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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여행에세이 > 국내여행에세이
· ISBN : 9788970594521
· 쪽수 : 468쪽
책 소개
목차
작가의 글
지리산은?
프롤로그
1부
2부
3부
지리산, 알고 떠나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강물이 주변 풀들을 적시고 붉은 흙길은 강변을 따라 곧게 뻗어 있다. 하늘에는 구름과 태양, 파란색과 잿빛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오묘한 잔치를 벌이고 있다. 우리는 일행들의 뒷모습이 점점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도 게으름을 피웠다. 10여 년 만에 함께하는 시간이 그저 즐거웠다. H와 나는 서로 카메라를 들이대며 애들처럼 장난을 쳤다. 산더미 같은 배낭을 슬쩍 트럭에 두고 내린 K씨를 놀려 대기도 했다. 각자 불혹과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세 사람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초록과 황금색으로 뒤섞인 갈대들이 춤을 추듯 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섬진강은 그 옆에서 조용히 운율을 맞추며 흐르고 있다. 구름 속에 가려진 산봉우리, 끝없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있는 너른 벌판, 그들이 만나는 산자락 한편에 오롯이 자리 잡은 농가들. 고개를 낮춘 자연이 길 위의 여행자에게 자리를 내준다. 조금만 쉬었다 가라고. 잠시라도 긴 숨을 내쉬어 보라고. 나는 바지를 둘둘 말아 무릎까지 올리고 두 팔을 번쩍 치켜 올렸다. 내 가슴에 따뜻한 바람이 인다. 여기는 바로 내 나라다.
"위에는 올라가 봤나?"
"아뇨, 아직. 내일 가려고 합니다."
"아, 그렇구먼. 어느 쪽으로 갈 건가."
"그게, 저…, 종주할 예정입니다."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침묵이 길어졌다.
"내일이라. 며칠간 큰 비가 올 거라는데, 폭풍도 몰아치고. 일행은 있는가? 종주 경험자도 있고?"
"몇 명이 같이 가지만, 글쎄요…, 지리산은 다들 처음일 겁니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큰일이네, 큰일이야. 아주 힘들겠어."
어제부터 하루에 몇 번씩 들여다본 일기예보. 걱정은 됐지만 초보 입장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 턱이 없었다. 함 선생이 J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왜 옆에서 말리지 않고 놔뒀지? 자네는 산을 좀 알지 않는가?"
아, 보통 일이 아닌가 보다. 나는 북한산에 서너 번 갔다 왔다는 얘기를 겨우 꺼냈다. 완전초보는 아니라는 걸 은연중에 알리고 싶었지만 그는 다음 말을 정확하게 내뱉었다.
"초행자가 폭우가 쏟아지는 지리산을 종주하겠다, 바보거나 독종이거나 둘 중의 하나구먼."
해발 1,915미터. 하늘에 닿을 듯 곧추선 봉우리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구름 속에 몸을 맡기고 의연한 능선에 기대고 싶은 곳. 두 발을 떼고 두 팔을 휘저으며 힘껏 날아 보고 싶은 곳. 7인의 원정대는 모두 천왕봉 꼭대기에 우뚝 섰다. 종주 첫날, 쌀 한 포대를 배낭에 넣고 비지땀을 흘리던 초로의 남자도, 북한산 네 번 가보고는 지리산 종주하겠다고 나선 무모한 아줌마도, 17년 전 직장 상사와의 약속을 지키려 무리한 일정을 단행한 의리파 사진가도, 자전거 페달 하나 열심히 밟아 온 힘으로 도전장을 낸 30대 열혈여성도, 그리고 첫 등산이 첫 지리산 종주가 되어 버린 세 청년도 모두 천왕봉 꼭대기에서 바람을 맞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맛본 적이 없는 뜨겁고 진한 감동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토록 넓고 황홀한 것이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하늘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순결했다. 이 앞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욕망을 채우려는 치열함도 없다. 비워진 가슴 속으로 지리산은 더 깊게 들어오고 있다.
여기는 바로,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는 월평마을. 지금은 태양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따뜻하고 평화롭다. 민박집 몇 개가 비슷한 모양새로 들어섰고 골목 끝에서는 개 짓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흐드러진 나무 한 그루가 점잖게 버티고 서 있는 팔각정 쪽으로 향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지친 여행자를 기다렸다는 듯 빈 나무 벤치 하나가 양지와 음지 사이에 적당히 놓여 있다. 아예 신발까지 벗고는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머리 위로는 새파란 하늘이, 발끝에는 나뭇잎의 긴 그림자가 있다. 팔각정은 텅 비어 있고 그 옆의 텃밭에는 푸른 채소들이 가득 찼다. 한적하던 길 한편에 자전거를 탄 할아버지가 나타났고 다른 편에서 오던 젊은 남자가 그에게 인사를 하더니 한참이나 얘기를 주고받는다. 그들이 헤어질 때까지도 우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햇살이 너무 좋아서, 이 편안함이 아까워서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네가 정말 지리산 여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P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도 그랬어."
"등산을 할 거라고는 더더욱 상상도 못했어."
"나도 그랬어."
P가 할 말을 잃은 듯 멀뚱히 내 얼굴을 쳐다본다. 우리는 다시 먼 곳에 시선을 맞춘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저 멀리 낮은 산등성이 몇 개가 희미하게 보인다. 맨 뒤쪽에 살짝 머리를 내민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일까. 그 흐릿한 형태가 지리산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