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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80104567
· 쪽수 : 424쪽
책 소개
목차
서문 기복 많은 삶의 여정에 대한 찬사 _ 론 네슨 (전 NBC 기자, 제럴드 포드 전 미국 대통령 대변인)
프롤로그 대나무 같은 마음
01. 영국 공주, 영희(英姬)
02. 빼앗긴 땅에 자라는 대나무
03. 나가이 에이키
04. 거대한 용이라는 이름의 아버지
05. 여자의 머리카락에는 삶이 있다
06. 클럽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다
07. 대박이 터진 첫 무대
08. 전쟁, 헤로인, 레즈비언 그리고 폐결핵
09. 깊어가는 밤의 빛과 그늘
10. 여자가 되는 것이 즐거워?
11. 신디, 동남아 순회공연을 떠나다!
12. 천국을 넘어, 사선을 넘어
13. 쇼핑 천국 홍콩으로
14. 사이공에서 운명의 남자를 만나다
15. 저는 결혼이 아주 겁이 납니다
16. 결혼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17.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차이
18. 지상 최대의 선물, 에드워드
19. 영희, 백악관 공식 만찬에 가다
20. 어항 속에 갇힌 여자들
21. 올해의 운세
22. 길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
23. 달을 향해 쏘아라
24. 여자의 집은 성이다
25. 어머니의 장례식
감사의 글 꿈을 꿀 수 있다면 이룰 수도 있다
책속에서
새해가 되면 학생들은 모두 새해 의식에 참여하러 학교에 가야했다. 우리는 얼어붙을 듯이 추운 날에 학교 운동장에 서서, 교장이 밖으로 나와 천황이라 불리는 일왕으로부터 받은 특별 전문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그 시간은 언제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루했다. 교장은 검은 상자를 두 손으로 눈높이까지 들고 학교 건물 안에서 바깥의 연단까지 행진했다. 그동안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교장은 그 상자를 감싸고 있는 두루마리를 걷어내고 함을 열어 큰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몰랐고 오로지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우리는 내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일본 천황은 천국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전문을 낭독하는 동안 감히 고개를 들면 안 된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나는 그 일왕 히로히토를 백악관 영접실에서 만났다. 히로히토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콧수염이 있는 모습으로 꼭두각시처럼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나만큼이나 키가 작았다. 그는 몸은 그곳에 있어도 마음은 멀리 다른 곳에 있는 듯 보였다. 그 작고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을 수 있었을까?
- 03. 나가이에이키 중에서
마을은 원시적이긴 했으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마을 여자들은 저녁밥을 지었고, 굴뚝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연 꼬리처럼 피어올랐다. 하늘은 노을로 붉게 물들었고, 세 개의 산봉우리 위에는 구름이 어지러이 걸려있었다. 풀을 베고 돌아오는 소의 청아한 워낭 소리를 들으며 그 그림 같은 풍경을 한가로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이렇게 평온한 마을 곁의 어딘가에서 그토록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선뜻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시장이나 가게, 목욕탕도 없었다. 병원도 없었고 차도 없었다. 무엇보다 노래와 춤이 없었다. 점점 초가들과 끝없이 펼쳐진 논밭에 넌더리가 나기 시작했다. 마을을 걸어 다니는 것도 싫었고, 해가 뜨기 전부터 해가 진 후까지 논이며 들에서 몸을 숙이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거무튀튀한 얼굴들, 계속 빨아서 해지고 바란 한복을 보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 05. 여자의 머리카락에는 삶이 있다 중에서
아기가 태어나고 몇 달 후, 어머니는 어디로 가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 버리셨다. 그날 밤 아기는 젖을 달라고 내내 보챘다. 어머니는 어디로 가신 것일까? 나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툇마루에서 아기를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가능한 한 부드럽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래도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나는 아기에게 무엇을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아기는 밤새 울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아기를 등에 업고 재우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울어댔다. 팔로 안아 이리저리 흔들어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나는 솜뭉치 조각에 약간의 물을 적셔 아기의 입에 가져가 보았다. 아기는 그 솜뭉치를 빨려고 하다가 곧 더 크게 울어댔다. 아기는 내가 자기를 속이려고 한 것에 화가 난 듯 더욱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나는 당황한데다 마음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웃옷을 올리고 내 젖꼭지를 물려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이 소용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 나는 이웃 여자가 최근 아기를 낳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 진아야, 조금만 참아.
나는 아기에게 속삭였다.
- 닭이 울 때까지만 기다려. 아침이 오면 젖을 얻으러 갈 수 있어.
하늘이 밝아오고 수탉이 울자, 나는 진아를 이웃집에 데려갔다. 진아가 급하게 젖을 삼키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진아가 그 여자의 커다란 가슴 위에서 숨이 막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내 어머니가 처마 끝에 새들만도 못한 행동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새들은 먹이를 달라고 계속 보채는 새끼들에게 벌레를 물어다주며 스스로 날아갈 수 있을 때까지 돌봐주었는데.
해가지면 나는 어린 진아를 등에 업고 다리를 지나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버스가 도착하면 어머니의 얼굴을 찾으려고 버스 안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버스에서는 낯선 사람들만 내렸고 나와 눈을 마주쳐주는 이조차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버스가 한바탕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고 나면 나는 내 안에 무언가가 사라진 듯 공허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 05. 여자의 머리카락에는 삶이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