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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종교에세이 > 불교
· ISBN : 9788974793494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17-07-10
책 소개
목차
여는 글 리뉴얼, 낯설지 않은 새로움
1 인생, 꿈인 줄 알면서도 몸부림쳐 보는 것
밥뜸이 잘 들기를 기다리는 마음 | 방외지사의 멋 | 짚신스님 | 소크라테스의 아내 | 봄과 겨울, 열매와 씨앗 | 눈 내리는 아침 차 끓이는 소리 | 혜월 선사의 셈법 | 부처님은 왜 죽은 아이를 살리지 않았을까 | 인생, 꿈인 줄 알면서 몸부림쳐보는 것 | 우리는 정말 ‘함께’ 잘 살고 있는가 | 단옷날 부채 단상 | 비우고 비우니 꽃이 피다 | 기억과 기록 | 도시 유목민 | 자동차 안에서 미륵을 만나니 | 사람을 아끼고 가꾸고 키우는 일 |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 구법여행과 관광 유람
2 잘못 놓인 그릇엔 물이 고이지 않는다
앞만 보는 담판한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 허리 층의 고뇌 | 행자에게 | 삼보일배 | 새벽형 인간 | 광고지 한 장 받아주는 일 | 그릇에 따라 고이는 비의 양이 다르니 | 머묾과 떠남 | 출가인가 가출인가 | 등불을 들고 종로 거리를 차지하다 | 바람이 흔들리는가 깃발이 흔들리는가 | 가야 할 길만 가라 | 삼 때문에 금을 포기하는 어리석음 | 새해 수첩 | 세상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은가 | 내면의 뜰
3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전하다
스님의 여름휴가 | 마애불의 천 년 침묵 | 삼천배와 백팔배 | 파스칼의 갈대 화왕산의 억새 | 문지방 법문 |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 | 바늘 한 개 용납하지 않겠다 | 남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에서 비가 내리네 | 성철 스님의 가르침 | 몽중 가피 | 해인사 극락전에 앉아 | 바르게 듣고 바르게 보는 법 |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 | 호떡과 호빵 사이에서 | 대나무를 쳐서 크게 깨닫다
4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
얼굴 가난만큼 서러운 게 없다 | 새벽 서울거리를 걷다 | 강남 귤 강북 탱자 | 열반송 | 나무, 뒷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다 | 고샅길에서 마주친 능소화 | 생일,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날 | 한 그릇의 밥 | 위기가 닥치면 경전을 외워라 | 나의 혀는 절대 타지 않으리 | 부처님이 남긴 이십 년의 그늘 | 두 줄기 눈물 | 길은 없다, 절박하고 간절하게 | 죽은 사람의 뼈를 표지판으로 삼다 | 다비장의 불길 | 언제나 흐르는 강물처럼
추천의 글
원택 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이선민(〈조선일보〉 선임기자) | 김선우(시인) | 조현(〈한겨레신문〉 기자)
후기를 대신하여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맛있는 밥은 ‘잘살이’다. 하지만 그 밥맛의 완성을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의 여유는 ‘참살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당장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길 바라는 인스턴트 시대에, 이 식당은 기다려야 함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수행 현장이다. 그 이후 마지막 뜸 들이는 과정의 시간까지도 덤으로 고명처럼 얹어준다. 기다림 후에 나온 따뜻한 밥 한 그릇을 통하여 ‘잘살이’에서 ‘참살이’로 나아가는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비한다면, 수업료 몇 천 원과 인내의 시간 몇 십 분은 결코 비싸거나 긴 것이 아니다.
번뇌란 근본적으로 뜨겁다. 출세나 명예 그리고 부를 향해 치달리는 세간에서는 늘 마음이 들끓기 마련이다. 그 뜨거운 번뇌를 한 잔의 뜨거운 차로 잠시 식힐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차를 제대로 마시고자 하는 이는 좋은 물과 차를 얻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그것도 또 하나의 번뇌이긴 하지만, 이를테면 번뇌로 번뇌를 제거한다고나 할까. 덧붙여 차의 나뭇가지가 가늘고 작다고 할지라도 열매가 맺힌다는 의미인 ‘명가유실리茗柯有實理’는 설사 외형이 허술할지라도 그 내면은 충실해야만 하는 이즈음 세태에 가장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명언으로 제격이다.
종교는 중생의 잘못된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기여해서는 안 된다. 중생에게 욕망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게 함으로써 그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중생의 욕망에 영합하여 종교까지 물질적 이익의 충족을 위한 도구가 되게 한다면, 이는 스스로 종교의 고유 영역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빚게 된다.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아들을 살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현상계의 실상을 제대로 보게 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안목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