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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80389490
· 쪽수 : 216쪽
· 출판일 : 2024-05-25
책 소개
목차
나의 생일
극장
죽음의 침상에 대한 기록
쫑긋한 귀
수난곡
세 노인과 세 마리의 고양이
나는 삽살개
책속에서
…………
그렇게 저렇게 우리는 싱거운 수다를 마냥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주 잠깐 우리의 대화가 끊겼을 때, 북방하늘다람쥐가 “저기, 큰고양이님, 다시 또 들어볼까요?”하고 내게 물었다.
“그래, 좋아.”
조용한 서곡. 조금 불안한 음계. 그리고 또 그 코러스.
주여, 우리의 통치자시여,
온 땅에 그 명성이 드높으신 분이시여!
북방하늘다람쥐는 가느다란 바늘의 떨림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의 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그 어느 때에나…….
나의 각설탕은 겨우겨우 녹아들어서 마치 침전물처럼 찻잔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빗방울의 흐름을 따라 흙먼지가 들러붙어 있는 창으로 부드러운 빛이 비껴들어, 그 빛살이 검은 음반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그 빛살 너머로 북방하늘다람쥐의 모습이 엷은 베일을 드리운 양 부옇게 일렁였다.
살며시 졸음이 밀려들었다.
“……듣고 싶다…….”
“……어? ……아, 그래…….”
“……큰……고양……님, 차…….”
“……어? ……아, 그러네…….”
그 무렵부터 나는 누군가를 만날라치면, 아니 문득문득 생각이 떠오를 때면 북방하늘다람쥐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수난곡의 음반을 혹여 소장하고 있지는 않는지, 아니 아니 애당초 그것을 소장하고 있을 리 만무한 이들이기에 어딘가 그 음반이 있을 만한 곳은 없는지를 묻고 다녔다.
먼저 가까이에 사는 시궁쥐는 “누가 재난을 당했다고요?”하고서, 도리어 나에게 되물어 왔다.
“그야, 모름지기 예수 그리스도이시지.”
“그럼 그리스도가 지은 곡이겠군요. 나야 알 리가 없죠.”
도대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뿐이었다.
다음으로 그 하얗고 작은 심술꾸러기 고양이에게도 일단 물어보기는 했다. 어차피 별다른 수확이 없으리라는 걸 익히 알면서도 말이다.
잠자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구나 싶었는데, 예의 심술꾸러기 고양이는 “……바흐? ……바아보? ……바보?”하고 내뱉고는 골목께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일을 몇 차례 되풀이하듯 겪고 나서,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이들에게 이러한 물음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이 부근에서 유일하게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안다는 고양이를 만나러 갔다.
…………
마침내 짧은 여름이 끝나 버렸다.
(수난곡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