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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파티

크리스마스 파티

이미루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1-12-05
  |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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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파티

책 정보

· 제목 : 크리스마스 파티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5989551
· 쪽수 : 252쪽

책 소개

196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한 젊은이의 모험과 좌절, 고뇌와 아픔, 환희와 절망을, 각기 다른 정황을 통하여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목차

어느 시간강사의 노트
성규 형
어느 건물의 약사(略史)
크리스마스 파티
어머니의 초상
오 중위의 죽음
월광곡
바닷가 공민학교의 추억
어동이의 생과 사

저자소개

이미루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피츠버그 대학과 영국 그라스고우 대학의 「문학과 신학ㆍ예술연구소」에서 문학과 종교의 관계를 연구하였고, 『시의 종교학』, 『문학과 종교연구 서설』 등의 저서와 역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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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어느 시간강사의 노트


새벽 버스를 타기 위하여 나는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사방은 밤의 정적에 싸여 있었고 집 앞의 골목길은 아직 어둡기까지 하였다. 아내가 김치를 넣고 끓여 준 뜨거운 죽을 배 속에 퍼 넣어서 그런지 속은 따뜻하였으나, 삼월 초의 새벽공기는 그 매서운 겨울 냉기를 아직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버스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새벽 시간에 나간다고, 무슨 큰 일이나 하러 나가는 사람처럼 아내 앞에서 목에 힘을 주던 일이 머리에 떠올라 입에 실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터로 나가고 있는 시간인데, 나만 홀로 그 시간에 일어나 마치 전쟁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잔뜩 긴장해 있던 스스로를 생각하니 계면쩍은 생각조차 들었다. 꽤 큰 바구니나 플라스틱 용기를 든 사오십 대의 아주머니들이 의외로 많았다. 청소도구 같은 것을 든 아주머니는 아마 사무실에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 청소를 마쳐야 되는 분들일 것이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을 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 아주머니들의 눈은 벌써 긴장으로 팽팽해 보였다. 버스가 청량리 근처의 경동시장 앞을 지날 때 나는 순간적으로 온 몸에 긴장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시장 앞의 길 가에 벌써 여러 사람들이 나와, 큰 드럼통 속이나 작은 양철통 속에 나무 조각들을 집어넣고, 새벽 추위를 이겨내려는 듯, 불을 피워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간다는 나의 오만(?)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이른 새벽에 길 위에 저렇게 불을 피우면서라도 그 날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하루를 시작해야하는 생존의 엄숙성 같은 것이 작은 전율과 함께 내 몸과 마음을 휩쓸었다. 나의 몸은 잠시 예기치 못한 놀라움으로 경직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시장 앞에 멈추어 섰던 버스는 다시 출발하였고 나는 버스의 흔들림과 새로 차에 오른 승객들이 길에서 묻혀 들어 온 찬바람 사이의 번잡 속에서 어느 덧 다시 몸이 풀렸다. 사람들은 단지 살아가기 위하여 세상에 못할 일이 없는 것이었다. 석사학위를 받고 지방대학에 시간 강사 자리를 얻어 강의를 위해 서울에서 새벽 이른 시간에 버스를 타는 일쯤은 사실 고생 축에도 들지 않는 일로 느껴졌다. 양철통이나 아니면 그냥 길바닥에라도 불을 피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추위 속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적어도 강의하는 동안은 찬바람이 들지 않는 실내에서 일할 수 있는 자신이야말로 누구에겐가 열 번이라도 감사를 드려야 하는 호강스런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한 데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엄살 부리지 말고 열심히 준비해서 열심히, 더욱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사무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대학을 졸업했을 때 나는 벌써 서른둘이었다. 세살이 된 딸까지 있는 엄연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과감히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였고, 서울살이를 시작하기 위하여 먼저 홀로 서울로 올라갔다. 졸업과 동시에 중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나 내 꿈은 가르치는 일 보다는 더 배우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우선 먹고 사는 일이 먼저였으므로 나는 중등교사 자격증으로 공단에 있는 야간 고등학교에 임시교사로 취직하였다. 한 학기 쯤 가르치는 것을 두고 본 뒤에 정식교사로 임용하든지 사표를 받을 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족하였다. 지방대학에서 취득한 교사자격증은 서울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임시로라도 나를 채용해 준 학교에 나는 감사하였다. 칠십년 대 후반의 초입에 나는 한 달에 육 만원을 받는 교사가 된 것이다. 나는 학교 근처에 하숙을 정하고 오후 다섯 시부터는 학교에 출근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하숙집 주인이 싸주는 도시락과 두꺼운 전공서적들을 빽빽하게 꽂아 넣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공단에서부터 성북구까지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버스를 타고 강의를 들으러 대학원에 나갔다. 강의의 첫 시간부터 교수들은 엄청난 양의 참고도서 목록과 함께 필독서들을 소개하였고, 그 책들의 내용들을 짧게짧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앞으로 이해하고 추구해야 할 정신의 높이를 암시하였으며, 나는 그것만으로도 벌써, 숨이 차고 기가 죽는 기분이었다.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보여주는 목표는 그 때까지의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동서양의 수많은 현자와 석학들이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걸고 그 시대의 강자들과 싸우면서 조금씩 축적해 온 까마득한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학문의 선배들이 쌓아 올린 그 학문의 높이에 감탄하고 감사하면서도 어떻게, 언제 저 높이에 오를 지가 큰 걱정이었다. 내가 전공으로 선택한 영문학사는 멀리 중세의 영웅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었고, 문학 비평사는 그리스 시대의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희곡은 벌써 기독교의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서구의 역사 시대보다 훨씬 앞서 원시 부족들의 들뜬 축제 속에서 그 기원을 헤집어 내며 시작되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멀고 높았으나 나는 그 어지러운 높이와 아득한 옛날의 인간들의 꿈과 야망이 마음에 들었다. 공부하기에는 약간 늦은 나이였고 기억력도 동기생들에 비하여 약간은 쇠퇴하였으나 나의 정신만은 동기생들 못지않게 또렷하고 생기로 충만하였다. 나는 학부시절에도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학생들과 잘 어울렸고 체육시간에도 그들에 뒤지지 않는 체력으로 운동장에서 뛰었다. 축구를 할 때면 앞에서 공을 몰고 가는 나를 따라올 수 없어 뒤에서 내 몸을 두 손으로 껴안는 학생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밤에 자는 시간을 조금 줄이면 많은 것을 외워야 되는 중간고사나 기말 시험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별로 밀리지 않았다. 학부의 1학년 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삼년동안 나는 계속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교수들이 나에게 대학원 진학을 생각해 보라고 한 것은 모두 이러한 결과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내가 다닌 지방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의 소위 일류대학의 대학원 입학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학생들은 지방의 학생들보다 우수하였다. 다행인 것은 나보다 세 네 살 아래이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이 여럿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아직은 내가 완전히 늦은 것이 아니라는 실증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나는 늦었다는 데서 오는 초조감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과정을 빨리 마쳐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내가 공부를 덜 하거나 조금은 게을러도 된다는 것의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읽어야 할 책들은 항상 눈앞에 쌓여 있었고, 매 시간 내어주는 과제물은 한 시도 빈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더구나 석사학위논문을 쓸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제2외국어 시험에서부터 전공과목들의 종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어려운 관문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도대체 70점이라는 커트라인은 얼마나 까마득한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더구나 영문학 쪽 교수들은 당시 점수가 짜기로 학교 내에 악명이 자자한 분들이어서 학생들은 시험을 치르기 전부터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우선 중세부터 20세기의 현대문학에 이르는 광범한 시험범위가 학생들의 기를 처음부터 꺾어 놓고 있었다. 많은 수의 선배들이 종합시험의 재수나 삼수, 사수생들이어서, 대학원 도서실에 토요일이나 일요일까지 쉬지 못하고 나와 낑낑거리고 앉아있는 학생들은 거의 영문과 학생들이라는 소문이 나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것들도 모두 추억의 일부로 남는 것일까. 일요일에도 도시락을 두세 개씩 싸들고 나와 책과 씨름하던 선배들도 어느 새 몇 학기가 지나고 나면 그 어렵다는 시험을 통과해서 논문 쓸 자격을 얻어 나갔고, 그러한 사실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나는 한 번도 영화구경이나 여름휴가 같은 호사를 누리지 못하였고, 그렇게 예쁜 우리 딸과도 마음 놓고 놀아 줄 틈조차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공부 외에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매주 일요일 오전 한 시간 정도, 교회의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그것조차도 가끔은 과제물에 밀려 빼먹는 날도 있었으나 그런 경우를 제외한 다른 일요일에는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였다. 왜냐하면 그 시절 신은, 내가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의 형제나 자매들은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없이 혼자의 힘으로 살아내느라 누구를 돌볼 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육안으로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내가 왜 그렇게 신뢰하고 의지하였는지 설명하기 어려우나, 당시 신은, 어렵고 힘든 나의 모든 순간에서 유일한 위로자이고 격려자였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앞의 손잡이에 머리를 기댄 채로 그를 부를 때도 있었고, 길을 걷다가, 잠자리에 드는 어느 순간 잠시 그를 불렀다. 그런 순간들이 길지는 않겠지만, 나에게는 그지없이 간절한,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던지는, 집중의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분을 불러 이것저것 중언부언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한 적은 별로 없다. 나는 그저 지쳐있는 순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을 뿐 이었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면 웬일인지 나를 짓누르던 모든 문제가 모두 해결되어 버린 것 같은 시원한 느낌 속에 빠져들곤 하였다. 몸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고 아무 것도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하였다. 그 때 아내와 딸은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돌보아야 할 존재였지 의지의 대상은 아니었다. 나이가 훨씬 더 든 후에 어느 날 나는 내가 그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세월은 그렇게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 신비를 연출하는 것이다.
계속 읽어야 할 책의 분량이나 과제물들이 학기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한 학기, 두 학기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면 배울수록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강의 중에 의무적으로 배우고 시험을 치르고 잊어버려도 좋거나, 잊어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생각과 사상의 추이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나도 그 시대를 사는 인간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생각의 추세를 외면하는 일은 불가능 하였다. 그것은 19세기 말에 시작된 모더니즘과 1960년대에 서양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이었다. 두 사조 모두 그 시대의 진부한 전통과 속물성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던 지식인들의 양심과 새로운 감수성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나 스스로도 그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들 사고의 핵심인 신에 대한 회의와 부정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온전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물론 서양의 역사에서 신의 이름으로 행하여진 수많은 악행들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느 시대나 자기들만이 신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자기들만이 신의 뜻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종교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 놀라운 환상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생각하는 신의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그래서 그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그들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죽였다. 중세의 서양 종교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학살과 살인, 핍박, 마녀사냥, 구교도나 신교도의 이름을 가진 파벌간의 가차 없고 무자비한 싸움의 기록이기도 하였다. 어떻게 신의 이름으로 그렇게 끝없는 잔혹행위가 행해질 수 있었을까. 그들은 신을 잊어버린 채, 신에 대한 예배의 형식에 관한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자신들끼리 편을 갈라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다투었다.
서양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순교자의 기념비, 종교의 증오를 보여주는 유적들, 성자의 추종자들이 휘두른 쇠망치에 의해 손상된 시골의 성당들 같은 종교의 잔인성의 증거들은, 선과 정의 그리고 사랑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자료들이었다. 세상은 갈수록 선한 자보다 악한 자가 더 많은 것을 획득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선한 자들은 점차 역사의 뒷 구석으로, 삶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니체는 19세기 후반에 이미 신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나는 니체의 신의 부정을 전적인 신의 죽음의 선포로 이해하기보다, 그 시점까지 인간이 가지고 있던 신의 부성적(父性的)성격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려 하였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치 일상의 생활에서 모든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해 주는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듯 신에게 가지고 갔으나, 이제 그런 부성적 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실망의 연장선상에서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하였다고 이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삶의 구체적 순간에서 인간에게 위로와 사랑을 베푸는 모성적 신은, 마치 대지가 흙 속에서 인간의 모든 과오와 악행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풀잎과 식물들을 싹 틔우고 모든 동물들이 생식하며 번창할 수 있도록 돕듯이, 연약한 인간들을 항상 돕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출현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신에 대한 회의와 선언적 부정을 넘어서서 아예 신에게 귀속되어 있는 모든 가치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세밀하고 정교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그 동안 신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인간의 삶의 모든 소중한 이념과 가치들의 뿌리를 뒤흔드는 엄청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정교한 신에 대한 부정적 이론들은 20세기의 모든 걸출한 문학작품들을 관통하는 ‘핵심어’였다. 나는 이러한 이론들을 파괴해버릴 명쾌한 이론을 기대하고 여러 가지 책들을 뒤적여 보았으나 그런 이론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신 없는 세계에 대하여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인간이 믿고 의지해 온 중심 가치를 무너뜨린 뒤에 그들은 폐허를 버려둔 채 그냥 궁리만 하고 있었다. 신의 말씀은 이제 확고부동한 진리로서가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 그리고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추락해 있었다. 나는 학기가 지나면 지날수록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신에 대하여 내가 이전에 가졌던 의심 없는 확고한 믿음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는 상실감에 마음이 조마조마 하고 겁조차 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확실한 인문학적 증거에 기초하여 학문의 높이를 쌓아가야 할 인문학 학자 지망의 대학원생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어떤 때는 기도조차 제대로 안 되는 때도 있었다. 가끔 나는 책을 읽던 도서관에서 나와 어두운 밤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들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거나 확실치 않은 깊은 상념에 잠기곤 하였다. 파스칼이 신에 대한 확신의 증거로 받아들였다는 광막한 우주의 신비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다 걷어가 버리고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성적 언어의 체계인 이론서들을 벗어나면 어느 덧 나는 나의 감정의 세계 속에서 그 동안 내가 친근하게 만났던 신을 부를 수 있었다. 설사 절실함의 강도가 조금은 약화되었다 할지라도 그의 이름은 변함없이 나에게 지극한 위로였다. 그것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면의 까다로운 절차를 뛰어넘는, 정신의 도약이나 비상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도약이나 비상이 가능한 나의 정신과 영혼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런 도약이 불가능하였다면 나는 아마 공부를 중도에 그만 두었을지도 몰랐다. 최신의 문예사조의 경향의 힘은 그만큼 강력하였고 나는 그 앞에서 강펀치를 맞고 여러 번 비틀거렸다. 그러나 내가 다시 신에로의 도약의 힘을 나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오직 신 밖에 믿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구도 교수도 그리고 그렇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나의 공부 그 자체도 내 고통의 심연에서 나를 구해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양의 어느 교수가 ‘신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마지막 안식처이다. 마침내 신 외에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쓴 글을 읽었을 때 나는 그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였고, 뛸 듯이 기쁘기조차 하였다. 나와 생각이 같은 동료를 학문이 깊은 서양의 교수들 속에서 찾아냈다는 감격이 나를 흥분시키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 교수가 계속해서 ‘신에 대한 믿음은 당연히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고 막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간의 과거와 미래 앞에 펼쳐있는 어처구니없이 “황폐하고 슬픈 시간”으로 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구제받지 못할 잔인성의 역사에 대한 유일한 위로’라고 쓴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 교수를 깊이 껴안고 싶은 강렬한 공감과 막연하지만 오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우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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