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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79735949
· 쪽수 : 184쪽
· 출판일 : 2022-12-15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눈물을 기억하는 법
이소회
비/후안 헬만
사진을 본다/아담 자가예프스키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세사르 바예호
살아 움직이는 동사/하리 가루바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세사르 바예호
자선병원의 하얀 병실에서/베르톨트 브레히트
박쥐가 만약/마흐무드 잘랄렛딘 루미
송우정
이중주/바오긴 락그와수렌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포루그 파로흐자드
묘비명/후안 헬만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아담 자가예프스키
통증/두르가 랄 쉬레스타
인간에 관하여/마흐무드 다르위시
풀잎/마흐무드 잘랄렛딘 루미
정기남
침묵/오시프 만델슈탐
폭풍우/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씨앗가게/마흐무드 잘랄렛딘 루미
밤바다/마흐무드 잘랄렛딘 루미
난 하고 싶은 말을 잊었다/오시프 만델슈탐
소리와 침묵/코피 아니도호
말들/옥타비오 파스
강미혜
LXXV/세사르 바예호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세사르 바예호
금요일/포루그 파로흐자드
집의 주인/하리 가루바
영혼을 휘젓는 비/하리 가루바
새는 한낱 새일 뿐/포루그 파로흐자드
여인숙/마흐무드 잘랄렛딘 루미
이현
나, 당신을 고향에 모시러 왔나이다/다이아나 퍼러스
북소리/마흐무드 잘랄렛딘 루미
확신/후안 헬만
고요/바오긴 락그와수렌
욕심을 채우기 위해/마흐무드 잘랄렛딘 루미
숨결/오시프 만델슈탐
시를 쓴다는 것/아담 자가예프스키
김수우
선물/포루그 파로흐자드
우리가 하는 게임/후안 헬만
비교하지 마라/오시프 만델슈탐
일용할 양식/세사르 바예호
이름 짓는 날/하리 가루바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이아나 퍼러스
소박한 노래 XXXVII/호세 마르티
오솔길 안에는 아직도 오솔길이/마흐무드 다르위시
씨를 묻고 덮어라/마흐무드 잘랄렛딘 루미
비서구 시인의 약력
함께 읽은 시집 목록
저자소개
책속에서
[책머리에]
비서구 시집읽기는 식민지배를 당했던 지역들의 오래된 근원을 다시 기억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시인들은 폭력과 억압 속에서 무엇을 읽었던가. 무엇을 쓰고, 무엇을 공유하고자 했던가. 우리가 배운 세계문학은 제국주의 문학이었다. 우리 내면 속에 생성된 제국주의는, 유럽문학, 영미문학 중심의 시선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문학, 팔레스타인 문학, 하다못해 가까운 동아시아의 문학조차 잘 모르고 있다.
그들은 고향을 상실했고, 디아스포라적인 고통 가운데서 시를 발견했다. 고통을 통해서 사유를 발견하고, 사유를 통해서 언어를 발견하고, 언어를 통해 은유를, 은유를 통해 시를 발견하고, 시를 통해서 그들은 행동했다. 그들의 분노와 절망, 그들의 연민과 희망을 따라가는 2년 동안, 우리는 절실했고 따뜻해졌다.
그래서 이 시 에세이집을 엮는다. 우리 안에 치유해야 할 새로운 시선을 위해,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그 모든 상처를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공감의 상상력을 입은 새로운 미래를 찾아가기 위해. 이 소박한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 영혼들을 향해 갈 수 있을까. 이 땅 위의 숨은 눈물을 기억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비/후안 헬만
오늘 비가 많이, 많이 내려,
꼭 세상을 씻어 내리는 것 같군.
옆의 내 이웃은 비를 바라보다가
사랑의 편지 쓸 생각을 한다/
그와 함께 살고
밥해 주고 빨래해 주고 사랑을 나눠 주고
그래서 자기 그림자를 닮은 여자에게 편지 한 장/
내 이웃은 여자에게 사랑의 말 한 번 한 적 없다/
창문으로 집에 들어가고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보통들 많은 곳에 문으로 들어가지/
일터에, 사령부에, 감옥에,
세상 모든 건물에/
하지만 세상으로도/
여자에게도/ 영혼에게도 그러질 않아/
그러니까/ 그 관(棺)에도 혹은 배에도 혹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빗줄기 속으로도 말이야/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면/
사랑이라는 말을 쓰기가 힘들어/
왜냐하면 사랑과 사랑이라는 말은 별개의 것이고/
이 둘이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만나는지는/
오로지 영혼만이 알고 있거든/
하지만 그 영혼이 뭘 설명할 수 있겠어/
그래서 내 이웃 입속에는 태풍이 불고 있지/
난파당한 말(語)들/
사랑을 나눈 그 하룻밤에 나고 죽어 해드는 날을 모르는 말들/
그래서 내 이웃은 절대 쓰지 않을/
편지를 생각 속에만 남기는 말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두 송이 장미 사이의 침묵처럼/
비를 바라보는 내 이웃에게로/
비에게로/
떠도는 내 마음에게로 돌아가려고 이 말을 쓰는 나처럼/
―[새 한 마리 내 안에 살았지]에서
시 속에 있는 빗금들이 마치 빗줄기 같다. 빗줄기 사이로, 빗소리 사이로 시인(혹은 시적 주체)의 목소리가 끊어지다 이어진다. 듣다가 생각하다가 다시 듣는다. 비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장막 역할을 해서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좀 더 머물게 한다. 생각이 안으로 고인다. 닿지 않는 것들이 아련히 멀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세상을 씻어 내리는 것 같”은 비 덕분에 그동안 닿지 못했던 것에 갑자기 닿기도 한다.
그래서 이웃은 빗속에서 사랑의 편지를 쓴다. 하지만 그 말들은 분명 실패할 것이다. 그는, 수많은 공간에 문을 통해 들어가지만 정작 중요한 장소들에는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곤 하는 우리와 닮아있다. 그는 “여자에게 사랑의 말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여자도 좋아하리라 생각하며 건넸을 것이다. 시답잖은 농담이나 친근함에서 나오는 퉁명스런 말투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사랑이나 세상, 영혼, 또는 마음, 죽음(棺)에게도 그렇게 한다.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빗줄기 속으로” 못 들어가는 것처럼, 돌아가거나 피해가거나 알면서 모른 체한다.
물론 올바른 문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몹시 어렵다. “왜냐하면 사랑과 사랑이라는 말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을 나눈 그 하룻밤에 나고 죽어”버리고 ‘사랑이라는 말’은 빛을 잃은 채 메말라 있다. 시인은 말이 지시하는 것과 일치하는 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언제나 실패하겠지만 이웃에게로, 비에게로, 그리고 “떠도는 내 마음에게로 돌아가려고 이 말을 쓰는” 시인처럼 불가능한 시도 속에서 비로소 우리도 어떤 찰나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