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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의 석탑

전남의 석탑

천득염, 김준오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5-02-25
  |  
25,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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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의 석탑

책 정보

· 제목 : 전남의 석탑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한국학/한국문화 > 한국문화유산
· ISBN : 9788968492006
· 쪽수 : 425쪽

책 소개

전남ㆍ광주지역의 석탑을 총 망라하여 조사ㆍ연구한 개론서이다. 전남대학교 천득염 교수가 30여 년 간 수집한 자료와 현장답사를 통하여 전남ㆍ광주지역 석탑의 특성을 규명하고 현존하는 100여 기의 전남ㆍ광주지역의 석탑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목차

책을 펴내며 천득염 4
제1장 전남지역불탑의 특징
1. 전남지역 불교건축의 출발과 성격 10
2. 전남지역 석탑의 출현 13
3. 전남지역 탑파의 분포 상황 15
4. 전남지역 불탑의 조형특성 20
5. 전남지역석탑의 특징 34
6. 결어 38
제2장 전남지역의 불탑
1. 광주 42 / 2. 목포 84 / 3. 순천 86 / 4. 여수 120 / 5. 나주 123
6. 광양 136 / 7. 담양 145 / 8. 곡성 162 / 9. 구례 175 / 10. 고흥 222
11. 보성 227 / 12. 화순 242 / 13. 장흥 319 / 14. 강진 332 / 15. 해남 348
16. 영암 367 / 17. 함평 385 / 18. 영광 388 / 19. 장성 400 / 20. 진도 408
21. 신안 418
참고문헌 425

저자소개

천득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 건축학부 석좌교수이다. ‘백제계석탑의 조형특성과 변천에 관한 연구’로 고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주로 불탑에 관한 연구를 수행해왔다. 특히 ‘인도불탑의 아시아지역 전래양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하버드대학 미술학과와 교토대학 건축학과에서 Visiting Scholar로 ‘시원불탑의 의미론적 고찰’, ‘불탑의 동아시아지역 전래’라는 주제의 연구를 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은일과 사유의 공간 소쇄원』, 『운주사』, 『전탑』, 『백제계석탑연구』, 『한국의 건축문화재』, 『광주건축 100년』, 『전남의 석탑』, 『인도불탑의 형식과 전래양상』, 『동양의 진주 스리랑카의 역사와 문화』 등이 있다. 그간 1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문화재위원과 한국건축역사학회장, 국제온돌학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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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오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전남대학교에서 『인도 초기 Stupa 형식 연구』를 통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국내외 불탑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주요 연구는 전남대학교 천득염 교수와 함께 공동 진행하였으며 국내를 비롯해 동아시아의 불탑에 대해 다양한 연구와 논문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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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장 전남지역불탑의 특징

1. 전남지역 불교건축의 출발과 성격1
언제 전남지역에 불교가 도입되었을까? 백제에 불교가 도입된 침류왕 원년(384년) 이후 불교는 점차 남하하면서 영향력이 증대 되었고, 광주. 전남지역에까지 세력이 다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가설적으로 백제가 마한을 통합(근초고왕 24년, 369년)하고 나서 불교가 유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불명하다. 다만 불교도입 초기에 위례성이 수도였던 만큼 당시 상황으로 보아 한반도 아래쪽 까지 널리 포교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수도가 웅진과 사비로 점차 이동하면서 성왕을 비롯한 제왕들의 불교장려책으로 사찰들이 전북지역에 까지 지어지게 되었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를 비롯한 각종 석탑과 사지가 이를 대변하고 있으나 전남에서는 백제시대의 불교유물이 아직 학계에서 공인될 정도로 확실히 나타나지 않고 있고 통일신라시대의 것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불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이래 약 400년 가까이 전남지방에는 백제불교미술의 뚜렷한 잔재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사항이다.
이처럼 전남지역에는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들어오고 난 후로 좀 늦게 도입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영산강유역에 마한이라는 강력하고 문화적으로 주체적인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고 백제의 중심세력권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어서 불교의 도입이 늦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전남지방의 현존 사찰 중에서 영광 불갑사, 나주 불회사는 침류왕 원년 마라난타 창건이라 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이는 당시의 기록이 아닌 조선후기의 기록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선암사는 26대 성왕 7년(529) 아도화상 창건이라 하지만 아도화상의 생존연대가 맞지 않아 문제가 있고 백양사는 30대 무왕 33년(633) 如幻大師가 창건하였다 하나 이 또한 분명한 근거가 없다. 이들 뿐만 아니라 무위사, 대흥사, 화엄사, 곡성 관음사, 개천사, 나주 죽림사 등이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한다.2 그러나 근자에 월남사지 등 몇몇 사지가 발굴되었고 그곳에서 백제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어서 장차의 연구결과가 기대된다. 또한 전남지방에 백제시대의 불교가 전파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지역의 거점에만 전파되었기 때문에 많은 불교 유물,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3는 견해도 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선종이 성행하여 5교 9산으로 대별되어 불교가 발전하였는데 9산중 가지산문의 보림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이 전남지역에 자리하여 불교진흥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전국적인 입장에서 보아도 가장 번성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고려시대의 불교종파로는 화엄종을 비롯하여 자은(법상), 남산(계율), 조계(선종), 천태, 법성, 열반, 시흥 등 12종가가 있었다. 이 중에서 활약상이 큰 것은 조계종, 화엄종, 자은종, 천태종이었는데 특히 전남에서는 조계종이 현 송광사를 근본도장으로 펼친 선불교 중흥을 위한 定慧結社를 일으켰고, 화엄사상을 펼치기 위하여 천태종이 강진 만덕사(현 白蓮寺)를 중심으로 한 백련결사를 일으켜 불교중흥을 꿰했다. 이 운동은 고려시대 불교 중흥의 대표적 양 주류로서 전남이 중심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한 불교의 탄압으로 불교세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어 산지불찰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태조나 세조의 개인적인 好佛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사찰은 축소 통폐합을 거듭하였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이전의 법통을 유지한 사찰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 시대의 전남지역 사찰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찰은 깊은 산에서만 볼 수 있었다. 악조건 속에서도 전남지역에는 고승 및 고찰들이 많이 있어 그나마 불교의 줄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임란 의병장으로 활약한 서산대사가 대흥사에 가사와 바리때를 전하여 보관하게 하였거니와 나중에는 이 절에 초의선사가 자리 잡음으로써 불도의 맥을 잇게 하여 선풍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특히 승려들의 왕성 출입을 금지하고 전국에 선종과 교종의 사찰 18개씩만을 남기는 정책으로 불교를 억압하여 승려들이 왕성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던 조선시대에도 그들은 풍토적으로 신앙심이 두터운 전라남도로 많이 찾아들었다.
전남에는 이른바 사찰 21본산 가운데 5대 본산이 있으며 특히 禪門이 많다. 선문이라면 흔히 九山을 들지만 그 가운데 三山이 이 고장에 있으니 가히 선종의 태자리라 할 만하다. 선문은 장흥의 보림사, 지리산의 실상사, 곡성의 태안사 등이다. 뿐만 아니라 16국사를 낸 승보사찰 송광사를 비롯하여 유서 깊고 뼈대 있는 큰절이 많고 비록 작고 쇄락하였으나 반듯한 법통을 지닌 절들이 골골에 자리 잡고 있다.
전남지역의 사찰건축은 삼국시대 초기 사찰과 같은 정형적인 형태는 찾을 수 없다. 즉 8각의 목탑을 중심으로 3금당이 주위에 배치된 고구려식 가람배치나 중문, 탑, 금당, 강당, 회랑이 중심축 상에 배치된 백제와 신라식 가람배치형식은 전무하다. 또한 백제식과 신라식 가람배치에 1탑이 2탑으로 변한 형식인 통일신라식 가람배치 형식이 이 지역에서는 많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4 그 이유는 전남지역이 왕도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라는 점과 사찰의 창건이 다소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람의 형식이 변모되었고 지역적 환경에 적응한 것이라 짐작된다. 아니면 전남지역 특유의 토착문화가 있어 불교문화가 도입되는데 다소 거부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삼국시대 초기사찰이 왕도를 중심으로 가까운 곳에 건립되고 평지에 교종의 교리에 따라 세워졌으나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창건된 전남지역의 사찰들은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선종의 교리에 따라 산속 깊숙이 산지에 세워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시대 이후의 사찰들은 도선국사의 영향을 대부분 받아 풍수사상의 원리에 입각하여 입지하였기 때문에 산중의 요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산중의 계곡에 사찰이 입지하면 자연히 대지의 조건이 협소하고 불리한 곳이 된다. 따라서 대지의 형상이 방형이 아닌 불규칙한 형태가 되고 경사가 급한 계곡에 위치하기 때문에 여러 단의 축대를 쌓고 점점 상승하면서 각종 전각이 배치된다. 또한 중심축의 개념이나 중정의 성격이 약화되어 대지의 형상에 따라 유리한 곳에 편리하게 위치하였다. 더욱이 창건당시의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지 않고 중창할 때마다 새로운 전각들이 부가되어 복합적이고 불규칙한 형식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 등으로 유명한 전각들이 불에 타 최근에 복원하였으니 원래의 모습을 더욱 잃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의 본래의 기능을 갖는 전각들 이외에 전쟁과 관련된 건물들도 사찰의 경내에 건립되어 있다. 또한 기복신앙과 무속신앙에 따라 전각들도 부가되어 경내에는 수십 개의 전각과 요사채, 승방, 선방, 칠성각, 산신각 등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2. 전남지역 석탑의 출현
현존하는 한국의 석탑은 7세기 초의 미륵사지석탑을 효시로 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수입된 것은 4세기 후반부터이지만 적어도 현존하는 유물에 관하는 한 전남지방에서 확인되는 불교미술품은 8세기 중엽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으로 부터 출발되고 있다. 물론 전라남도 내에 몇 사찰이 문헌상으로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나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어 신뢰성이 부족하다.
또한 전남지방은 백제 근초고왕(369) 대까지 마한에 속하였으나 그 후 백제가 망할 때까지 약 300년간은 백제의 문화권에 있으면서 이때의 불교유물은 물론 고려조에 접어들어서도 백제계양식의 문화적 재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양식의 불교미술이 전라도 지역에 널리 나타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전남지역에서는 삼국시대의 석조 불교문화유적이 나타나지 않는가? 이러한 현상은 석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우선 이 지방 전통문화 자체에 불교를 수용할 수 없는 어떤 요인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5 무언가 불교수용을 지체시키는 요인이 있었을 것인데 이는 전남의 지리적인 위치와 토착성이 강한 문화적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이 지역의 토착세력이 기존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지배세력의 문화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지 않았나 하고 추정 되는 것이다.
또 왜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의 고토에 백제적인 문화현상이 나타나지 않은가? 이는 고려시대에는 백제의 문화를 재현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여러 가지 유구에서 백제적인 양상들이 보이고 있음과는 비교가 된다할 것이다. 아마 신라에 의한 통일은 백제의 옛 영토에서 백제의 정치, 문화적인 잔재가 남아 있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위와 같은 논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의견이 가능하다.
- 전남은 당시의 국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어서 아무래도 불교문물의 도입이 늦어졌을 것이다. 또한 백제가 익산의 도읍경영을 끝으로 대규모 가람을 조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주와 부여지역, 그리고 전북 익산까지는 그 영향력을 미치나 전남지방까지는 내려 올 여유가 없었던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근자에 백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음은 주목할 대상이다.
- 다른 논거로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백제의 영향력이 전남지방에 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즉 근초고왕 24년(369)에 마한의 잔재세력이 백제에 소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전남지역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집단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 과거 전남지방의 제반 문화양상이 한강유역이나 금강유역에서 발달한 백제문화와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묘제의 독자성을 들 수 있는데 백제의 묘제로서 대표적인 석실분과 전남지방의 대표적인 묘제인 옹관묘와의 강한 대비성을 지닌다. 즉 이 지역의 전통묘제인 옹관묘 문화를 이루고 있던 집단이 백제의 정치적 영향권 내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문화형태를 고집하여 불교문화를 수용함에 있어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경향을 보인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수 있겠다.
- 이러한 강한 전통에의 집착은 오히려 이 지방의 문화적 기반이 백제보다는 마한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들 문화의 기반은 백제의 중심문화와 대립할 만큼 강하고 토착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같은 문화적 기반이 불교의 수용을 쉽게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며, 마침내는 이들 옹관묘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한 6~7세기가 지나고 나서 7~8세기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느린 속도로 불교문화의 전파가 가능했을 것으로 풀이된다.6 결국 신라의 새로운 영토가 되고 나서 신라 왕경의 불교문화가 전남지역으로 서서히 파급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 때 백제의 문화적 잔재를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 결국, 9세기에 접어들면서 선종의 유행을 따라 당 유학에서 돌아온 고승들이 중앙왕권 또는 신라귀족인 지방영주의 비호를 얻어서 주로 지리산 주변에다 화엄사, 실상사, 태안사 등의 가람을 일으킴으로써 소위 구산선문을 형성하게 되고 이에 따라 전남지역에 탑의 건립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사찰의 건립이 선종의 유행이후 당 유학파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늦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3. 전남지역 석탑의 분포 상황
전남지역 석탑의 분포는 크게 몇 가지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먼저 8세기 중반이후 나타나는 신라전형양식석탑을 비롯하여 통일신라 말기의 약화된 양식으로 변화하는 과정 중에서 보여지는 신라양식의 흐름이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영산강 주변지역을 제외한 지역, 즉 전남지역의 동부와 남부의 일부 지역(순천, 광양, 보성, 장흥 등)에서만 석탑이 나타나는 분포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영산강 지역의 토착문화라 여겨지는 옹관묘 분포지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 백제의 옛 영토라기보다는 백제의 불교를 받아들이기엔 껄끄러운 마한의 문화적 상이성과 배타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특징은 우선 석탑건립이 前代에 비해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된 점으로 신라의 석탑이 경주지역의 부근에 밀집되어 나타나는데 반해 고려의 경우 왕도인 개경부근이 우세하긴 하지만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타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분포상의 변화는 시대상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호국적인 왕실불교에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대중화된 경향을 보이는 점이다. 따라서 호국불교적인 성격을 띠는 국가종교로서 전국적인 형태의 사찰 조영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고구려, 신라, 백제의 舊都邑 지역에 새로운 탑파를 다수 건립한 것 등이 그러한 점이라 하겠다.7
또 다른 논거로서 고려시대의 조탑 활동에 순수한 지방세력 내지는 민중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경북 예천의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명문, 경복궁에서 대구박물관 앞뜰로 옮겨진 淨兜寺址五層石塔 내에서 발견된 造成形止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는 많은 경우 그 지역민의 발원에 의해 석탑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 석탑의 양식상의 변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前代의 왕도 중심의 일률적인 건탑양식에서 벗어나 각 지방의 토착세력이 건탑에 관여했을 때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징이 반영되어 다양한 형태의 건탑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8
전남지역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흐름은 고려시대 석탑에서 나타나는 백제적인 요소의 출현이다. 따라서 백제의 고토였던 충청지역과 전북지역에서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한 백제전형양식의 석탑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전남지역에도 이의 한 흐름이 되고 있는 백제양식계 석탑들이 나타나고 있다.9 이들 중 전남지역에서 나타나는 백제양식계 석탑들은 주로 전남지방의 북부와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전개되고 있는데 백제양식계 석탑들 중 비교적 신라양식 탑의 형식을 상당부분 절충하는 의장적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담양, 곡성, 남원 등 전남의 북부지역과 그 인근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나타나는 탑신을 받고 있는 받침대가 유난히 강조된 모습이 특징적인 하나의 부류와 나주, 화순, 보성, 진도 등 전남의 서부와 남부지역에 분포되어 나타나는 탑의 높이에 비해 초층 탑신이 지나치게 높고 전반적으로 좁은 폭을 갖는 또 하나의 부류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전남, 광주지방에 산재해 있는 탑들은 어떤 것들이 있고 그 양식상의 특징은 어떠한가?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석탑들은 국보가 3기, 보물이 29기, 지방유형문화재가 19기, 문화재자료가 14기로 총 65기이다. 시기적으로는 통일신라 탑이 15기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려시대 탑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시기의 석탑들은 여느 신라양식 탑과 같은 전국적 양상을 지닌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고려시대의 석탑들은 전남지방의 지역적 특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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