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금강경 강의

금강경 강의

(산스끄리뜨문)

성열 (지은이)
  |  
문화문고
2014-07-10
  |  
25,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인터파크 로딩중
11st 로딩중
G마켓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금강경 강의

책 정보

· 제목 : 금강경 강의 (산스끄리뜨문)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불교 > 불교 경전/법문
· ISBN : 9788977440418
· 쪽수 : 520쪽

책 소개

산스끄리뜨어로 읽는 금강경. 지금까지의 금강경 읽기는 한역으로 된 경전읽기가 주를 이루었다. 저자 성열 스님은 산스끄리뜨 원문의 이해를 위해 문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를 기반으로 가장 원초적인 금강경의 이해에 접근하였다.

목차

머리말
개정판을 쓰며
Ⅰ 일러두기
Ⅱ 산스끄리뜨표기용례
Ⅲ 산스끄리뜨 문법용어의 간략한 설명
Ⅳ 경의 이름
Ⅴ <금강경>의 한역본들
Ⅵ <금강경> 성립의 역사적 배경
Ⅶ <금강경>의 인물설정
Ⅷ <금강경>의 논증방식(論證方式)
Ⅸ 구마라집 번역본에 나타나는 즉비(卽非)의 예문들
Ⅹ 귀경문(歸敬文)
? 금강경 본문
1. 부처님의 일상생활
2. 수부띠의 질문
3. 대승보살의 기본정신
4. 베풂의 바른 자세
5. 불상(佛像)은 부처님의 형상일 뿐이다
6. 바른 믿음의 공덕
7.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
8. 깨달음은 실체가 아니다
9. 미덕은 실체가 아니다
10. 경을 통해 깨닫는다
11. 수행의 단계와 의미
12. 수행은 소득(所得)이 아니다
13. 전법의 공덕
14. 경의 이름과 수지 방법
15. 법은 말일 뿐이다
16. 불상 숭배
17. 재시와 법시의 비교
18. 이 경을 듣는 자
19. 완성이란 없다
20. 모든 관념을 벗어나라
21. 깨달음을 함께 하는 자들
22. 비난에 흔들리지 말라
23. 참된 보살
24. 마음은 의식의 흐름이다
25. 미덕을 쌓는 길
26. 부처는 육신에 달려 있지 않다
27. 법은 실체가 아니다
28. 중생의 실체는 없다
29. 선(善)은 실체가 없다
30. 여래가 제도한 중생은 없다
31. 모습이 같다고 부처님은 아니다
32. 불교는 단멸론(斷滅論)이 아니다
33. 생멸의 관념을 초월하라
34. 여래는 오고 가는 모습이 아니다
35. 말은 표현일 뿐이다
36. 있는 사실대로 직관하라
37. 설법이 끝나다
? 총결(總結)
저자 후기
▷부록◁ [우리말 금강경]

저자소개

성열 (옮긴이)    정보 더보기
현재 강남포교원장. 저자의 다른 책들로는 『고따마 붓다』(2008 불교출판문화대상), 『부처님말씀』, 『자유인 임제』(2007 문화체육관광부선정 교양도서), 『붓다 다르마』, 『금강경 강의』, 옮긴 책으로는 『불교를 위한 변명』 등이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29쪽
한문문법을 무시하고 번역어를 늘어놓은 달마급다의 번역은 오직 한문을 가지고 <금강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아 이제까지 무시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어 왔었다. 하지만 원전인 산스끄리뜨문을 통해 <금강경>을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보탬이 되는 자료는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발견할 수 있었다.

34쪽
<금강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 5백 년이 지날 즈음의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때의 시대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른 경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P.43
초기의 대승불교운동의 주체가 출가자가 아니라 재가자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출가비구들이 주체가 되었다면 지계ㆍ선정ㆍ정진이 무엇보다도 먼저 강조되었을 것이다. 출가비구를 상대로 설한 초기불교의 팔정도(八正道)에는 보시(布施)나 인욕(忍辱) 같은 것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65쪽
육성취가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어떤 불교경전도 부처님이 직접 저술하셨거나 부처님 생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고형(古型)에 속하는 경전일지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도 처음부터 문자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서력기원전 35년에서 32년 사이 스리랑카의 알-로까위하-라(?lokavih?ra)에서 처음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77~78쪽
부처님은 당시 대도시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구들은 걸식해야 했기 때문에 작은 시골마을에서는 비구들이 집단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사찰이 깊은 산속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출가자들이 걸식을 하지 않게 된 뒤의 일이다. 그러니까 ‘절은 개소리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인도불교, 즉 부처님 시대의 불교를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90쪽
아-유슈마뜨(?yu?mat)라는 말은 현대 산스끄리뜨 회화(會話)에서도 자기보다 연하(年下)의 사람을 부를 때나 상대에 대한 단순한 경칭(敬稱)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자네, 그대’ 정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승이 제자에게 ‘장로’라고 호칭하는 것이 어색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제삼자가 부처님과 수부띠의 대화형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다보니 적절하지 못한 존칭을 썼다고 하겠다.
원래 장로(長老)라는 말은 스타위라(sthavira)이므로 아-유슈마뜨(?yu?mat)를 장로라고 번역한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겠다.

97쪽
따타-가따(tath?gata)를 따타(tath?)와 가따(gata)의 합성어라 보게 되면 ‘그렇게 갔다’는 의미이니, 여거(如去)가 되고, 따타-(tath?)와 아가따(agata)의 합성어라고 보면 ‘그렇게 왔다’는 뜻이니, 여래(如來)가 된다. 여거(如去)와 여래(如來) 두 가지 의미 가운데 역경가(譯經家)들이 여래(如來)라는 말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98쪽
여래라는 말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자신을 제자들 앞에서 호칭하던 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한 이들을 모두 여래라고 통칭하지만 원래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지칭하는 말이었다.

99쪽
아르하뜨(arhat)라는 말은 불교이전시대부터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존칭을 표시하는 말이었지만 불교가 일어나면서 모든 종교인들 가운데 존경받는 수행자, 즉 성자(聖者)를 부르는 호칭이 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르하뜨(arhat)를 소승(小乘)이라고 하여 폄하하고 있지만 부처님을 부르는 호칭의 하나였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시대에는 부처님이 아라한이었다.

131쪽
불교의 특징은 아-뜨만, 즉 아(我)를 부정하는데 있다. 하지만 경에 ‘중생은 몸은 있으나 아-뜨만이 없는데도 범부들이 부질없이 아-뜨만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고 하였듯이 아-뜨만에 대한 강력한 믿음과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34쪽
부처님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단언적(斷言的)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는데, 아-뜨만이 바로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인 것이다.

173쪽
구마라집의 번역이 훌륭한 번역이었지만 때로는 원전의 내용을 생략하여 번역하거나 지나치게 의역(意譯)하였기 때문에 오해(誤解)의 여지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 때문에 원전(原典)을 통해서 공부를 해야만 그 경이 전하는 뜻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174쪽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는 더 아름답게 각색되었고,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은 이야기처럼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다. 신상(神像)을 만드는 것을 접해왔던 그리스 계통의 유민(流民)들이 자연스럽게 불상(佛像)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178쪽
불상(佛像)을 부처님이라 생각하고 그 앞에 온갖 정성을 쏟는 사람에게 불상은 하나의 형상일 뿐 부처가 아니라고 한다면 큰 충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말을 사실이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보는 것’이라 말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일 것이니 그는 이미 전생부터 부처를 만났던 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다.

189쪽
옛날 경전을 번역하는 현장에는 말을 번역하는 사람, 뜻을 번역하는 사람, 글을 부드럽게 다듬어 쓰는 사람, 범어를 고증(考證)하는 사람, 뜻을 바로잡는 사람, 중국어와 범어를 대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데, 글을 부드럽게 다듬어 쓰는 윤문가(潤文家) 가운데 구마라집의 번역장에 있었던 이가 가장 뛰어났지 않았나 생각된다.

203쪽
깨달음이란 현전(現前)하는 것을 있는 사실 그대로 보는 인식이지 어떤 물건이나 손에 잡히는 무엇이 아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이것’이라거나 ‘저것’이라 규정지어 버리면 이미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고 만다. 비유하면 산의 정상에 오르면 손에 잡히는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느끼고 보는 것이다. 손에 잡히는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 없는데도 무엇인가를 얻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큰 망상(妄想)인 것이다.

206~207쪽
오관을 통한 지각이 사실과 일치하려면 주관적 의지인 의(意)을 무화(無化)시켜야 하는데, 그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수행은 의(意)을 무화하여 무념(無念)이나 무심(無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무념이나 무심이 된 상태를 삼매(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삼매의 상태에서 지각할 때 비로소 있는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고 해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하고, 여실지견할 때 비로소 보편하고 타당하며 완벽한 지각으로 깨달음을 여는 것이다. 깨달음을 여는 지각이 보편하고 타당하며 완벽하다는 것을 더 이상 없다는 뜻에서 무상(無上)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보편과 타당은 역사의 발전과 인식의 발달에 따라 새롭게 규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깨달음은 이것이라고 정해진 틀이 없다는 것이다. 고정관념(固定觀念)이야말로 깨달음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215쪽
덕(德)이란 성숙한 인격을 말하는 것이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힐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말로 하는 설명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덕을 쌓는 사람에 무엇보다 중요한 자세는 자신이 쌓은 덕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305쪽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며, 마음속에 일체의 분별이나 선입견 등 고정관념을 없애게 되었다는 것이며,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듯 솟아오르는 분별이나 선입견 등을 없애버리게 되어 더 이상 번민하거나 갈등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심리상태를 니르와-나 즉 열반(涅槃)이라 말한다.

450쪽
깨달음의 경지는 일체 인과의 사슬에서 초월한다. 부처가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과응보의 원리를 믿고 선행을 열심히 한다는 것과 깨달음을 얻어 인과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