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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73817887
· 쪽수 : 248쪽
책 소개
목차
1. 인형의 발
2. 5월
3. 조용한 호흡
4. 가을바람
5. 회색 그림자
6. 인생이란
7. 과거의 목소리, 미래의 목소리
8. 엷은 핑크빛 기억
9. 인연의 사슬
10. 푸른 그림자
11. 3월
12. 석양
13. 새로운 백년
저자 후기│츠지 히토나리
역자 후기│양억관
리뷰
책속에서
인간이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 망각에는 특별한 노력 따위는 필요도 없는 것이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일들 따윈, 거의 모두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잊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게 보통이다. 어느 때 문득,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걸 또 머릿속에 새겨두지 않으니, 기억이란 덧없는 아지랑이의 날개처럼 햇살 아래 녹아내려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으려 하면 할수록 아오이는 기억 속에서, 이를테면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 지각하지 않으려고 마구 달릴 때, 심할 경우는 메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망령처럼 불쑥 모습을 드러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꿈속에서 내 품에 안겨 잠든 사람은 아오이였다. 낮에는 말짱한 정신으로 살아가다가, 밤만 되면 무서운 꿈을 꾸고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나 어린애처럼 가슴에 안겨온다. 왜 그러니, 하고 묻자, 무서운 꿈을 꿨어, 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하고 말했다. 다들 죽어가, 아는 사람이 갑자기 변했어, 나를 모른대, 쥰세이가 죽었어, 다른 사람이 내게 전해줬어. 그녀는 꿈을 떠올리며 울고 있었다. 결의에 가득 찬 낮의 표정과는 정반대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오이는 지금도 그런 무서운 꿈을 꾸고 누군가 곁에 있는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일까. 그녀를 안는 사람이 부러웠다. 한밤중에 그녀에게 넉넉한 가슴을 빌려줄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행복한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 내 가슴에 달라붙는 메미의 촉감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의 달콤한 몸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지금 여기가 밀라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미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안아주었다. 쥰세이, 하고 메미는 잠꼬대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올라가보고 싶어, 저 위로.” 갑자기 메미가 그렇게 말했다. 내 귀 저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가는 것 같았다. “올라가도 될까?” “당연하지. 피렌체의 두오모도 위로 올라갈 수 있잖아.” 나는, 응,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아오이와의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때로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실수라도 되듯이 기억 속에 밀폐시켜두고 싶었던 오랜 약속. 그때 우리 둘은 먼 옛날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이 밀라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는데, 그날 아오이는 드물게도 열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다, 엉뚱한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농담 반으로, 또는 이야기의 흐름에 그냥 몸을 맡겨버린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