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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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일본어: 太宰 治, 1909년 6월 19일 ~ 1948년 6월 13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1936년(쇼와 11년)에 첫 작품집 『만년(晩年)』을 간행하였다. 1948년(쇼와 23년)에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山崎富栄)와 함께 다마가와(玉川) 죠스이(上水)에 투신자살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달려라 메로스(원제: 走れメロス)」, 「쓰가루(津軽)」, 「옛날 이야기(お伽草紙)」, 「사양(斜陽)」, 「인간실격」이 있으며, 사카구치 안고・오다 사쿠노스케(織田作之助)・이시카와 준(石川淳) 등과 함께 신희작파(新戱作派)・무뢰파(無賴派) 등으로 불린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일본어: 津島修治)인데, 필명을 쓴 까닭은 쓰가루 지방(아오모리현 서부) 출신인 스스로가 본명을 읽으면 쓰가루 방언의 영향으로 지시마(チシマ)로 들리지만 이 필명은 방언투로 읽어도 발음이 그대로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
아버지는 공무로 늘 바빴고 어머니는 병약했으므로, 다자이 자신은 유모 등의 손에서 자랐다.
1916년(다이쇼 5년)에 가나키제일심상소학교(金木第一尋常小學校)에 입학하였다. 4년만인 1922년(다이쇼 11년) 4월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력 보충을 위해 현지 4개 마을에서 조합으로 세운 메이지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에 다시 1년간 통학하였으며, 1923년(다이쇼 12년)에는 아오모리 현립 아오모리중학교(靑森中學校)[2]에 입학하는데, 입학 직전인 3월에 다자이의 아버지가 도쿄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어를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프랑스 문학을 동경해 4월에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불문학과에 입학하지만, 높은 수준의 강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데다 친가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마음껏 방탕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에 대한 자기 혐오, 내지 다자이 자신의 처한 위치와 더불어 마르크시즘에 심취해 갔고, 당시 치안유지법에서 단속하고 있던 공산주의 활동에 몰두하느라(다만 공산주의 사상 자체에 진심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의조차 대부분 출석하지 않았다. 또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 5월부터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제자로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본명인 쓰시마 슈지가 아닌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대학은 거듭된 유급에 수업료 미납으로 제적된다.[5] 재학 중에 만나 동거하던 술집의 여급으로 유부녀였던 18세의 다나베 시메코(田部シメ子)와 1930년 월에 가마쿠라의 고시고에(腰越) 바다에서 동반 투신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시메코만 죽고 다자이는 혼자 살아남았다. 이 일로 다자이는 자살방조 혐의로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형 분지(文治) 등의 탄원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6]
「인간실격(人間失格)」, 「앵두(櫻桃)」를 마무리한 직후 1948년 6월 13일, 타마가와(玉川) 죠스이(上水)에서 애인 야마자키 토미에(山崎富栄)와 동반자살하였다.[14]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이 사건은 발표 직후부터 온갖 억측을 낳았는데, 도미에에 의한 억지 정사설, 희극 심중 실패설 등이다. 다자이가 생전에 아사히 신문에 연재 중이던 유머 소설 「굿 바이」도 미완의 유작으로 남았는데, 공교롭게도 13화에서 작가의 죽음으로 절필되었다는 데에서 기독교의 징크스를 암시하는 다자이의 마지막 멋부림이었다는 설도 있고, 그의 유서에는 '소설을 쓰는 것이 싫어졌다' 등의 취지가 적혀 있었는데, 자신의 컨디션 저조나 다운증후군을 앓는 저능아였던 외아들의 처지에 대한 비관도 자살의 한 원인이 되었을 거라는 설도 있다. 기성 문단에 대한 '선전포고'로까지 불리던 다자이의 연재 평론 「여시아문(如是我聞)」의 마지막회는 다자이 사후에 게재되었다. 유해는 스기나미 구 호리노우치에서 화장되었다. 계명(戒名)은 문채원대유치통거사(文綵院大猷治通居士)였다.
다자이의 사체가 발견된 6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이었는데, 죽기 직전에 쓴 단편 「앵두」와도 관련해, 생전에 다자이와는 동향으로 교류가 있던 곤 간이치(今官一)에 의해 '앵두 기일'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날은 다자이 문학의 팬들이 그의 무덤이 있는 도쿄도 미타카시의 젠린사(禪林寺)를 찾는 날이기도 하다. 또한 다자이가 태어난 아오모리 현 카나기마치에서도 '앵두 기일'에 맞춰 다자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는데, 다자이의 탄생지에서 다자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옳다는 유족의 요망도 있어 다자이 오사무 탄생 90주년이 되는 1999년부터는 「다자이 오사무 탄생제」로 이름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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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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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연세대 교수,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시드니대 교환 교수를 지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교수로 오 년간 한국학을 강의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한 문인이자, 한일 비교문화 연구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현대시인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모더니즘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국민훈장 모란장, 국가공로자 서훈을 받았다. 저서로 『한일 문화의 비교』, 『한국시가연구』 등 다수, 역서로 다자이 오사무의 『달려라 메로스』, 『여학생』 등이 있다.
『단테처럼 여행하기』는 ‘한국의 대문호大文豪’ 전규태의 산문집으로, 삼 개월 시한부 인생의 췌장암 선고를 받고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죽음을 극복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암을 선고받은 그에게 남은 인생은 고작 삼 개월이었다. 의사는 차라리 좋아하는 여행을 하며 객사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조언했다. 열두 살에 어머니를 찾아 만주 다롄으로 떠난 것이 그의 첫 여행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인생의 끝에서 떠나는 마지막 여행일 터였다. 어쩌면 죽음 이후의 긴 여행에 앞선 짧은 여행일지도 몰랐다. 파리, 베를린, 본, 뮌헨,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프라하, 부다페스트…… 화구 하나 들쳐 메고 전 세계를 종횡무진한 그의 여행길은 삼 개월을 넘어 어느덧 십여 년간 계속되었다. 그 풍요로운 고독 속에서 그는 생명이 어떻게 죽음을 이기는지, 마음이 어떻게 몸을 지배하는지 체험한다.
반짝이는 문학적 감수성과 삶의 깊은 부분까지 꿰뚫는 그의 통찰은 여행의 숨결이 가득한 잠언적 아포리즘을 남겼다. 죽음 앞에서 그 누구보다 더욱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사랑, 사람, 그리고 삶이 어떤 결정結晶을 남겼는지, 그의 발길을 따라가며 아름다운 삶의 편린들을 헤아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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