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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79736250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4-05-17
책 소개
목차
바다로 들어가는 말
1부
문학 속 바다-이미지를 캐내는 네 가지 방식
바다에서 길을 묻다/『모비딕』
노수부는 취한 배를 타고 항해한다/『노수부의 노래』, 「취한 배」
차라투스트라는 바다를 이렇게 말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로빈슨 크루소, 방드르디 그리고 포의 바다/『로빈슨 크루소』,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포』
물 위에 드러누운 개츠비/『위대한 개츠비』
위고, 바다에 빠져서 웃는 남자/『바다의 노동자』, 『웃는 남자』
파우스트, 바닷속 심연으로 가다/『파우스트』, 『마의 산』, 『파우스트 박사』
2부
셰익스피어의 바다는 폭풍이 지배한다/『템페스트』, 『오셀로』, 『리어왕』, 『햄릿』, 『맥베스』, 『어떤 태풍』
콘라드, 구원의 항해에 나서다/『로드 짐』, 『청춘』, 『태풍』, 『은밀한 동거인』,『나르시스호의 검둥이』, 『어둠의 속』, 『구난』
버지니아 울프는 바다로 갔다/『항해』,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소리와 분노는 다리 아래 물-그림자를 드리운다/『소리와 분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오뒷세우스, 지중해를 떠돌다/『오뒷세이아』, 『오메로스』, 『오디세이아』
메데이아, 아르고호의 키를 잡다/『메데이아』, 『아르고호의 이야기』, 『프란츠 그릴파르처의 메데이아』,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율리시즈, 어머니 바다를 항해하다/『율리시즈』
남녁 바다는 핏빛이다/『새터말 사람들』, 『바다가 푸르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늑대의 바다』, 『갯비나리』, 『불의 딸』, 『키조개』, 『흑산도 하늘길』, 『연꽃바다』
3부
피터 팬은 해적이다/『피터 팬』
피노키오와 요나의 삼켜진 바다/『피노키오』, 「석양에 등을 지고 그림자를 밟다」
보물섬과 산호섬에는 파리대왕이 산다/『파리대왕』, 『보물섬』, 『산호섬』
멕베스의 바다는 불온하다/『맥베스』
박쥐-돼지꼬리-고래의 기괴한 항해/『카르마 폴리스』, 『백년 동안의 고독』, 『고래』
바다에서는 아래로 날아야 한다/『공기와 꿈』, 『악의 꽃』, 『갈매기의 꿈』, 『소용돌이 속으로의 추락』
바다는 구멍이 있어 매끄럽다/『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도의 바다-하기/『파도』
저자소개
책속에서
문학 속 바다-이미지를 캐내는 네 가지 방식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 카프카, 『카프카의 편지』에서
허먼 멜빌의 『모비딕』 3장에 등장하는 ‘물보라 여인숙’ 현관 벽에는 윌리엄 터너의 그림 <Whalers(1845)>가 걸려있다. 이 그림을 보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금방이라도 ‘휠’듯해서 불길한 ‘검은 덩어리(black mass)’에 주목했는가, 아니면 ‘흰(결코 색의 일종이라고 할 수 없는)’의 농담(濃淡, gradation)에 이끌렸는가? 흐릿하게 푸른 직선들의 ‘힘’을 느꼈는가? 아니면 그냥 ‘축축하고 물컹하고 질퍽한 그림’이었는가?
『모비딕』은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맨해튼 섬 끝단에 가서 바다에 대한 몽상(reveries)에 잠긴다. 바슐라르의 명상(meditation)은 물과 쉽게 결합한다. 터너와 모네의 바다-그림들 속에서는 “자연의 네 원소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멜빌은 사람들을 바다로 끌어들이는 나침반의 자력 같은 바다-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모비딕』을 썼다. 바다 건너편이 궁금해서건, 자신의 모습을 거기 비춰보려고 했건, 그냥 눈언저리가 흐릿해져서건, 이런저런 사유로 사람들은 바닷가로 모여든다. 그렇지만 거대한 유령, 고래를 쫓아 바닷속으로 뛰어든 사람은 에이해브 이전에는 없었다. 이스마엘조차도 신의 분노로 험악해진 바다를 건너면 구원의 해변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스스로를 당당하게 소외시킬 수 있는 고독한 자만이 바다로 투신할 수 있다. 당신도 멜빌이 그려 낸 바다-그림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모비딕-되기’를 몸소 실천해보기 바란다.
에이해브는 처음부터 신드바드가 아니었다. 무인도에 표착하더라도 구차스럽게 로빈슨 크루소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로드 짐처럼 자신을 회복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늘그막에 생을 관조하는 산티아고나 회개하여 구원받으려고 했던 노수부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질리아가 노동을 통해서 바다에 대항하려고 했다면, 에이해브는 바다를 직접 공격한 사람이다. 그는 인류 역사의 또 하나의 무대였던 바다의 표면을 항해하기 위해 고래잡이로 따라나선 일반 선원(비록 그는 일등 항해사였지만) 이스마엘과는 달랐다. 파도를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 바다 위를 걸어야만 했던 예수도 아니었다. 에이해브가 바다의 심연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고래의 색깔이 희다는 사실이 그를 몸서리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림 중앙의 검은 덩어리에서 시작된 빛들이 물보라로 솟구쳐 하늘까지 닿고 다시 돛으로 달릴 때, 모든 것은 ‘어렴풋하게 보인다.’ 그 모든 것의 바탕에 자리한 거대한 힘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의 공포야말로 터너가 위의 그림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바다의 이미지일 것이다.
문학 속에 나타난 바다의 이미지를 캐내고자 하는 이 글을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림 한 장으로 시작하였다. 근원적 형상을 의미하는 에이도스(이데아의 가시적 형상)도 아니고, 이 에이도스를 모방한 에이콘도 아닌, 그 에이콘을 닮은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로 시작한 셈이다. 터너의 그림을 전면에 내세우는 행위는 본질적 실체와 그것의 이미지의 위계를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진부한 세계관을 전복하겠다는 멜빌의 의지 표명으로 이해해야 한다. 『모비딕』을 읽는 독자들은 이미 터너의 그림 한 장에 칼에 찔린 것 같은 감정의 격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가 전달하는 에너지를 통해 당신에게 이미 모종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지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역능(puissance)이다. 문학 이미지는 독자로 하여금 하나의 우주에서 또 다른 우주로 넘어가도록 하는데 충분한 힘을 가진 폭탄이라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운동-이미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글(『이미지와 기억』, 김병선, 195~196쪽)을 여기 소개한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은 결국 보편적으로 변하고 물결치는 것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들, 즉 나의 몸, 나의 두뇌, 나의 눈과 내가 감각하는 모든 것이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이미지라면 어떤 이미지도 내부에 이미지를 포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부 이미지가 나에게 작용해 운동을 전달하면 나는 ‘머뭇거림’ 속에서 그 운동을 재구성한다. 나 자신이 이미지라면, 다시 말해 운동이라면 나 자신, 나의 눈, 나의 두뇌, 몸은 끊임없이 재생되는 지속일 것이다. 거기에는 축도, 중심도, 좌우도, 상하도 없다. 이에 따라 들뢰즈는 모든 이미지가 무한한 집합을 통해 ‘내재성의 평면’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작용과 반작용을 주고받으며 변하는 것이 베르그손이 말하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미지는 운동과 동일한 것이 된다.
이미지는 또 하나의 사물, 매개물, 즉 흔적으로서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이자 과정이다. 기억을 불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원적 떨림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이제부터 들뢰즈의 운동-이미지 개념을 차용하고자 한다.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바다의 이미지들이 작동하는 기제를 밝혀내기 위해서 ‘바다-이미지’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려 한다. 해양문학은 해양을 대상으로 하거나 주제로 삼거나 해양 체험을 소재로 한 문학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2019년 해양문학상 심사를 맡았던 소설가 문성수는 “대부분의 작품이 바다를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 안에 ‘바다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바다성’을 포착해낼 수 있는 힘을 갖춘 것이 바다-이미지라고 전제하고 이 글을 풀어나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