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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8970276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16-07-26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악수(惡手)의 교환
동상(同床)
이몽(異夢)
D-day 7
D-day 6
D-day 5
D-day 4
D-day 3
D-day 2
D-day 1
D-day
에필로그
책속에서
추운 나라의 눈발은 거셌다. 모스코바 공산대학 교정은 이미 눈밭이었다. 그 위로 네댓 명이 신나게 뛰어다니며 원치 않은 고랑을 냈다. 격한 농부들의 정체는 그동안 눈을 볼 일 없었던 동남아인이었다. 아무래도 주변 분위기와 지리적 위도에 맞지 않는 피부색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것이,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이 정식 명칭인 이곳은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였기 때문이다. 다양한 피부색은 오히려 이 학교의 자랑거리였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이 추운 곳으로 왔을까. 까무스름한 피부에 떨어지는 하얀 눈을 처음 보듯,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기 위해 왔을까. 아님 만들기 위해 왔을까. 한 사내가 3층 창가에서 하얀 고랑을 내려다보았다. 호리하지만 다부진 체격에 10대 후반이라 하기엔 얼굴이 옹골찼다. 제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사내가 뒤돌아보았다. ‘조선민족연구회’란 팻말이 달린 방에 여자 한 명을 포함한 조선인 다섯 명이 차례로 들어왔다. 들어올 때 무리 간의 간격이나 들어와서 빈자리에 앉는 형태로 보아 편이 갈린 게 분명했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이들도 많아 생각을 달리하는 무리가 더 있을 것이라고 사내는 짐작했다.
“벌써 왔는가?”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여전히 창가에 서 있는 사내에게 인사했다. 사내는 밝은 얼굴로 화답했다.
“수만아, 날이 매섭지?
“그렇게 부르는 건 옳지 않아. 아무리 고향 친구래도 수만 동무라 해야지.”
수만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사내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반갑습네다. 나래 용진이야요.”
그는 수만과 맞은편에 앉은 걸 봐서는 뜻을 달리하는 자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동무도 이제 결정해야디. 어느 쪽으로 들어오시갔소?”
이어진 그의 말은 사내를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사내는 신중했다.
“동무들, 자기네 그룹만이 공산주의를 잘 안다고 말하지 마시오. ……내가 보기에는 같소. 이론은 그만 말하고 힘을 합쳐 일본 제국주의와 싸웁시다.”
모두 사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수만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좋아. 그럼 동무는 어느 그룹에 들어가더라도 부르주아 놈들을 말살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오시오.”
수만의 말에 다시 문이 열렸다. 머리에 검을 천을 뒤집어 쓴 사람이 두 명에게 양팔이 잡힌 채 끌려 들어와 무릎을 꿇리었다.
“여기 먼 이국에서조차 동포의 피를 빨아먹는 부르주아 악질 반동분자가 있소. ……처단하시오. ……동무.”
수만은 8연발 안전장치가 없는 토카레프 권총을 사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받아 쥐는 그의 손이 잠시 떨렸다. 묵직한 무게 때문도 사람을 처음 쏴봐서도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동무의 사상 검증이 필요하오.”
수만이 사내를 재촉했다.
“누구야? 수만……동무.”
사내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창밖에 사나운 바람이 불었다. 수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사내는 지독히도 내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총구가 그의 머리를 겨누었다. 사내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손을 내뻗어 검은 천을 낚아챘다.
‘아버지!’
사내의 아비는 안면이 피범벅 되어 눈을 뜨지 못했다. 사내의 이가 떨리기 시작했다. 용진을 필두로 여자를 제외한 나머지 조선인들이 하나둘 일어서서 사내 주위를 에워쌌다. 수만은 권총을 쥔 사내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타닥, 타다닥…….’
사내의 떨리던 이는 급기야 부딪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