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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74355951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22-03-21
책 소개
목차
초대교회에서 주기도문은 어떻게 쓰였나
1. 우리
2. 아버지여
3. 하늘에 계신
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5. 나라가 임하시오며
6.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7.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8.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9.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10.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11.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12. 아멘
묵상과 토론을 위한 질문
책속에서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 시점에 내가 혼자 있기는 하지만, 나는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속한 더 큰 공동체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해 ‘우리’라고 말할 때 이는 내가 다니는 신학교 공동체를 포괄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그 시간에 학우들도 다른 곳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주 자연스레,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 나는 학우들, 선생님, 학교 운동장 관리인, 학장님의 비서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두가 다 “우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시간에 나와 더불어 기도하고 있는 “우리”의 범위가 점점 커졌다. “우리”에는 내가 주일마다 출석하는 교회도 포함되었다. 그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교회도 “우리”에 포함되었다. 그 교회들뿐만 아니라 나처럼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수많은 사람으로 이뤄진 먼 나라의 다른 많은 교회도 있었다. 알지도 못하고 생각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다 공동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말할 때 나는 지금 복음에 충실하게 살려 애쓰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간 수많은 신자와 더불어 기도하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내가 다니는 신학교 공동체, 그리고 나와 동시대를 사는 전 세계 신자들뿐만 아니라 지난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한 수많은 세대 사람들과도 함께 어우러져 기도하는 것 아닌가? 나와 함께 기도하는 “우리”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어머니 모니카, 성 바실리우스와 그의 누이 마크리나도 포함되고, 내가 전혀 모르지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무수한 형제자매도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 설령 몸으로는 혼자여도 우리는 혼자 기도하는 게 아니다. 높은 뾰족탑이 있는 교회당에서 기도하든 초가지붕의 작은 예배당에서 기도하든, 혼자 기도하든 여러 사람 속에서 기도하든, 서로 다른 수백 가지 언어로, 그리스도의 몸인 이 거대한 “우리”는 한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 “우리 아버지”라고. _ 1장
신자의 보편적 제사장직은 각 신자가 자신의 제사장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니라, 각 신자가 다른 모든 신자를 위한 제사장이라는 뜻이며, 모든 신자가 함께 온 세상을 위한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온 세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세상까지 포괄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보편적 제사장론은 우리 각 사람이 개별적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게 만드는 게 아니라 공동의 섬김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런 섬김으로 우리는 이제 개별적 제사장으로서가 아니라 제사장 같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다가간다. 우리의 제사장직은 다른 누구도 필요 없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개인 전용 통로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서로를 의지하고 각 사람이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한 제사장이 되는 일종의 관계망(network)이다. _ 2장
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은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육신의 아버지들이 권위주의적 태도를 채택할 수 있다는 것도 한 가지 한계인데, 이들은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면서 그런 태도를 합리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은유를 오용하는 것이다. 믿음과 경건 영역에서 은유를 활용할 때는 늘 위험이 따른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말한다. 이는 중요한 이미지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의 권능과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승리하시리라는 약속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땅의 왕들이 경건한 농사꾼에 비해 자신이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았다는 의미로, 혹은 더 많은 자유를 제공하는 민주주의 체제보다 절대주의 체제가 더 좋다는 의미로 위의 비유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이미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또한 이는 인격체로서의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머니보다 육신의 아버지와 더 비슷하다는 의미로, 또는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 권세를 가지시듯 육신의 아버지도 가족에게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 이미지를 받아들인다면, 이 역시 잘못일 것이다. _ 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