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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75551970
· 쪽수 : 484쪽
· 출판일 : 2020-11-30
책 소개
목차
1)역사
사랑의 동산 애양원 … 014
세동시장의 덕양곱창 … 020
가무내 현천과 소동패놀이 … 024
황금망태기에 풍년을 담는 관기들 … 029
나라와 운명을 함께하는 사찰 흥국사 … 033
공은의 절개를 간직한 삼일동 … 037
신명나는 가장 굿판 신추농악 … 041
문꾸지와 창무 … 046
곡화목장과 돌고개 화동 … 050
태평성대를 기리던 무선지구 … 055
석창과 그 주변의 성터 … 059
여수인의 충과 효를 담은 고음천과 송현 … 063
사라진 마을 신월리 … 067
우두리와 달밭기미 … 071
무슬목과 달암산성 … 075
송고마을 당제 … 079
녹문에 거센 파도 … 083
귤은 김류와 죽림야우 … 087
홍국어화 … 092
2)섬
파도가 섬을 넘는 넘자섬, 여자도 … 098
묘도와 이순신대교 … 103
포근한 갯가 감도와 이천 해안 … 107
백야곶과 힛도 … 112
한반도의 정수가 모아진 하얀 보석 섬 백야도 … 117
막걸리와 참전복이 유명한 개도 … 123
말을 잘해서 부자로 산다는 섬, 제도 … 127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을 간직한 섬 월호도 … 131
꽃섬 화도 … 135
공룡나라 사도 … 143
이리를 닮은 섬 낭도 … 149
삐툴이 섬 조발도 … 155
황금을 쌓아 두었다는 적금도 … 160
개펄의 작은 연못, 둔병도 … 167
빗깐이 섬 횡간도 … 175
십장생이 사는 낙원 금오도 … 181
금오도의 매봉산 … 185
비렁길 … 191
기러기를 닮은 섬 안도 … 197
보물섬 소리도 … 201
거커리 섬 소거문도 … 206
손죽도 지지미 언덕의 화전놀이 … 210
물 반 고기 반, 풍요의 손죽도 바다 … 215
정감록이 예언한 비처, 너푸리 광도 … 220
바람의 섬, 평도 … 224
풀섬, 초도 … 228
초도 뱃노래 … 232
남해의 진주 거문도 … 236
거문도의 인어 신지께 … 241
기와집 몰랑과 신선바위 … 245
거문도 등대 … 249
천상의 섬 백도 … 253
3)해안
조화리 포구 … 260
낙조가 아름다운 두렝이 해변 … 265
해넘이 길이 있는 복촌해변 … 270
삶의 여유로움이 있는 달천포구 … 274
여수만과 신덕해변 … 278
남해의 문 용문포와 고진 … 283
비단결 바다 나진포구 … 289
신화가 있는 이상향 이목포구 … 294
동동과 소호동 … 299
검은모래의 만성리 해수욕장 … 303
방죽이 막아버린 큰 개 죽포 … 308
여수 굴의 주산지 금천 … 312
비단으로 수놓은 바다, 작금 … 316
이야포 이야기 … 320
이대원이 지킨 바다 손죽열도 … 325
4)산
여수지맥의 시작 앵무산 … 330
비단을 두른 청대산 국사봉 … 336
어머니의 산 수암산 … 340
여수의 진산 진례산과 영취산 … 344
남해안 전망대 봉화산 … 348
망마산과 예울마루 … 352
호랑산과 둔덕재 … 356
고락산과 미평 … 360
전라좌수영성과 종고산 … 364
봉황귀소의 터 구봉산 … 369
둔전마을 지나 본산에 올라 추억에 젖다 … 371
5)풍경
대섬의 맑은 바람(죽도청풍) … 378
고소대 위에 걸린 달(고소제월) … 382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저녁종소리(한산모종) … 386
종포 어부들의 노래소리(종포어가) … 390
이바구산에서 들려오는 풀피리 소리(예암초적) … 394
봉강 언덕에서 보는 맑은 안개 피어오르는 풍경(봉강청람) … 398
마래산 자락에 비치는 아침햇살(마수조욱) … 402
먼개(경도)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원포귀범) … 406
여수미항 전망대 돌산공원 … 410
평사낙안 … 414
희망을 꿈꾸는 은둔비처 은적암 … 418
신비한 문 향일암 … 421
6)오늘의 여수
율촌 가장리 들 … 426
황금 물빛의 소뎅이 … 431
십리방천과 대포들 … 436
극락정토 큰 골짜기 갬실 … 441
야경이 아름다운 여수산단 … 446
오만이와 모사금 오천 … 450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군내리 … 455
여수 밤바다 … 459
봉황귀소의 땅 여수 … 466
여수의 맛 … 472
여수의 멋 … 477
여수 사람들 … 481
저자소개
책속에서
1)역사
*가무내 현천의 소동패놀이
쌍둥이 마을로도 유명한 여수시 소라면의 현천마을은 우리의 고유한 민속이 여러 가지 전승되고 있는 농촌마을이다.(중략)
소동패놀이란 16세에서 19세 사이의 (지금의 청소년들을 일컫는) 소동들의 패거리 놀이란 의미로 최근의 비보이들이 겨루는 댄싱 배틀과 비슷한 형태의 마을간 청소년들의 풍물과 놀이에다 힘과 지혜, 용기 등을 겨루어보는 종합연희 같은 민속놀이다.(중략)
현천소동패놀이에는 근대이전 농촌사회 소동들이 겪었던 다양한 심리와 의식들이 녹아있는 놀이로 여수지역의 농촌문화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신명나는 굿판이다.(중략)
여수지역에는 다양한 농악놀이가 전해오면서 그 전통을 이어가려는 사람이 많다. 전통음악분야에 활동하는 사람 중에 여수출신 유명 타악기 연주자가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중략)
(본문중에서)
풍성한 추석이다.
추석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만의 고유명절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사람들은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생활환경에서 신께 감사드리며 자연을 숭배하고 조상에 성묘하며 자손의 복을 빌었다.
쌍둥이 마을로도 유명한 여수시 소라면의 현천마을은 우리의 고유한 민속이 여러 가지 전승되고 있는 농촌마을이다. 이곳에서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제 제7호인 ‘현천소동패놀이’를 비롯하여 ‘가장농악’과 ‘마당밟기’, ‘조리박주벅놀이’라는 신행맞이 놀이 등이 전승되다가 지금은 소동패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소동패 놀이란 16세에서 19세 사이의 (지금의 청소년들을 일컫는) 소동들의 패거리 놀이란 의미로 최근의 비보이들이 겨루는 댄싱 배틀과 비슷한 형태의 마을간 청소년들의 풍물과 놀이에다 힘과 지혜, 용기 등을 겨루어보는 종합연희와 같은 민속놀이다.
소동패는 농작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두레패의 조직이다. 20세 이상의 대동패는 어른들로 구성된데 비해 20세 이하의 소동들이 중심이 되어서 소동패라 부른다. 이들은 조직의 규약을 철저히 지키며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풀베기·김매기 등 공동 노동을 하였다. 소동패 놀이는 일의 능률을 올리고 노동의 고달픔과 지루함을 잊기 위하여 농악·노래·춤·놀이 등을 생활화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소동패놀이는 네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마당은 소고수가 ‘모임소고’를 울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소동들이 인원 점검과 그날 작업지시를 받고 길소고를 치면서 들로 나간다.
둘째 마당은 들로 나간 소동패가 두렁에 영기令旗를 꽂고 김을 매는데, 초벌 논매기, 두벌 논매기, 세벌 논매기를 하는데 논매기마다 노래가 다르다.
셋째 마당은 이웃 마을 소동패로부터(소동패끼리 붙어 보자는) 시비 전갈이 오면 두 마을 소동패가 기세를 올려 영문을 잡는다. 이웃마을 소동패가 “녹포 은갑은 상사로 조련하고 기치창검은 일월을 희롱하고 영은 군중지영이요, 문은 장군지문이라. 이 문을 치워주시면 우리 소동 공좌승 뫼시고 돌아가겠습니다”라는 영문營門 전갈을 받는다. 그러면 현천 소동패는 길을 열어주지 않고, 한량閑良(노래와 춤추기)으로 겨룰 것인가, 힘(力: 씨름·패싸움·달리기·허리잡기·밀치기 등)으로 겨룰 것인가를 결정하여 두 패가 서로 겨루고 나서 패자가 승자 편에 정중하게 ‘가전 전갈’을 올린다.
넷째 마당은 전갈 의식이 끝나면 양편 소동패가 하나가 되어 풍물을 치면서 어울림굿(유산굿·소고놀이·자진유산굿·구정놀이 등)을 하는 것으로, 다양한 민속놀이가 펼쳐진다.
근대식 교육 이후 풍물이 등장하는 놀이들은 농악이라 하여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음악의 형태로만 알려지고 있다. 정월대보름날에는 매구를 치는데 매구란 말은 귀신을 땅에 묻어버린다는 뜻이다. 마을 곳곳에 있는 귀신을 몰고 와서 마당놀이를 하면서 한 해 동안 나쁜 짓을 못하도록 땅에 묻거나 멀리 쫓아버리는 형태의 대형 극을 펼치는 것이 대보름 굿이다.
이처럼 농악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놀이는 대부분이 행사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가는 연극으로 진행이 된다. 이를 일제식 근대교육이 시작되면서 연극적인 요소는 제외하고 소리만 가르치다 보니 간단한 굿판의 의미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현천소동패놀이에는 근대이전 농촌사회 소동들이 겪었던 다양한 심리와 의식들이 녹아있는 놀이로 여수지역의 농촌문화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신명나는 굿판이다. 그러나 이제 소동들이 엮어나가야 할 굿판은 이미 70이 넘어버린 노동들의 굿판이 되어 본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질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여수지역에는 다양한 농악놀이가 전해오면서 그 전통을 이어가려는 사람이 많다. 전통음악분야에 활동하는 사람 중에 여수출신 유명타악기 연주자가 많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상의 숨결이 면면히 전해지는 여수지역의 민속은 제대로 전승하기 위해서는, 전수자뿐 아니라 바라보는 지역민의 애정 어린 시선과 함께 놀이 하나 하나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알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보게 되면 그만큼 신명날 굿판이 또 없을 것이니 말이다!’
*나라와 운명을 함께하는 사찰 흥국사
(본문중에서)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 보조국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인조(1624) 때 계특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온다.
보조국사는 국가가 바로 되고 승가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을 염원하였는데, 흥국사도 이러한 보조국사의 사상과 신앙에 의해서 창설된 사찰로 임진왜란 시에는 의승군 400여 명이 활약하여 호국 불교의 성지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절 안에는 보물 제396호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강희 4년명 동종(보물 제1556호)등 9개의 보물과 원통전(전남유형문화재 제45호), 팔상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8호), 삼장보살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9호)가 있고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는 8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있어 볼거리가 쏠쏠하다.
나라와 사찰이 공동운명체라는 흥국의 사상은 비보사찰로서 종교의 법력으로만 기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병역의 의무와 상관없이 해전에 참가했던 비정규적 수군 병력은 토병土兵과 포작鮑作, 노예 등 다양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인 것이 흥국사 등의 승려들로 구성된 의승수군이었다. 나라의 안정과 융성을 기원했던 기도처로서, 불법보다 호국을 우선으로 창건된 흥국사의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의승수군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전라좌수영이 폐영되면서 해체될 때까지 호국 승병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곡화목장과 돌고개 화동
(본문중에서)
곡화목장은 조선중기까지도 백야곶목장이라 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 임진년 2월19일 일기에는 백야곶목장을 지나간 기록이 있다.
임진년 2월 19일(庚戌) 맑다. 순찰하러 떠나 백야곶(여천군 화양면 화동리)의 감독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렸다. 기생도 왔다. 비가 온 뒤라 산의 꽃이 활짝 피어 경치가 멋져 형언키 어렵다. 저물어서야 이목구미(여천군 화양면 이목리)에 이르러 배를 타고 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에 이르니 영주(고흥)현감(배흥립)과 여도 권관(황옥천)이 마중했다. 방비를 검열하는데 흥양현감은 내일 제사가 있다고 먼저 갔다.
지금의 화양 지역의 지형과 일기를 대조해 볼 때, 이순신은 백야곶 목장의 감목관이 있던 지금의 화동마을을 지나기 위해서는 화양면 나진리에 속한 동쪽 포구 굴구지에 내렸을 것이다. 이후 백야곶목장이 있던 화동지역을 지나 지금의 이영산이나 서촌의 서이산에서 머물다가 저물녘에 이목구미에서 배를 타고 여도 만호진으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많은 『난중일기』 번역가들이 이 부분 백야곶목장을 백야도가 있는 힛도 지역으로 번역하였다. 필자는 최근 『난중일기』 연구자들에게 이 부분을 제보하였다.)
*사라진 마을 신월리
(본문중에서)
신월리는 봉양, 물구미, 신근정 등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40년 당시 마을규모는 239호에 인구는 1,339명이었다. 여수에서도 동정과 서정 그리고 봉산리 다음가는 큰 마을이었다. 마을 앞으로 잔잔한 바다를 끼고 뒤에는 청산이 감싸고 있으며, 주위는 바둑판같은 옥토에 둘러싸여 주민들은 반농반어로 유족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옛날에는 봉산동 국동 사람들이 신월리 덕에 먹고 산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신근정 물구미 봉양사람들은 국개 마을과 사이에 있는 샘이 있던 해변으로 이주를 하여 샘기미 마을을 만들고 일부는 돌산의 우두리로 이주를 했다. 이 비행장공사는 일본토목회사들이 맡았는데 인부는 이 고장을 비롯하여 전남동부지역민이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끌려와 2개월씩 교대로 일을 해, 1945년 해방이 될 무렵 90%에 이른 공정에서 끝을 맺었다.
(중략)
비행장의 건설로 만들어진 부대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사용하다가 정부에 이양되자, 1948년 5월 4일 버려진 부대 부지가 있던 신월리는 다시 군용지로 편입되어 1개 대대 병력의 부대를 창설하였다. 14연대라는 국방경비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후 이영순 소령, 김익렬 중령, 오동기 소령을 거쳐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의 비극이 된 여순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950년 7월 25일 군대가 완전철수하고 한때 텅텅 비어있던 이곳은 1952년 12월 31일 제15육군병원이 설치되어 전방에서 내려온 부상자들을 수용했다가 1953년 7월 27일 철수되었다.
육군병원 시설철수로 상당 기간 공백상태에 있던 이곳은 1962년 6월 26일 뜻밖에도 보사부 결핵환자 자활촌으로 지정돼 전국결핵환자의 총 본산이 되었다. 환자들이 시내 음식점이나 목욕탕 등으로 함부로 출입하는 바람에 말썽이 되다, 1976년 2월 20일 보사부에서 생활보조금을 지급하여 많은 사람들이 율촌으로 이주하였다. 1976년 7월 23일 한국화약 제2공장이 들어서 가동 중인 것이 오늘날의 신월리이다.
2)섬
*여자도
(본문중에서)
여자도의 본래의 이름은 ‘넘자섬’이다. 섬의 높이가 낮아 파도가 섬을 넘는다는 의미로 ‘넘자’라 하였다. 그리고 ‘넘자’란 말의 뜻을 한자로 바꾸면서 ‘넘’은 남이란 뜻을 가진 여汝로 해석하고 ‘자’는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여 자自로 하여 ‘여자도’가 되었다. 여자도 곁에 있는 송여자도는 작은 여자도란 뜻으로 본래 이름은 ‘솔넘자’였다. 여기서 ‘솔’자는 작다는 의미인데, 한자로 송여자도松汝自島라고 표기하고 있어 소나무가 많은 섬으로 오인하기 쉽다. 차라리 소여자도小汝自島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묘도와 이순신대교
(본문중에서)
세계박람회의 여수개최와 함께 묘도는 또 다른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여수산단과 광양산단의 사이에 위치하여 어업을 생활로 하던 삶터를 잃고 활력까지 잃었던 이곳에 광양에서 여수를 잇는 이순신대교와 진입로가 건설된 것이다. 2012년 10월 완공된 이순신대교는 주탑의 높이가 270m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 주탑간 거리 1,545m에 총연장 2.3km 길이로 규모면에서는 세계에서 4위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대교의 완성으로 여수와 광양간의 80분의 거리가 10분으로 단축되었으며, 여수산단의 물동량 완화 및 물류비 감소 효과와 세계박람회 당시 여수를 찾았던 관람객의 편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22019년 12월 현재 606세대에 1,23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묘도는 9.4㎢에 16.3km의 해안선을 가진 섬이다.
대교가 완성되면서 광양만의 상징이 된 이순신대교와 광양만 해전의 유적지로 알려지는 명나라 진린 제독의 도독포와 묘도봉수대 등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앞으로는 문화유적지로서의 묘도의 변화도 기대되는 대목이다.
*빗깐이 섬 횡간도
(본문중에서)
횡간도는 조선시대 전라좌수영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하던 곳으로도 유명한 섬이다. 여수의 역사책인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는 섬에다가 잠수군潛水軍을 두고 전복을 잡아 말려서 진상하고 생전복은 역마를 통해 서울로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수는 옛날부터 전복이 유명했다. 2011년 발굴되었던 태안군의 마도3호 난파선은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한창이던 1264~1268년 무렵에 세금을 싣고 강화도로 가던 조운선이었다. 이 배는 여수를 출발하여 태안 마도에서 좌초된 것으로 당시의 생활상을 전해주는데, 여수에서 싣고 가던 전복젓갈이 나와 화제가 되었다.
*비렁길
(본문중에서)
봄맞이 여행객은 모두 금오도로 모인 것처럼 이른 봄부터 비렁길에 사람이 넘친다. 총 연장 18.5km의 비렁길 1코스는 함구미에서 초포라고도 불리는 두포 마을까지며, 2코스는 두포마을에서 직포마을까지로 1,2 코스 1구간의 거리가 8.8km이다.
다음으로 직포에서 학동 마을까지를 3코스, 학동에서 심포 마을까지가 4코스이며, 그리고 마지막 5코스는 심포 마을에서 장지 마을까지로 3,4,5코스 2구간의 거리는 9.7km이다.
함구미 마을에서 시작되는 비렁길의 시작은 아름다운 돌담길을 지나고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숲길로부터 시작된다. 고목과 이끼가 어우러진 사이로 예쁜 콩 난이 지천이고 폐가를 뒤덮은 담쟁이 넝쿨에 마삭줄까지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어 안내판에 ‘비렁길 생태탐방로’라 이름 붙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남해의 진주 거문도
(본문중에서)
여수에서 남동쪽으로 114.7km 해상에 위치하는 거문도는 서도西島, 동도東島, 고도古島의 세 섬으로 형성되어 있다. 조선초기의 기록에는 지금의 거문리 지역을 고도孤島라 하고 서도는 초도草島라 하여 고초도孤草島라 했던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고 조선후기에는 삼도三島라 하였다.
삼도를 거문도로 부르게 된 것은 조선말기 러시아, 영국, 중국, 일본 등의 열강이 각축을 벌이는 과정에서 거문도를 지나가는 해상 항로가 주목을 받게 되면서다. 이 시기에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거문도사건을 일으켰다. 사건이 일어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선과 청나라 영국간의 외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거문도란 섬의 이름도 이때 생겼다는 일화가 있다. 사건 후 청나라를 대표했던 정여창 제독은 섬 주민과 만남을 자주 하였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한문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였다고 한다. 필담을 통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알게 된 정여창은, 뛰어난 문장가들이 많은 섬이란 뜻으로 거문도巨文島로 개칭하도록 하여 거문도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3)해안
*남해의 문 용문포와 고진
(본문중에서)
고진마을 일대에는 1970년대 말까지도 수많은 백로가 살면서 그림 같은 광경을 보여주었으나 환경오염이 심해지고 갯벌이 줄어들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10여 년 전부터 남동쪽에 있는 대섬에 다시 찾아와 둥지를 틀고 있다. 고진마을을 지나 동쪽 해안으로 나아가면 마을의 지형이 여우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하여 우리지방의 여우의 사투리인 여수머리로 부르는 호두마을이 있다.
마을 앞 방파제와 갯바위 낚시를 할 수 있어 낚시 애호가들이 자주 찾는 마을로 멸치잡이 성수기인 7월에서 12월에는 마을이 더욱 활기차다. 마을 곳곳에 멸치 건조장을 갖춘 어민들로부터 남해안 청정해역의 최고 품질의 멸치를 직거래할 수 있으며, 동쪽 해안에서 가막만을 바라보는 해안선의 경치도 장관이다.
*비단결 바다 나진포구
(본문중에서)
나진마을 남동쪽으로 해안선을 따라서 돌아보면 가막만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진 멋진 해변이 끝없이 이어진다. 들쑥날쑥하면서 연결되는 각양각색의 해안선에는 사람이 살아온 만큼의 역사에 숱한 전설도 함께 전해온다. 여러 곳의 해변 이름은 주변의 형상이나 특징 때문에 이름 지어진 곳이 많은데 찬샘(우물)이 있는 참생기미, 고기잡는 어구인 발통 모양의 해변 발통기미, 배가 닿는 선창이 있는 선창기미, 가장골이 있는 가장기미, 조개가 많이 잡혀서 조개(등)기미 등의 이름이 전해온다. 이런 해안 지명들은 기미라는 우리말을 한자로는 쇠 금金으로 표기하다 보니 금이 날것이라는 전설이 되기도 한다.
*검은모래의 만성리 해수욕장
(본문중에서)
젊은이들의 사랑과 꿈을 노래한「여수 밤바다」란 노래가 인기다. 노래와 함께 여수 밤바다를 만들었던 배경이 되었다는 만성리해수욕장을 찾는 발길도 많아졌다고 한다.
여수와 한산도 간의 해상항로를 일컫는 한려수도는 꿈과 낭만의 뱃길로 알려져 왔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조선 합병 25주년을 기념하여 오사카 마이니찌 신문사가 조선팔경을 선정하는 우편조사를 응모하였는데 8번째로 한려수도가 선정되었다. 지금처럼 교통이나 생활 환경이 여유롭지 않던 시절에 남녘 바닷길로의 여행은 누구나 한번쯤 품어보는 꿈이었다.
1930년 남해안의 중심인 여수에 철도가 연결되면서 흑사청송이 어우러진 만성리의 아름다운 풍경은 바다를 동경하던 뭍사람에게는 신비경으로 다가왔다. 여수에 도착하기 전 잠깐 차창으로 비치는 해변의 아름다운 모습에 누구든 반하기 마련이다. 여름이면 만성리 해변을 찾는 여행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여행객의 방문으로 1939년 7월 만성리는 해수욕장으로 개장되었다. 철도와 연결되는 편리한 교통과 함께 검은 모래의 신비감이 더해져 금세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는 주목받는 해수욕장이 되었다.
4)산
*여수의 진산 진례산과 영취산
(본문중에서)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여수반도 곳곳엔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전국으로 유명해진 등산로가 많다. 우리나라 남쪽바다의 정수를 만끽하는 금오도의 일주산행, 섬 처녀의 전설과 함께 짜릿한 산행 뒤 전복회와 막걸리가 일품인 개도 산행, 웅비하는 여수산단과 광양만의 역동성에 진달래와 단풍이 아름다운 진례·영취산행이 그렇다.
이 중에 영취산과 진례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이 산이 품고 있는 흥국사와 도솔암의 단청의 빛깔과 같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산행을 즐기는 등산객의 눈이 즐겁게 한다.
진례산은 여수반도에서 가장 높은 높이 510m의 산이다.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 조선시대에는 순천부의 성황산이었다. 상암동 당내마을에는 성황신을 모신 당집이 있어 매년 봄과 가을에 유생을 보내 성황제를 모셨다는 기록이 승평지에 전해온다.
*고락산과 미평
(본문중에서)
고락산성은 해발 333미터인 고락산 정상과 아래 봉우리에 600년을 전후한 백제시대에 쌓은 고리모양의 테뫼식 산성으로 오랫동안 충무공과 관련된 임란 당시의 유적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발굴을 통하여 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산성은 봉우리에 둘레 100미터의 부속성이 자리하고 낮은 봉우리에 둘레 354미터의 본성이 자리한 복합성으로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예로 알려졌으며, 발굴된 유물은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하여 토기와 철기류, 석환, 우물 등이다.
*전라좌수영성과 종고산
(본문중에서)
1591년(선조24)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서문 해자垓字를 만들었다. 1593년(선조26) 7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에 의해 한산도로 진을 옮겼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일 년 후(1599), 절도사 이시언이 삼도수군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 건물을 좌수영에 지었다.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진남관, 망해루, 결승당을 재건하였으나 1716년 진남관이 불에 타버렸고, 1718년 절도사 이제면이 다시 중건하였다. 1774년 절도사 김영수가 성을 보수한 기록이 전해온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이르러 시내에 길을 내면서 좌수영성은 뜯겨지기 시작했다. 부속 건물들은 개인에게 팔려 뜯기어 집을 짓는데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좌수영성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여수의 가치가 얼마나 높아지겠는가? 시가지 건설과 교통을 핑계로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였던 일제의 만행이 두고두고 아쉽다. 지금도 좌수영성의 경계는 골목길로 변하여 좌수영성 모양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성을 복원하여 여수의 도시 가치를 더욱 높일 때가 되었다.
5)풍경
*대섬의 맑은 바람
(본문중에서)
죽도청풍竹島淸風의 대섬은 흔히 오동도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오동도는 동백과 함께 조선수군이 임진왜란에서 화살대로 이용했다는 시누대가 많은 대나무 섬이며, 여수사람에겐 젊은 시절 한두 번쯤 오동도 시누대 밭에서 숨어 나누던 연인과의 추억이 함께할지도 모른다.
죽도는 대섬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하지만 대나무가 많은 섬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는 대나무의 생김새처럼 육지에 가까이 있어 대섬이다. ‘배를 선착장에 대다’의 쓰임처럼 육지 가까이 대어진 섬이란 뜻으로, 육지 가까이에 있는 많은 섬의 이름이 대섬이다.
*봉강언덕에서 보는 맑은 안개 피어오르는 풍경
(본문중에서)
해방을 맞이한 여수의 시가지는 일제 때 착공하고 남겨진 매립지로 도시다운 시가지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사건은 시민 모두를 폭도로 규정하고 시가지를 함포와 박격포로 공격하였던 진압 군경의 파괴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사건이 일단락되자 정부는 구호자금으로 당시 1억8천5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내놓았는데 이 돈의 일부로 중앙시장이 만들어지고 중앙동 로터리가 개설되면서 중앙로가 개설되었다.
해방과 여순사건, 한국전쟁으로 도시정비는 꿈도 꾸지 못하다가 1956년에 이르러서야 중단된 매립공사를 재개하는 데 경쟁 입찰이 부쳐지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부실공사 등 숱한 사연을 남기면서 1962년 교동 일대의 매립이 마무리되었고, 인구의 증가와 도시규모의 확대로 38만여 평의 국동지구의 매립도 완성되어 오늘날의 구항 지역 모습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한국화에서 보는 한적한 강변의 포구와 같은 봉강청람의 옛 모습을 다시 보긴 어렵지만, 전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여수항구의 지금의 모습은 이처럼 숱한 사연을 켜켜이 품고 있다.
*여수미항 전망대 돌산공원
(본문중에서)
돌산공원의 동북쪽에는 여수세계박람회 개최와 함께 완공된 거북선대교가 있다. 지난 2006년 2월 착공에 들어가 6년만인 2012년 4월 12일 정식 개통을 한 이 다리는, 국내 최초의 콘크리트 사장교로 길이 744m, 폭 20m이며 995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다리 개통으로 구 도심권의 교통 혼잡 해소와 돌산 지역의 해안 관광이 더욱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공원 북쪽 바닷가에 자리 잡은 진두마을은 본래 나룻꼬지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로 건너편 선착장과 돌산도를 이어주는 나룻배가 닿던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선 돌산대교 북쪽에 위치한 장군도를 이어주는 나룻배를 이용할 수 있다.
돌산공원의 정상에는 2014년 12월부터 운행 중인 공원의 명물 케이블카가 있다. 돌산공원과 건너편 자산공원 사이를 오가는 케이블카는 바다 위를 지나게 되어 있어, 짜릿한 스릴과 함께 바다와 하늘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특히 강화유리로 만든 바닥이 투명한 크리스탈 캐빈은 100여 미터 아래 바다와 배 위를 지나는 지점에서 오금이 저리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케이블카의 길이는 돌산공원과 자산공원 사이가 1,500m이며 바다 위 구간이 650m이며 편도 13분 정도 걸린다.
장군도는 해안선의 길이가 600m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봄이면 1,000여 그루의 벚꽃이 만발하고 낚시도 잘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섬과 돌산도 간에는 조선시대인 1497년 전라좌수사 이량 장군이 쌓았다는 수중석성이 있고 목책의 흔적도 보인다. 임진왜란 때에는 수중에 갈고리를 만들어 왜적이 지나갈 적에는 갈고리를 끌어당겨 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재는 섬 주위를 따라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와 벤치 등이 있고, 서쪽에는 장군도 무인등대도 있어 호젓하고 조용한 산책에 제격이다.
6)오늘의 여수
*야경이 아름다운 여수산단
(본문중에서)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한 여수반도의 풍경에 취해 영취산 정상을 오르고 보면, 아름다운 광양만과 함께 어우러진 석유화학산업단지의 색다른 풍경과 거대한 규모에 놀라게 된다. 최근에는 여수십경 중 하나로 뽑힐 만큼 멋진 볼거리가 된 여수산단의 야경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공장지대의 인상을 바꾸면서 여수 관광의 백미가 되었다.
인간의 문명이 발전할수록 밤은 점점 더 밝아져 도시의 야경이 관광 코스가 된 지는 오래지만, 삭막하게 느껴지는 산업단지의 야경이 아름다운 경관으로 주목 받는 일은 이채롭다.
불야성을 이룬 거대한 탑들이 밀림의 거목처럼 빼곡히 들어차고 그 사이에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기계 인간의 심장 소리와 같은 굉음이 들린다. 금방이라도 영화 속의 트랜스포머가 되어 벌떡 일어날 것 같은 경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여수반도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여수국가산업단지는 1967년 2월 20일 여천군 삼일읍 지역에 공업 단지를 세우기 위한 터를 닦기 시작해 1969년 6월 3일 현재 GS-Caltex의 전신인 호남정유 공장이 세워지면서 우리나라 최대의 석유화학공업단지로 성장하였다.
1973년 10월 13일 지금의 남해화학인 제7비료 공장 및 대성메탄올 공장 등이 세워짐에 따라, 여수시 중흥동, 평여동, 월하동, 적량동, 월래동, 낙포동 일대에 세워진 공업 단지는 건설부 고시 제29호에 따라 1974년 4월 1일 산업 단지로 지정되었다. 1975년과 1980년 두 차례의 여천석유화학단지 합동 준공식이 있었으며, 1998년 삼여 통합이 됨에 따라 2001년 4월 12일 건교부 고시 제2001-8호에 따라 ‘여수국가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산업단지 건설 이전 이 지역은 진례산과 영취산 등 여수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높은 산들이 병풍같이 둘러싸인 채, 앞에는 섬진강 하구에 형성된 광양만이 있어 남해안 어족 산란지로 황금 어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 지역에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려주는 유적과 유물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여수 밤바다
(본문중에서)
장범준이 그 분위기를 먼저 느끼고 노래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장범준의 노래로 여수의 밤바다가 더 유명해졌는지는 모르지만 그 중심에 여수 밤바다는 실존하고 있다.
남해의 풍요로운 바다를 끼고 있는 여수는 예로부터 해산물이 풍부하여 먹거리가 유명했던 고장이다. 개성과 전주의 음식이 사대부들의 화려한 밥상인 한정식이라면, 여수의 음식은 해산물을 주재료로 많은 양념이나 요리의 기술을 발휘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 밥상을 그대로 차려 내오는 서민의 음식이다. 거기에다 재료가 주는 싱싱함과 맛의 달인이었던 전라도 사람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맛의 매력은 세계박람회를 통해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여수의 음식 맛에 반한 사람들은 전국 어디에서나 여수를 다시 찾게 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여수를 찾게 된 관광객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찾게 되는 것은 여수 관광일 수밖에 없다.
*여수의 맛
(본문중에서)
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와 함께 전 국민을 사로잡은 자랑이 있으니 바로 여수의 맛이라 할 수 있는 여수 지역의 음식이다. 알싸하고 톡 쏘는 맛이 일품인 돌산의 갓김치를 비롯해서 서대회, 간장게장, 장어는 계절에 관계 없이 전 국민에게 여수의 맛으로 널리 알려졌다. 예로부터 여수는 남해안 해양성 기후와 뛰어난 자연 환경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이 다양하여 뛰어난 맛의 고장으로 알려지긴 했으나, 타 지역 사람들에겐 그 진가를 알릴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2012년의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여수 음식과의 만남은 전국민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여수의 뛰어난 먹거리는 계절 별로 특징이 뚜렷하여 매달 맛있는 음식을 따로 정할 만큼 그 종류가 다양하다.
*여수 사람들
(본문중에서)
후백제가 고려에 의해서 멸망하는 과정에도 여수인의 의로움이 나타난다. 후백제 견훤의 휘하에 있던 여수 사람 김총은 고려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절개를 지켰다. 이 같은 삶을 숭상했던 여수 사람은 김총을 모시게 되어 조선시대까지 상암 ‘당내’ 마을에 당집을 짓고 제를 모셨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던 의인들이 여수 역사와 함께 그 이름이 전해온다. 여수의 마지막 현령 오흠인은 삼일 낙포에 유배되어 기러기도 삼일 동안 울었다는 공은 선생이다. 조선시대에도 전 왕조에 대한 절개로 여수 현의 이름을 잃고 500여 년을 순천부에 예속되는 설움을 맞았지만 여수 사람들은 오히려 이들의 의로움을 칭송하고 오랫동안 기렸다.
여수인의 능력을 만천하에 유감없이 떨치게 되었던 일은 임진왜란일 것이다. 조선의 온 천하를 유린하고 한 입에 삼키려던 왜의 야망을 꺾은 이가 우리 역사의 불세출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의 지역민 들이었다. 오랜 세월을 내 땅을 수호하고 미래를 개척했던 전통과 지혜가 풍전등화의 조선을 지켜냈던 것이다. 지금도 고대로부터 쌓았고 전해지는, 곳곳의 스무 개가 넘는 산성이 이를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개화의 물결이 온 나라를 휩쓸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여수의 민초들도 이전 역사에서 보여주었던 기상으로 그 몫을 다하였다. 봉건적 지주제와 학정에 농민의 생활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자 당시 조정에 항거하며 일어났던 이 혁명운동에서 여수 농민들도 합세하여 삼만의 농민군이 좌수영성을 공격했다. 이들의 후예들은 일제강점기 초기 남해안의 섬 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의병 활동을 전개하고 일제에 맞서 싸웠다.
여수 역사에서 가장 슬픈 역사인 여순사건에서도 군인들의 봉기와는 무관하게 희생된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일제강점기가 끝나자 해방된 나라에 기대했던 일은 일제 잔재 청산과 빼앗긴 주권의 회복이었지만 친일파가 더욱 득세하고 위세를 부리자, 이런 정치 현실에 항거하였던 혈기왕성하던 여수의 청년들이었다. 최근 진실화해위원회는 억울하게 죽어간 민간인들의 억울함을 밝혀내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알려진 여수 사람은 탤런트 백일섭, 전원일기의 작가 김정수, 만화가 허영만, 사진작가 배병우 씨 등이다. 모두 서민의 애환과 삶의 이야기를 모두 진솔하게 표현한 배우와 작가들이다. 그들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중심을 잃을 것 같지도 않아 든든한 믿음을 준다. 몇 사람의 단편적인 엿보기이지만 여수 사람의 기질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 같아 반갑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 봉사활동을 찾아온 청년들의 목소리에 활기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