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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신화/종교학 > 세계의 신화와 전설 > 세계의 신화와 전설 일반
· ISBN : 9788975987625
· 쪽수 : 218쪽
· 출판일 : 2009-09-28
책 소개
목차
머리말 5
추천사 11
Ⅰ. 겁 쟁 이 COWARD 15
Ⅱ. 저주받다 CURSED 47
Ⅲ. 제 비 족 PLAYER 67
Ⅳ. 냉 혈 한 HEARTLESS 91
Ⅴ. 갈팡질팡 INDECISIVE 115
Ⅵ. 막무가내 RECKLESS 123
Ⅶ. 가정파탄 FAMILY-WRECKER 131
Ⅷ. 응석받이 PAMPERED 145
Ⅸ. 다 혈 질 IMPULSIVE 169
Ⅹ. 임기응변 COVER-UP 185
XI. 영 웅 ? HERO? 201
누가 자기의 생각을 일기에서 드러내나 ? 209
누가 누가 나오나 ? 211
To My Readers 214
저자소개
책속에서
Ⅰ. 겁쟁이
트로이 해변에서 그리스인들이 철수하는 게 보이네요. 그런데, 저 목마는 선물일까요, 제물일까요? 새 문명을 시작하게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니 선물이 되기도 하고, 신들의 도움을 받게 하는 것이라면 제물이기도 하겠네요.
주노
아테나가 방금 다녀갔다. 그리스인들을 도와 목마를 만들었다는데, 그들은 이제 성벽 앞에 목마를 두고 철수한 척하면서 테네도스 섬에 숨겠지. 미련한 트로이인들 같으니. 이제 전멸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구나. 아테나에게 일이 잘못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전해야겠다.
미네르바
방금 그리스인들에게 목마를 만들어주고 왔음.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죽여야지.
비너스
목마를 보고 좋아하는 트로이인들 좀 보세. 저게 죽음을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고…. 내 마음에 드는 민족이니 살리고는 싶지만, 운명에 의한 일이니 내가 손대지를 못하겠구나. 뭐, 아이네이아스, 파리스, 헬레네만 살아나온다면 별로 상관은 없지.
크레우사
그리스인들이 드디어 철수했다. 자유! 이제 내 아들 아스카니우스를 마음껏 뛰놀게 해도 안심이다. 아이네이아스도 집에 오랫동안 계시겠지? 아버님도 편하게 지내실 수 있으실 거야.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으니 행복하게 살아도 될 것 같다. 수많은 아버지, 아들, 동생, 그리고 남편을 빼앗아 간 전쟁이 끝났으니. 기쁘다.
비너스
저 인간들 멍청한 건지 뭔지 이해가 안 되네. 그냥 태우면 살 수 있는데, 왜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르는 걸 데리고 들어가겠다는 거야?
주노
저 라오콘이라는 사람은 넵튠의 신관이라고 했지? 왜 아테나는 그를 아직까지 살려두는 거지? 모든 걸 망치려들고 있잖아.
그리스인들은 아직 떠나지 않았으니 목마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은 미친 행동이라고 한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일부러 트로이인들이 놀면서 해이해질 때 까지 기다리고 있는 걸 누가 말해준 건 아닌가?
미네르바
라오콘이 감히 내 목마에 창을 던짐. 흠집이 생겼잖아, 저 괘씸한 놈. 안 그래도 화나 죽겠는데 주노가 펄펄 뛰며 와보라고 함. 또 왜 부르는 거야.
크레우사
방금 아이네이아스가 돌아오셨다.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해 주셨는데, 시논이라는 사람도 참 불쌍하다. 동료였던 그리스인들에게 배신당하고 적국인 트로이 한 가운데에 버려졌다니…. 그리스인들도 참 극악무도한 놈들이다. 사촌인 팔라메데스가 반역죄로 사형을 당한 뒤로 그리스인들에게 별의별 의심을 받으면서 지내다가 결국에는 제물로 바쳐지게 되었다고 한다. 율리시즈라는 자의 교활함은 말로만 들어봤지만 그것은 해도 너무했다. 목마를 만들어 신에게 바쳐도 폭풍우 때문에 항해를 못하니까 신탁을 따라 사람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을 때 화살이 바로 시논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제 2의 이피게네이아 공주가 시논으로 결정 나니까 다른 그리스인들은 ‘옳거니, 내 목숨은 살렸구나’ 하면서 좋아했겠지.
그렇게 심한 대우를 받았으니 비록 적국인 트로이로 왔다고 해도 그가 도망친 것은 잘한 일이야. 하지만 다시는 조국도, 아내도, 아이들도 보지 못할 텐데, 괜찮으려나?
우리 프리아모스 왕께서는 마음씨도 좋으시지. 그분께서 도움을 주겠노라 약속하시니까 시논이 목마에 담긴 비밀을 얘기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전쟁 시작에는 미네르바 여신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 교활한 율리시즈와 디오메데스가 성벽을 넘어 피 묻은 손으로 팔라티움을 훔쳐가자 여신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신탁에 의하면 그들이 그리스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우리 나라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목마를 성 안에 들이면 안 된다는 것! 만일 들이게 되면 트로이 정복은커녕 우리가 그리스인들을 정복하게 될 거라는데….
흥, 이미 들이고 끝났네요!
이피게니아 공주 이야기
그리스 원정대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총 지휘 아래에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이루어졌다. 출항하기 전에 아가멤논은 사냥을 나가 사슴을 쏘아 죽였는데, 그 사슴은 알고 보니 달의 여신 다이아나가 애지중지하는 동물이었다. 복수심이 강한 다이아나 여신은 화가 나서 모든 바람을 멈추어 그리스인들이 출항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전염병을 일으켜 병사들 여럿이 죽게 만들었다. 시간에 쫓기고 불안해진 그리스인들은 예언자 칼카스에게 여신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대책을 요구했다. 칼카스는 결국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아가멤논이니 그의 딸인 이피게니아 공주를 제물로 바치면 전염병이 사라지고 바람이 다시 불 것이라고 했다. 자존심이 심히 상한 아가멤논은 왜 자신이 피해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집을 피웠으나, 더욱 많은 수의 사람이 죽어가며 다른 장수들의 자신에 대한 신임을 잃어가자 하는 수 없이 딸을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아가멤논은 집에 돌아가서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이피게니아를 아킬레우스에게 아내로 줄 계획이니 치장을 해서 배로 데리고 오라고 명했다. 아킬레우스의 용맹에 대해 잘 아는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이피게니아는 신이 나서 잔뜩 치장을 해 배로 갔는데, 그 곳에서 이피게니아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이 희생을 받은 다이아나 여신은 전염병을 없애고 바람을 다시 불게 했고, 그리스 원정대는 드디어 출항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자신을 속여 딸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남편의 행동을 참을 수 없었던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이 트로이에 가 있는 10년 동안 그의 사촌인 아에기스투스와 바람을 피웠다. 그녀는 자신의 부정함을 남편의 행동에 견주어 정당화 시켰고, 결국 자신의 새 애인과 권력을 쥐고 싶은 욕망에 아가멤논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전쟁이 끝나고 아가멤논이 트로이에서 새로운 첩인 카산드라 공주를 데리고 돌아온 첫날 저녁에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 둘을 칼로 찔러 죽였다.
주노
미네르바, 까칠하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을 그렇게 독사처럼 하면 당황스럽잖아. 내가, 같이 모욕을 당한 여신으로서 서로 도우면서 지내자는 뜻에서 라오콘이 일을 망치려 든다고 주의해 준 것 뿐인데, “압니다. 끼어들지 마세요.” 라고 휙 가버리는 건 무슨 무례인가!
어쨌든, 저 시논이라는 인간 참 대단한 것 같다. 거짓말이 유피테르 급인데….
비너스
결국 이렇게 속아 넘어가는구나. 시논이라는 저 작자의 거짓말에 10년간 지켜졌던 성벽이 무너지는 거야. 하여튼, 이 모든 게 내 미모 때문이라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
파리스의 선택
신들의 왕 유피테르가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테살리아 국왕 펠레우스의 결혼식을 축복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에 수많은 왕과 왕비들, 신과 요정들이 초대받았는데, 유일하게 초대받지 않은 신이 한명 있었으니, 바로 불화의 여신 에리스였다. 무시당한 에리스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연회장 중간에 황금사과를 하나 던져놓고는 떠나버렸는데, 이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세 명의 여신이 이 사과를 달라고 요구했는데, 그들은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 미의 여신 비너스, 신들의 여왕 주노였다. 그들은 서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 주장하며 타시락거리다가 유피테르에게 결정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아내와 딸, 가장 인기 있는 여신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유피테르는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고자 인간들 중 특히 공평한 (게다가 잘생긴) 남자인 양치기 파리스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머큐리의 안내를 받아 이다산에서 양을 치던 파리스에게 나타난 여신들은 제각기 그를 선물로 매수하려했다. 주노는 유럽과 아시아를 다스릴 권력을, 미네르바는 전장에서의 지혜와 솜씨를, 비너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겠노라 약속했다. 파리스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비너스에게 황금 사과를 바쳤고, 결국에는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헬레네를 아내로 얻었지만 그 후로부터 나머지 두 여신들, 특히 주노는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파리스가 트로이의 왕자였다는 것. 그가 태어났을 때 온 도시를 불에 타게 만들 장본인이 될 거라는 신탁에 의해 버려져 양치기로 자랐지만, 마을의 말썽이었던 소도둑을 붙잡은 공로로 궁전에 초대받았을 때 정체가 탄로 났다. 그 후로 그는 왕자로 자라다가 스파르타로 평화 사절단을 이끌고 갔는데, 그곳의 왕 메넬라우스의 아내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결국 메넬라우스 모르게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리고 왔고, 분노한 메넬라우스는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형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 원정대를 이끌고 트로이를 쳐들어왔다.
미네르바
10년 만에 드디어 저 벽을 무너뜨림. 이젠 뱀들이 나올 때가 되었겠지?
주노
미네르바가 무서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잔인할 줄은 몰랐다. 트로이인들이 시논을 거의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오콘과 그의 아들을 죽이다니. 뒤끝 없이 철저하게 하는 것은 아테나가 잘하지만…, 바다에서 갑자기 쌍둥이 뱀이 튀어나오더니 육지로 기어올라 아들들을 물어 삼키고 라오콘의 온 몸에 독을 퍼뜨려 죽게 만들었다. 물론 그 후에는 미네르바 동상 아래에 숨었지.
비너스
미네르바도 너무해, 나보다 미모가 덜 뛰어나다고 해서 이런 짓을 하다니.
크레우사
끔찍한 일이 벌여졌다. 라오콘 신관이 넵튠에게 소를 바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다에 쌍둥이 뱀이 나타났다. 피처럼 붉은 눈을 번뜩이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육지로 올라온 그들은 겁에 질린 사람들을 지나 라오콘 신관의 두 아들들을 한 마리씩 물어 삼켜버렸다고 한다. 라오콘이 뱀들에게 창을 던졌지만 그들은 끄떡없었고, 오히려 그의 목을 두 번씩 칭칭 감았다. 불쌍한 라오콘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그는 피에 독이 섞여 죽었다고 한다.
이게 바로 신들의 뜻을 거역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인가보다.
비너스
모두 다 천하에 멍청한 것들 같으니. 사람 몇 명이 뱀에게 먹혔다고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는 없잖아. 무슨 신의 뜻은 신의 뜻이야, 사랑의 신인 나의 뜻은 목마를 들이지 말자는 건데! 내가 일부러 말이 네 번씩이나 문턱에서 멈추게 했어도 기어이 끌고 들어가더니, 이제는 아이들까지 불러서 화환을 만들어 목마에 걸며 축제를 벌이네. 라오콘은 죽었지, 카산드라가 목마는 재앙을 불러 올거라 목이 찢어져라 경고를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를 않지, 이제 트로이는 정말 망했구나.
카산드라 이야기
카산드라는 프리아모스 왕과 헤쿠바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트로이의 왕녀였고, 어렸을 때부터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태양과 예언의 신 아폴론마저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폴론은 그녀의 미모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의 증표로 예언하는 능력을 줬다. 하지만 원래부터 아폴론 신에게 관심이 없었던 카산드라는 마지막 순간에 그의 사랑을 거절했고, 이에 화가 난 아폴론은 자신의 선물을 빼앗지는 않았으나 약간의 수정을 했다. 이제 카산드라의 ‘선물’은 자신은 항상 진실된 예언만을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역시나 그녀의 이야기를 믿지 않은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은 그녀가 아무와도 말을 할 수 없도록 성에 가두었고, 트로이가 함락되자 아가멤논은 그녀를 전리품으로 데려갔다. 결국 카산드라는 돈과 권력, 그리고 분노에 눈이 먼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책을 좋아한 나는, 어려서부터 읽고 싶은 게 있으면 당장 아빠에게 가 서점에 가자고 졸라댔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어, 그래, 그럼 물론 가야지!” 라고 하셨고, 서점에 도착하면 영어책, 동화책, 문학전집, 시집 등 책이란 책은 다 사주셨습니다. 그 시절 나의 눈에 아빠는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굉장히 좋아서 말만 하면 서점까지 다 사주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아빠도 “안돼,” 계속 조르면 “절대 안돼.” 하시며 단호히 고개를 저으시는 ‘책’이 있었으니, 그건 만화책이었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책방에서 열심히 빌려보는, 그러나 나는 빌려오면 무척 혼이 나는 만화책만큼은 아빠도, 엄마도 절대 금하셨지요. 이렇게 우리 집에선 만화책이 쓸데없는 군것질을 넘어서서 거의 마약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으니, 나는 친구들처럼 왕자와 공주, 괴물과 영웅에 대한 이야기들을 예쁜 그림이 아니라 글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들을 통해 접했습니다.
마음만 먹었더라면 쉽게 투덜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신화를 책으로 읽는다는 것이 마음에 안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만화책보다 훨씬 공간제약을 덜 받기 때문에 더 많은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는 유럽의 왕, 왕비들을 만났고, 잘생긴 영웅들, 끔찍한 괴물들, 천국, 그리고 지옥을 만났습니다. 한국에도 단군신화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 이야기들은 유럽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더 많은 매력을 느꼈고, 어느새 나는 다른 애들이 만화책에 빠진 것보다 더 깊이 신화에 중독되고 말았습니다.
태초의 이야기부터 전설의 끝까지, 그러니까, 이야기가 신화에서 역사로 넘어오는 로마의 건국 이야기까지를 읽고 또 읽다보니 결국에는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외우게 되었습니다. 지방에 따라 이야기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기억하려고 노력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만큼은 여기에 만화보다 더 오래가고 재밌는 신화라는 게 있었으니, 그걸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는 오래되기 마련이고, 결국에는 똑같은 이야기가 다른 주인공들을 통해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신화는 절대 늙지 않지요. 초등학교 때부터 난 친구들이 심심해 할 때면 언제라도 아이들이 듣고 싶어 하든, 안하든 신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신화 이야기를 해도 질리지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를 옮겨다니고, 중학교에 들어가보니 나와 같은 관심을 가진 친구들을 제법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국 청소년들에게 신화란 영화나 패션 브랜드처럼 서양과 소통하는 하나의 매개체더라구요.
미국에 와서 라틴어 시간에 『아이네이드』를 읽기 시작했을 때, 물론 재미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왜 한국에는 호머의 『오딧세이』나 『일리아드』만큼 안 알려져 있나, 하는 불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신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내가 아직 청소년으로서의 목소리가 남아 있을 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라틴어 수업에서 이 서사시를 읽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역사와 배경도 함께 배웠는데, 그 덕에 이 작품이 얼마나 로마의 역사, 서양 문화의 시작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지 알 수 있었고, 이 서사시를 더 많이 알리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여성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더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서는 전지전능한 시인이 아이네이아스를 중점으로 해서 시를 이어가기 때문에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인들은 단순히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 그녀들의 마음은 전혀 내비쳐 있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것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지만, 왠지 그 여자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입장을 헤아려 본다는 것에 꽤 매력을 느꼈습니다.
글 쓰는 과정에서 나는 더 이상 즐기는 게 불가능했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한 사건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가서 직접 그들이 되어 말과 행동을 했으니, 일인다역의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 수없이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찡그리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기분이 너무 좋아 깔깔 웃기도 했습니다.
도중에 가장 속상했던 것은 『아이네이드』, 그 서사시의 가장 기본적인 매력을 내 책에서는 나타내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의 가장 큰 매력은 아이네이아스의 행동과 그의 실제 속마음 사이의 갈등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 분석 과정에는 인간의 개인적인 욕망과 운명, 또는 의무간의 대립, 인간미를 저버려야만 행할 수 있는 하늘의 뜻, 과연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라는 게 존재하는 건가, 라는 생각 등 나의 열일곱 살 사고에 한계가 느껴지는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영웅이기도, 신의 아들이기도 한 주인공이 결국에는 한 인간으로서 나타내는 고뇌를 통해 수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시입니다.
나의 아이네이아스는 주노, 비너스, 디도, 미네르바, 크레우사, 그리고 라비니아가 각자 개인들의 독백으로 그의 행동을 씀으로써만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네이아스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 까지는 알 수 있어도 그의 진심이 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예를 들어, 디도를 버리고 갈 땐 여자를 울리는 나쁜 놈이 되어버리고,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소망을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는 지극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는 건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 책은 마지막에 과연 아이네이아스가 영웅인지 미약한 인간인지, 그를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 말을 안해 줍니다. 실제 서사시에서 베르길리우스가 대신 대답해주는 질문들이 내 책에서는, 어떻게 보면,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해야 하죠.
학교에서 원문 서사시를 읽은 덕분에 더욱 고전어를 깊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과, 더욱 많은 원서들을 읽고, 알고,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 책을 쓴 덕분에 사람들에게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한 모국어로 이 책을 쓰다 보니, 언젠가는 영어로도 써보고 싶다는 희망도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아이네이아스는 셀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그리고 내 책에서는 독자들의 오해도) 뚫고 결국에는 자신이 그리도 갈망해온 대로 이탈리아를 얻기 전의 마지막 장애물인 투르누스를 없애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운명이 이루어지는 장면과 함께 서사시는 막을 내리지요. 아이네이아스라는 사람이 아이네이아스의 삶의 이유를 충족했으니, 더 이상은 그 누구도 그를 평가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아이네이아스는 자신을 잃지 않지요.
나 역시 앞으로 살아가면서 오해도 받고, 어려움에도 처하겠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변함없는 ‘정소정’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경험들이 얼른 와서 자신을 만나라고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으니, 난 재빨리 옳거니, 하며 그 경험들을 쫓아 갈 계획입니다. 원하는 대로 수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 후, 세상에 세상을 알리고 싶은 것이 내 소망이니까요.
2009년 8월
정소정 머리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