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자연에세이
· ISBN : 9788970907482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09-10-28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추억하고 싶은 시절 선물하기
파트 1 얘들아, 강변 살자
밭 가운데 있는 집
새로운 이웃들
꿈에 그리던 텃밭
느티나무에 그네를 매다
직박구리의 집
항아리 속의 물고기들은 어디로 갔을까?
햇살 좋은 날, 딸기밭에 온 손님
두꺼비의 방문
열렬한 자연교 신자가 되다!
단풍나무를 좋아하는 이유
파트 2 아이들의 세상과 어른의 세상
흙은 행복한 기억을 할거야
개미 날려 보내기 놀이
깡충거미와 달리기하기
붉고 푸른 꽃물 편지
생각하는 의자
파란 시간
밤새우기 놀이를 하고 싶어
시래기를 걸고, 모이대를 만들고, 새집을 달고
책 읽기 말고는 할 게 없어!
겨울에 찾아온 사자
신나는 외출
달래 서리
강바닥 명개흙 머드팩
파트 3 살아가며 배우는 것들
봄의 전령
개구리 표정은 늘 스마일
검정 암탉과 흰 수탉과 병아리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건 고양이의 앞발
꽃밭 주인 밀짚모자 아저씨
지를 만드는 철
풋자두 한 양동이
하늘로 소풍 간 암탉!
엄마가 된 초롱이
양귀비 잎에 쌈 싸 먹다
파트 4 마음 만들기
딸과 함께 걷는 길
딸기 한 바구니에 10만 원?
봉숭아꽃 물들이기
박각시가 온다네
박나물을 기억해
아이들의 씨앗 농사
개울이 가져다준 선물
가을의 첫맛
가장 큰 걱정
산비둘기 구출작전
모닥불을 피우는 시간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
얼음썰매는 어른도 좋아해
한겨울의 동거자
새 달이 온다
에필로그 구름빵을 먹는 시간
책속에서
생각하는 의자
문호리에 이사를 온 그해 이따금 우리 가족은 저녁나절이면 드라이브를 다녔다. 그날도 명달리로 가는 중이었다. 명달리, 그중에서도 폐교가 있는 계곡은 우리 가족의 놀이터였다. 뽕나무가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어 오디를 마음껏 따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학교 안에는 아름드리 잣나무가 수십 그루 있었다. 잣나무 아래로 가면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이 좋았고, 가을에는 청설모가 갖고 가다 떨어뜨린 잣송이를 주울 수 있었다. 눈이 밝은 작은아이는 종종 커다란 잣송이를 주워 왔다.
명달리 가는 길은 큰 산이 막아선다. 구름이 걸려 있는 구불구불한 고개를 지나 계곡을 끼고 내려가면 판판한 평지가 펼쳐진다. 명달리에 가면 나는 꼭 삼국유사에 나오는 길달이 생각났다. 길달은 밤에 짐승과 내통하는 인물이다. 명달리는 그만큼 산도 높고 골도 깊어 왠지 비밀스런 곳이다.
그날 우리 가족은 명달리 폐교에서 해 질 때까지 놀았다. 집에 가기 위해 계곡을 따라 도는 커브 길을 지날 때 눈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칡넝쿨에 싸인 의자가 하나 길섶에 버려져 있었다.
“저 의자 갖고 가자.”
남편은 꽤나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차를 길옆에 세웠다. 의자는 버려진 지 오래된 듯했다.
“눈도 밝다. 이게 의자인 걸 어떻게 알아봤어? 이거 그냥 여기 두자.”
“갖고 가면 쓸모 있을 거 같아.”
“집에 의자가 없어?”
“싫어요. 갖고 갈래요.”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신경전을 지켜보다 엄마인 나를 열렬히 응원했다. 무엇인가 신기한 물건이 생긴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게다가 그것은 책에서 본 숲 속의 의자였다. 달 밝은 밤에 왠지 동물들이 와서 앉았다 간 것 같은.
질긴 칡넝쿨과 가시 돋친 며느리밑씻개를 걷어내자 팔걸이가 있는 커다란 갈색 의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의자는 나무의자 이야기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운명을 맞게 되었다. 숲 속에 버려진 의자는 트렁크에 실려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의자의 이야기는 사실상 이제부터 시작된다. 이틀 동안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반쯤 벗겨진 페인트를 완전히 벗겨내자 의자는 그럴듯해졌다. 의자를 만든 나무는 속살이 뽀얀 나무였다. 칠이 벗겨진 의자는 바랜 복숭아빛이었다.
“야, 멋진 의자다. 이 의자 어디에 두지?”
“밖에다가 둬.”
남편은 여전히 낡은 의자를 집에다 두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서로 그 의자에 먼저 앉으려고 했다.
“우리 이 의자에서 뭘 할까?”
“난 그 의자에 앉아서 생각할 거예요. 저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예요.”
“나는 저 의자에서 생각도 하고 밥도 먹고 놀 거야.”
큰아이는 씩 웃으면서 의젓하게 대답했다. 지기 싫어하는 작은아이는 의자의 용도를 언니보다 더 골똘히 생각했다. 언제 어느 집에서 있었는지 모를, 서부 영화에 나올 법한 의자는 갈색 페인트를 벗겨낸 것만큼이나 엄청난 변신을 했다.
의자는 서쪽으로 창이 나 있는 거실 앞에 놓였다. 강을 보고 강 너머의 산을 보고 그 위의 하늘과 구름을 보기에 좋은 자리였다. 의자는 큰아이의 말대로 우리 가족 모두의 생각하는 의자가 되었다.
아이들은 장난을 치며 놀다가도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생각하는 의자에 앉을 때는 자못 진지했다. 늘 아빠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서 큰아이는 잠깐씩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심각하게 생각하는 척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진짜 심각하게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그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맛있게 한 대 피웠고, 나는 쉴 때마다 나가 그 의자에 멍하니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았다. 큰아이는 매일 책을 들고 나가서 그 의자에 앉아서 읽었고, 언니가 없는 틈을 타서 작은아이는 다람쥐처럼 의자에 매달려 놀기를 좋아했다.
큰아이는 파란 시간이 오면 어김없이 책을 가지고 생각하는 의자로 갔다. 글을 모르는 작은아이도 그림책을 들고 의자로 갔다. 아주 가끔 두 아이들은 땅거미가 깔리는 파란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의자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기도 했다. 팔걸이가 있는 버려진 의자는 책을 읽기 더없이 좋은 의자였고, 이름 그대로 생각을 채워 넣는 의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