여졌다.
그러다가 청말 아편전쟁(1840년) 이후 중국에 근대혁명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2천여 년 동안 확고부동하게 성인과 사표로 군림해 오던 공자와 유교가 점차 신랄하고 예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태평천국과 신해혁명, 5ㆍ4운동을 거치는 동안 그 비판의 날은 더욱 시퍼렇게 날카로워졌고, 로신魯迅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는 듯했다. 이와 동시에 호적胡適과 붕우란馮友蘭 등 학자들이 학술적 연구를 시작했고, 공산주의 혁명시기에 이르러서는 공자의 수구성과 계급성이 주된 비판의 대상이었다. ‘십년호겁十年浩劫’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인방四人幇’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 이라는 기치 아래 공자에 대한 철저한 파괴를 자행하였다. 그 뒤 등소평鄧小平이 등장해 개혁과 개방을 내세우며, 공자를 비롯한 전통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적 계승발전을 시도하면서, 이제는 제법 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분위기다.
여하튼 공자는 동아시아의 역사문화에서 한가운데 우뚝 솟아 후세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쳐오고 있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공자에 대한 연구와 평가도 수많은 영역에서 다양한 시각에서 수없이 이루어져왔다. 근래에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법학도 크게 발전하면서, 법률사상의 관점에서도 제법 깊은 연구업적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여러 편의 연구논문이 나와, 공자의 법사상에 관해 새삼 특별하고 참신한 내용을 발굴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본고는, 필자가 대학 때부터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고, 론어를 배우고 또 가르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공자의 모습과 가르침을, 법학전공자의 관점에서 특히 법철학적 구조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고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공자의 사상은 철학ㆍ윤리ㆍ정치ㆍ사회ㆍ경제는 물론, 교육ㆍ문학ㆍ음악ㆍ미술 등 모든 학문영역에서 접근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해왔다. 헌데 다양한 분야와 관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된 귀결이 있는데, 공자를 대표하는 핵심사상이 ‘仁’이라는 점이다. 확실히 ‘仁’은 공자를 다른 제자백가와 구분하는, 공자 특유의 철학 범주라고 할 만하다. 물론 仁이 공자의 독창물이나 전유물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후술할 바와 같이, 仁은 이미 춘추시대에 상당히 보편적인 개념으로 등장했고, 다만 공자가 이를 자기 철학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아 종합화했다고 보면 좋다. 또 공자 말고도, 묵자도 사상 체계상 유가와 비슷하게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의 정통 성왕聖王을 도통道統으로 존숭尊崇하여, 仁義로 대표되는 요순지도堯舜之道를 철학사상의 핵심으로 삼고, 또 하늘이 부여한 자신의 사명으로 실천궁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묵자의 仁義는 공자의 仁義와 조금 다른 각도와 실질을 가지며, 특히 ‘겸애兼愛’라는 독특한 범주로 표현하기 때문에, 仁을 공자 특유의 철학범주라고 해도 크게 지나침은 없을 것이다.
仁은 춘추이전의 진정한 고문서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특히 갑골문이나 금문金文에는 보이지 않는, 춘추시대의 새로운 명사로서, 반드시 공자가 창조한 것은 아니겠지만, 공자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사실이라는 곽말약郭沫若의 지적이 학계의 통설이다. 론어에 ‘仁’을 언급한 곳이 모두 58장章에 걸쳐 105회에 이르는 사실만 보아도, 공자사상에서 仁이 차지하는 지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머리말

“동아시아 법사상의 원류는 동이족東夷族의 법사상이다!”

왜 ‘선진 법사상사’인가? 이 책을 보고 펴드는 분들은 아마도 이런 궁금함이 퍼뜩 들 것이다. 나아가 “김지수가 왜 이 책을 썼을까?”라고 궁금해질지 모르겠다. 그렇다. 먼저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책 제목을 굳이 ‘선진 법사상사’라고 붙이는 연유에 대해, 속내를 조금 풀어 보여드려야겠다. 그러려면 학문하겠다고 대학원 가게 된 배경부터 좀 말하자!
전주고 다닐 때 성적이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라 서울대 법대에 지망해서 간신히 합격했다. 입학 초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10.26과 5.18이 연달아 터지면서, 침울해진 촌놈한테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까지 겹쳐,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에 차분한 안정과 적응이 무척 어려웠나 보다. 2학년 겨울방학 때 남들 하는 대로 ‘고시(사법시험)’ 1차 공부를 시작했는데, 보름 만에 체력이 바닥나 배탈과 무기력이 덮쳐 더 이상 책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3학년 때 내가 좋아하는 한문공부나 실컷 해보자고 중문학 부전공을 신청해 1년간 오로지 골몰했다. 재미있으니 푹 빠졌고, 대학원도 중문과로 가려고 맘먹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중문과 이병한 선생님께서 전공을 내팽개치는 게 아깝다며, 법학과로 진학해 전공과 부전공을 함께 살림이 좋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강추하시는 바람에, 5학년 막판에 다시 대학원 법학과 입시준비를 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합격하자마자 입학도 하기 전에 ‘한국법제사’를 전공하겠다고 박병호 교수님을 찾아뵙고 뜻을 여쭙자, 대뜸 집안형편이 어떤지 물으셨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님 행상하시는 사실을 여쭈니, “집안형편도 어려운데 고시 봐서 출세나 하지!”라고 시큰둥하게 답변하셨다. 사실은 당신 체험에서 학문의 길, 특히 한국법제사의 앞길이 얼마나 험난할지 너무도 잘 아시기에, 도대체 학문연구의 조건이라곤 ‘한문 해독’ 능력밖에 없는 풋내기 촌놈한테, 가시밭길을 권하고 싶지 않으셨으리라!
허나 어머님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나 혼자 독단으로 결정한 다음 치른 시험에 합격했으니, 뒷감당은 어찌 되었든 일단 입학해서 박병호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선택해 연구실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했다. 형편이 어렵다고 조교 자리에 일찍 추천 받아, 두 가지 일을 아우르다 보니 체력이 바닥나고, 만성간염을 앓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3년만에 ‘조선조 전가사변률全家徙邊律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헌데 석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우리 전통 법전과 사료를 한문원전으로 뒤지다 보니, 중국의 전통법을 알지 못하면 수박 겉핥기에 그치겠다는 느낌이 강렬해졌다. 우리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중국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박사 주제는 중국으로 정했다. 허나 한국에서 중국을 깊이 연구하기가 어려워, 이병한 교수님의 적극 추천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중화민국 대만대학臺灣大學 법률학연구소에 유학遊學을 가게 되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던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어렵사리 3년을 공부하면서, 채식과 수행의 인연도 만나고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발판도 마련하여 귀국했다. 다시 복학해 박사과정을 마치고 2년만에 ‘전통 중국법에서의 정情리理법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전후로 엄청난 우여곡절과 시련을 거치면서, 학위 취득 7년만에 2001년 가까스로 전남대 법대에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지금까지 내 할 일을 해왔다. 석박사 연구하면서 눈여겨두었던 주제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정토불교 염불법문 번역소개와 불경공부를 병행하는 작업이다.
지도교수께서는 나한테 우리나라 법제사를 연구하지 않고 중국 걸 한다고 핀잔을 주셨고, 그게 사실은 험난한 가시밭길의 빌미가 되었다. 유학 후 “관자管子의 법사상”을 정리해 발표하고, 박사 취득 후 “老子의 무위자연 법사상”을 발표했는데, 교수가 되면서 공자의 법사상을 발표할 기회가 찾아왔다. 몇 년 전부터는 세 편의 논문에 기본 얼개를 덧붙여 ‘동양 법사상사’를 처음 개설해 강의하면서, 얼른 교재 겸 연구서를 내야겠다고 다짐하며 별러 왔다. 그래서 정교수 승진 논문으로 “장자의 법철학”을 완성해 발표하고, 작년 겨울 “묵자의 법사상”도 정리해 발표했다. 올 2학기 법학전문대학원과 법학과 ‘법사상사’ 과목 교재를 목표로 정하고, 여름방학 동안 맹자의 법사상을 정리해 두 편의 논문으로 발표해, 최종 여섯 성현의 법사상으로 책을 묶기로 하였다. 순자나 한비자 같은 중요한 위인이 빠져서 아쉽지만, 이 책의 인연은 여기까지로 정한다.

“동아시아 법사상의 원류는 동이족東夷族의 법사상이다!”
이 책을 마무리하는 막바지에 감사하게도 활안活眼 스님의 불교방송을 들은 인연으로 문득 찾아온 새로운 일깨움이다. 한국법제사에서 출발한 나의 학문연구 역정歷程이 막바지에 결국 다시 우리 한겨레 동이족의 역사철학으로 귀환한 것이다. 지도교수께서 우리나라 법 연구하라고 그렇게 채근하시고, 내가 우리 걸 깊이 알기 위해서 중국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파고든 것인데, 결국엔 한 바퀴 돌아 처음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앞으로 법제사 및 법철학의 마무리 정리 작업은, 불교의 법사상을 곁들여, 바로 한겨레의 뿌리 동이족東夷族의 역사와 사상을 법의 관점에서 찾아 비추어보는 일이다. 올 초 펴낸 “공자가 들려주는 관계의 미학” 끄트머리에서 선현들의 역사정신을 정리해 내 역사관을 대강 피력했거니와, 지난 6월 뜻있는 교수ㆍ학자들이 모여 ‘세계환단학회’를 창립해 새로 돛대를 펴고 발돋움했단다. 이제 인연 있는 분들과 함께 서로 협력해 “홍익인간弘益人間”과 “리화세계理化世界”를 꿈꾸고 펼쳐온 우리 동이족의 어질고 착한 숨결과 발자취를 찾아보고 싶다.
역사란 원래 권력을 쟁취한 승자가 기록한 것이므로, 누락과 삭제, 파괴와 왜곡으로 뒤범벅이기 십상이다. 특히 중국의 역사왜곡은 몹시도 심각한데, 사실 사마천의 사기와 그 이전의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 역사부터 그래왔다. 지금 중국의 서북공정 및 동북공정을 보라. 티벳과 위구르를 강제 편입한 걸로도 모자라, 남사군도까지 마수魔手를 뻗치고 발해와 고구려까지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지 않은가? 한번 중국의 영토와 역사 안에 들어온 적이 있는 모든 민족과 영역의 역사는 모두 자기네 역사라는 논리다. 그렇게 치면 징기스칸이 수백년 지배한 중국 전역은 몽골의 역사가 되고, 만주족이 호령했던 중국 전역은 또한 만주족의 역사가 될 것이다. 몽골과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했듯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이족이 중국의 동해안과 내륙 깊숙이까지 정착해 선진문명을 전파했는데, 그때그때 지배층의 정치이념에 의해 이전 역사기록을 깡그리 지우고 없애온 것이다. 특히 한무제가 대대적인 대외정벌을 벌이면서 동중서를 내세워 유가독존儒家獨尊의 통치이념과 삼강오륜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한족 중심으로 역사와 철학사상을 왜곡했는데, 그 배경에서 사마천의 사기도 쓰였다.
그런데 최근 고고학의 발굴과 함께 더 이상 속이거나 거짓말할 수 없는 명백하고 확실한 역사유물이 쏟아져 나와 동이족의 찬란한 선진문명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문漢文의 창시자로 알려진 창힐蒼?이 처음 만든 새발자국(鳥跡) 문자도 우리 고조선의 신치神誌글자인 사슴발자국(록도鹿圖) 문자에 몇 글자 더 보탠 거라고 밝혀졌으며, 은허殷墟에서 대량 출토한 갑골문甲骨文도 우리 동이족의 문화작품이란다. 왜냐하면 상商(殷)나라를 창업한 탕湯 임금이 동이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나라가 망하면서 왕족 출신 기자箕子가 조상의 뿌리인 조선으로 귀향歸鄕해 교화를 펼친 것이다. 아니, 아무런 연고나 뿌리도 없는 망국의 유민遺民이 낯선 나라에 가서 지배세력이 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사실 요堯 임금한테 천하를 선양禪讓받았다는 순舜 임금도 동이족이었다고 전하며, 순임금 때 대법관을 맡아 중국고대 법제와 법사상의 기틀을 마련한 고요皐陶도 동이족의 수령이란 게 중국 기록의 정설이다. 고요의 유명한 법언法諺은 3~4천년에 걸쳐 중국 및 동아시아 각국 전통법문화의 정수精粹이자 전통법의 핵심정신으로 살아있다.

“황제의 덕은 허물이 없어, 신하들을 간명하게 대하고 백성들을 관대히 통솔하소서. 벌은 자손에게 미치지 말고, 상은 후세까지 이어주며; 과실을 용서함에는 큰 것을 가리지 말고, 고의를 처형함에는 작은 것도 빠뜨리지 마소서. 죄가 의심스러울 때는 되도록 가볍게 처리하고, 공이 의심스러울 때는 되도록 후하게 논하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할 바에는, 차라리 무도한 죄인을 놓치는 편이 낫습니다. 이렇게 생명을 사랑하는 덕이 백성의 마음에 흡족히 스며들면, 인민이 저절로 관리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또 중국의 정사正史인 진서晉書에는, 순임금의 뒤를 이은 “우禹임금이 서강西羌 출신”이고, 周나라 왕업의 기틀을 다진 “문왕文王은 동이東夷 출생”이라는 기록이 무려 네 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문왕의 아들로서, 하례夏禮와 은례殷禮를 바탕으로 주례周禮를 제정한 주공周公도 당근! 동이족이다. 주공은 공자가 자나 깨나 그리며 꿈에라도 뵙길 고대하던 성인이다. 주례는 춘추전국까지 살아있는 법규범으로서 한漢 이후 율령체제의 골간骨幹을 이루어 청말까지 이어졌고, 아직도 동아시아 인민의 무의식에 뿌리 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은나라 때까지는 고조선이 줄곧 산동반도 일대까지 지배했으며,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창업한 강태공도 그곳 동이족 출신이란다.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주나라가 영역을 확장하였고, 산동 지역은 주공을 봉한 로魯나라와 강태공을 봉한 제齊나라가 들어서게 되었다. (참 흥미롭게도, 내가 대만대학 유학 시 등산 가서 대륙에서 건너온 분을 만나 중국어로 한참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분이 내 말씨가 완연히 산동말씨라는 것이다. 산동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같은 동이족의 터전임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까지 대륙에 가본 적도 없고, 북경에서 자란 조선족 교포한테 중국어를 좀 배운 적이 있을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제 환공을 도와 춘추 오패의 첫 패권을 차지한 관중管仲도 동이족 출신이고, 공자와 맹자도 동이족이다. 공자의 조상은 은나라가 망한 뒤 봉해진 송宋나라의 시조 미자계微子啓의 왕위를 물려받은 아우 미중微仲의 직계 후손으로 송 귀족이었는데, 내란으로 피살하면서 자손이 로魯나라로 망명했단다. 동이족 은나라의 후손이니 동이족 혈통을 이어받은 것은 물론이다. 공자가 그토록 동이를 예찬한 이유를 이제 조금 알겠다. 맹자의 조상은 로魯나라 환공桓公의 세 서자(三桓)인 맹손孟孫ㆍ숙손叔孫ㆍ계손季孫씨 가운데, 맹손씨의 지손支孫이 姓을 ‘孟’으로 바꾸어 ‘추鄒’로 이주했다고 하니, 역시 주공의 후손으로 동이족의 핏줄과 정신을 물려받았다.
그러고 보니, 본서에서 연구한 여섯 성현 가운데, 관중ㆍ공자ㆍ맹자는 우리 동이족인 셈이다. 로자老子는 진陳 나라 사람으로 주나라 도서관장을 맡았다고 하니 동이족인지 알 수 없다. 묵자墨子는 신비에 싸여 피부가 검어 외국인이란 설도 있으나, 송宋나라 대부 출신으로 몰락해 로(魯)나라로 이주한 수공업자라는 통설에 따른다면, 송宋나라 몽蒙(河南 商丘) 출신인 장자莊子와 함께, 공자처럼 동이족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 중국 역사문화의 절반 이상은 동이족의 유물이니, 본서도 대략 그 비율에 합치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필자나 본서가 한겨레 동이족의 민족주의를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지워지고 왜곡되어온 역사의 본래모습을 찾아, 민족정기와 역사정신을 되살리고자 할 뿐이다. 나아가 중국 및 일본의 끈질긴 역사왜곡은 물론, 국내에서도 사대주의 모화慕華사상에 젖거나 신라 중심으로 편협하게 치우쳐 고구려와 백제를 말살해온 역사왜곡, 그리고 실증사학이란 명분 아래 이병도 이래 일제 식민사관을 물려받아 한겨레의 역사와 정신을 말살하려는 주류 역사학의 삐뚤어진 눈과, 미국 제일주의로 치닫는 한심한 친미주의의 사팔뜨기를 바로잡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그동안 잊히고 사라진 우리의 얼과 자취를 되찾아 밝히고자 할 따름이다.
그러니 다소간 한겨레 동이족의 예찬론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읽어보면 알겠지만 본서의 내용은 순전히 현전하는 문헌자료에 근거하여 객관 공정한 안목으로 착실하게 실증한 연구다. 적어도 본서는 동이족과는 전혀 무관한 학술연구이자 교양고전이다. 다만, 제목은 ‘중국’에 한정하지 않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선진’ 법사상사로 정했는데, ‘선진先秦’과 ‘선진先進’의 뜻을 아우른 중의법重義法을 따랐다. 당초 나의 연구의식이 뇌리에 깊이 새겨진 인연인지, 박사학위 논문 주제에 ‘중국’이란 단어를 썼을 뿐, 그 뒤로 펴낸 책이나 연구논문의 제목에는 줄곧 ‘전통법’이나 ‘전통법문화’라는 포용력 있는 용어를 써왔다.
사실 ‘東夷’는 동쪽 큰 활 잘 쏘는 종족이란 뜻이며, ‘오랑캐’란 폄훼의 의미는 나중에 동이족에 대한 경외심敬畏心과 중화족의 열등감이 어우러져 굴절된 역설의 소산이다. ‘중화中華’나 ‘이적夷狄’의 차별이나 편 가르기는 아주 야비하고 저열하며 편협한 못난 열등의식의 발로일 따름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상 고대 그리스로마의 ‘바바리즘’부터 유대인의 선민의식(헤브리즘)과 한족漢族의 중화의식, 그리고 세계대전의 원흉이 된 히틀러의 게르만 우월주의 나치즘에 이르기까지, 편협한 극단적 민족우월주의는 자기 민족의 열등감을 감추려는 위장(camouflage)전술과 역설적인 자아기만(최면)의 발로이며, 끝내는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참혹한 비극으로 치닫고 말았다.
어느 때나 곳을 막론하고, 양심과 지혜의 빛을 밝힌 성현들은 만물의 궁극 근원인 하나(一)의 진리(道)를 깨달아, 인류평등과 중생평등까지 설파하고 계신다. 하물며 인종차별과 민족의 우열을 따지겠는가? 인도는 아직까지 사성계급(카스트) 차별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일찍이 석가모니 붓다는 “출신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따라 사람의 귀천과 존비가 판가름 난다”고 가르치셨단다. 청정한 마음으로 착한 행위를 하면 고귀한 존재가 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나쁜 짓을 하면 비천한 중생이 되는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다른 성현도 정도와 표현의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그런 깨달음과 가르침을 전하였다. 다산도 론어論語의 주석을 모으면서, 오랑캐 짓하면 ‘이적夷狄’이고 예의바르면 ‘제하(諸夏: 中華)’라고 공자의 뜻을 풀이한다. 사실 ‘중국’이란 ‘문명의 중심국가’란 뜻이다. 그러니 ‘동방예의지국’인 동이족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중국’인 셈이다. 근현대 중국의 지성인 학자 양수달(楊樹達: 1885~1956)도 건국 직후에 아주 양심 바른 식견을 펼친다.

“필?의 전쟁에서 초楚 장왕莊王이 예의에 맞게 움직여, 진晉이 이적夷狄으로 변했고 초楚는 군자가 되었다. 계보?父의 전쟁에서 중국은 새로운 이적이 되었고, 오吳는 조금 진보했는데, 백거柏?의 전쟁에서 오왕吳王 합려闔廬는 중국(의 문화)을 염려하여 이적을 물리쳤으며, 황지黃池의 회동에서 吳王 부차夫差는 성주成周를 내세워 천왕天王을 드높였다.(존주양이尊周攘夷) 초와 오는 모두 춘추에서 줄곧 이적으로 지목한 나라들이다. 공자는 로魯 소공昭公ㆍ정공定公ㆍ애공哀公 시대에 살았으니, 초楚 장왕莊王 일은 들었을 테고, 합려闔廬와 부차夫差의 일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적에게 (어진) 군주가 있고 중국에 임금이 없다는 탄식을 하지 않았겠는가? 춘추의 의리(정신)는 이적도 중국(문명)에 나아가면 중국으로 대하고, 중국도 이적(짓)이 되면 이적으로 여긴다. 무릇 공자는 이적과 중화의 경계를 그음에 혈통ㆍ종족ㆍ지리나 기타 조건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행위를 표준으로 삼았다. 2천수백년 전에 산 분이, 어떻게 그리 활연 대오하여 수천년 뒤에 히틀러나 도우죠우 히데끼(東條英機: 1884~1948, 일본 전범으로 처형당함) 같은 인간쓰레기가 나와 민족우월론으로 천하를 전란의 참화에 빠뜨릴 줄 미리 훤히 알고서, 미연에 예방하고자 (경고)하셨을까? 이런 식견은 얼마나 탁월한가! 이런 지혜는 얼마나 심오한가!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대민족주의를 반대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공자의 이런 위대한 정신을 참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론어를 해석하면서, 혹시라도 ‘이적에 비록 임금이 있더라도 중국에 임금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풀이해, 편협한 견해로 공자 글을 읽는다면, 이는 정말 크나큰 오류다.”

참으로 공감할 만한 공평한 정견正見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인류는 시와 비, 선과 악을 나누며 사물과 인간을 둘로 가르는, 서양의 이분법적 흑백논리의 불완전함과 위험한 함정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다. 이제 인류의 정신문명은 바야흐로 선악과 시비는 물론, 동서양과 남녀ㆍ고금古今까지 함께 하나로 아우르는 ‘천하대동天下大同’과 ‘사해동포四海同胞’의 ‘세계일화世界一華’가 활짝 꽃피려는 시절인연이 무르익고 있다. 그런데도 미ㆍ일ㆍ러ㆍ중 같은 강대국은 아직껏 세계패권을 차지하려는 정치ㆍ경제ㆍ군사ㆍ외교적 제국주의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말로는 평화공존을 떠들면서 영토확장과 역사왜곡을 끈질기게 집요히 밀어붙이고 있다. 특히 “중국은 제국주의ㆍ패권주의ㆍ식민주의를 반대하고, … 세계 평화를 수호하고 인류 진보를 촉진하는 사업을 위해 노력한다.”는 헌법 선언과 정반대로, 제국주의ㆍ패권주의ㆍ식민주의를 강화하느라 혈안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 및 세계질서 속에서, 우리 한겨레는 세계의 중심축이 되기 위하여, 저들의 잘못된 망상과 미몽을 깨우치고 민족의 얼과 혼을 불러 일깨우는 자아성찰의 배움과 수양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한글을 지키고, 잊히거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밝히는 일이 아주 중요하고도 시급하다. 다행히도 과학기술과 학문연구가 눈부시게 발달하여, 수천년간 땅속에 묻혀 파괴와 왜곡을 면한 유물유적들이 하나씩 나타남으로써, 도저히 없애거나 속이거나 거짓말할 수 없는 철증鐵證과 확증確證이 되고 있다.
사실 공자가 역사를 고증하는 증빙자료로 명확히 언급한 사료史料로서 ‘문헌文獻’이란, 문자기록으로서 ‘문文’과 사람을 통해 전해 바치는 ‘헌獻’을 나란히 가리킨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벽에 숨긴 서책이나 현인들이 암송하여 전한 경전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고 역사‘문헌’으로 공인받았다. 불경도 오랫동안 암송에 의한 구전을 거쳐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심지어 지금도 인도인 가운데는 방대한 경전을 통째로 암송하는 분이 있단다. 인도는 중국과 정반대로 문자기록을 하지 않는 전통이라서, 고대 인도의 역사기록은 베다와 불경을 통해 간접으로 알 수 있는 정도란다. 하지만 사람의 두뇌와 마음에 새겨져 구전되어오는 ‘헌獻’을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도에는 고대사가 거의 없는 것이 된다. 이게 말이 되는가?
하물며 뒤에 나올 장자莊子의 말처럼, 마음을 비우고 맑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밝아지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천하일과 남의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보고 아는 신통력(숙명통ㆍ천안통ㆍ타심통)이 저절로 나타난다는데, 그런 성현들이 손바닥 안의 구슬에 비춰보듯 보고적어 전하는 과거 역사는 도대체 역사 ‘문헌’이 아니란 말인가? 권력 투쟁과 유지에 혈안이 된 속물 정치가나 어용학자들이 문자기록을 조작ㆍ폐기ㆍ왜곡하기가 어려울까, 아니면 문자를 모르는 총명한 두뇌가 암송해 구전하거나 성현이 숙명통으로 과거역사를 비춰보는 게 어려울까?
인류의 혈통과 문명도 지구상의 바람이나 해류가 기압과 수온 차이에 따라 자유롭게 흐르며 뒤섞이듯이, 예로부터 끊임없이 교류하고 뒤섞여왔다. 하물며 불교의 가르침처럼, 우리 영혼이 이 나라 저 종족을 윤회한다면 어떠하겠는가? 신라 왕릉서 나온 유리구슬은 유럽과 중동에서 인도를 거쳐 전해진 기술로 자바섬에서 만들어 뱃길 타고 교역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전남북 일대에 널리 분포하는 남방식 지석묘도, 온조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해 확장하기 훨씬 이전에, 인도네시아 폴리네시아 인종이 뱃길 타고 흘러들어와 정착해 남긴 유물유적임이 분명해졌다. 나주 반암리 고분도 남방 해양성 유물이란 소식이 들린다.
하물며, 뭍으로 이어진 중국에, 히말라야 천산에서 몽골을 거쳐 만주에 이른 동이족이 료동반도와 발해만을 따라 산동 일대까지 내려와 살며, 나름대로 문명을 꽃피워 전한 흐름과 자취는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夏와 은殷이 중원의 일부를 차지한 부족국가라면, 그 주위는 사람이 살지 않은 텅 빈 황무지였을까? 은나라가 여섯 번이나 천도한 사실 자체가 주위의 막강한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실례가 아닐까? 은殷 자체가 산동 일대까지 확장한 고조선의 동이족에서 따로 떨어져나가 세운 나라로서, 하夏를 대체해 중원 문명의 중심이 된 것이리라!
사실 중국은 영토나 문명 자체가 엄청난 포용성을 지닌 용광로처럼, 갈수록 불어나는 눈덩이처럼 엄청난 가속도로 커져왔다. 은殷과 주周부터, 남북조와 5호16국, 료遼ㆍ금金ㆍ원元ㆍ청淸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에서 북이나 동에서 내려와 중원을 지배한 동이족 계통의 왕조가 전체의 절반이 넘게 많았으나, 대부분 왕조의 운명이 다하기 전에 중국문명이라는 용광로에 다 녹아 융화되고 말았다. 한문漢文만 해도 동이족의 록도문자鹿圖文字에서 시발하여, 갑골문을 거치며 오랜 세월을 두고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며 확장 발전해온 역사적 산물이란다. 따라서 한문을 비롯한 중국 문화 자체가 동이족과 한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의 공동 합작품이고, ‘동아시아 문화’로 부름이 공평하고 정당한 객관 식견일 것이다.
실제로, 근대 공산혁명 이후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공산주의가 전 인류 문화지식을 종합해 집대성한 전형이 마르크시즘이라는 이론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주의를 골간으로 전통문화와 근대 서양문물까지 흡수해, 인류 문화지식유산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중국식 사회주의 문명을 창조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의 정치지도층과 역사학계도 이러한 공정하고 유연한 문명사관에 입각하여, 말이나 글로만이 아니라 실제 행위로서 참된 ‘중화中華 문명’의 전범典範을 솔선수범으로 실천궁행하길 간곡히 권청勸請한다. 아울러 우리나라 정치가ㆍ학자ㆍ지식인은 물론 교양 있는 국민도, 다함께 이러한 안목과 가치관으로 민족주체성을 확립하여, 새로운 인류문명의 창조와 세계평화 발전에 흔들림 없는 핵심축이 되길 간절히 염원한다.
본서에서 연구한 ‘선진先秦’ 시대의 대표적인 유儒ㆍ묵墨ㆍ도道ㆍ법法 4가家의 여섯 분 성현의 법사상은, 명실상부하게 시대를 앞서가며 동서고금을 통해 영원히 인류의 희망의 빛이 될 ‘선진先進’ 법사상임을 확신한다. 그런 성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법사상을 알아 마음에 새기고 계승하여, 미래의 새로운 법문화의 창달과 발전에 활용하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실로 오랜 세월의 연찬과 기다림을 거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펴내게 되었다. 당시 중원의 통일을 꿈꾸던 성현들의 사랑과 슬기가, 지구촌으로 넓혀진 인류 공동체의 대동화합과 천하태평의 실현에 크게 이바지하길 바라는 염원에서 말이다.
이러한 필자의 소탈한 뜻과 앞에서 밝힌 순박한 문명역사관을 염두에 두면서, 아래에 펼쳐질 여섯 성현의 법사상 본론을 읽어주시면, 필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보람과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을 펼쳐 읽게 될 독자들과 종이에 쓰인 글을 통해 만나는 정신교감의 인연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서론序論 머리글을 마친다.

갑오경장 및 동학혁명 120주년을 맞이한 2014년 8월 25일
팔월 초하루 필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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