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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어린이 > 초등 한국사
· ISBN : 9788983894915
· 쪽수 : 215쪽
· 출판일 : 2012-01-25
책 소개
목차
1) 광개토 태왕, 대륙을 호령하다
2) 백제, 고구려, 신라가 한강 쟁탈전을 벌인 연유
3)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4) 김유신, 낭비성 전투에서 이름을 비로소 알리다
5) 연개소문, 쿠데타를 일으키다
6)계백, 황산벌에서 죽음으로 맞서다
7) 원효, 해골을 보고 깨우침을 얻다
8) 고구려는 왜 멸망했나?
9)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
10) 장보고, 바다를 지배하다
11) 최치원, 뛰어난 글솜씨로 황소를 꾸짖다
12) 신라 경순왕, 고려에 나라를 넘기다
13) 왕건, 호족에게 성씨를 상으로 주다
14) 왕건이 불교를 권장한 이유
15) 광종, 과거 제도를 과감히 실시하다
16) 서희, 거란 침입을 지혜로운 말솜씨로 물리치다
17) 강감찬, 기발한 흥화진 전투와 구주 대첩
18) 윤관, 별무반을 조직하여 9성을 쌓다
19) 묘청, 도읍을 옮기자며 반란을 일으키다
20) 정중부, 반란을 일으켜 무신 정권을 세우다
21) 이규보, 장편 시 <동명왕편>을 짓다
22) 최충헌, 비둘기 때문에 암살에 나서다
23) 노비 만적, 신분 제도에 반기를 들다
24) 고려, 몽골의 거듭된 침략을 물리치다
25) 삼별초, 최후까지 몽골에 항쟁하다
26) 최무선, 화약을 발명하다
27)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 활자 책을 발행하다
28) 이성계, 위화도 회군 후 권력을 잡다
29) 정몽주, 피 흘리며 죽은 자리에 대나무 솟아나다
30) 정도전, 한양 천도를 이끌다
31) 김종서, 6진 개척하여 두만강까지 국토 넓히다
32) 세종 대왕,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33) 계유정난과 이징옥의 난
34) 남이, 억울하게 죽어 장군신이 되다
35) 조광조, 깨끗한 정치를 추진하다 좌절하다
36) 주세붕, 백운동 서원을 세워 성리학을 퍼뜨리다
37) 의적으로 이름을 떨친 임꺽정
38) 200년 동안 해결 못한 문제, 선행 덕분에 풀리다
39) 이순신,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다
40) 권율,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다
41) 담배, 소리 없이 조선에 퍼지다
42) 병자호란과 삼전도 굴욕
43) 효종, 북벌을 추진하다
44) 상평통보, 돈의 위력을 떨치다
45) 사도 세자, 뒤주에 갇혀 죽다
46) 김병연, 삿갓을 쓴 채 전국 떠돌게 된 사연
47) 한국 최초의 가톨릭 신부 김대건 순교
48) 최제우, 서학에 반발하여 동학을 창시하다
49) 구식 군대 군인들이 일으킨 봉기, 임오군란
50) 태극기를 처음으로 내걸다
51) 한국과 미국의 우호적인 시대를 연 보빙사절단
52)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
53) ‘삼일천하’라는 말을 낳은 갑신정변
54)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다
55) 처절한 비극, 명성 황후 시해 사건
56) 백성의 울분을 유발한 단발령
57) 국왕이 교자 타고 궁궐을 탈출한 아관 파천
58) 조선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바꾸다
59) 전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소통의 시대를 열다
60) 대한 제국,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다
61) 금연 아이디어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
62) 신작로, 물자 수송의 빠른 길을 트다
63)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 밀사
64) 안중근 장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다
65)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경술국치일
66) 1919년은 임정이 수립된 대한민국 건국 원년
67) 김좌진,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68)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날 제정하다
69) 이봉창, 일본 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다
70) 윤봉길, 일본군 지휘부를 초토화시키다
71) 안익태, 애국가를 발표하다
72) 8·15 광복 혹은 해방
73) 민족 반역자 처벌을 시도하다
74) 남북 분단 시대를 맞이하다
75) 민족적 비극 6·25 전쟁 일어나다
76) 독도 의용 수비대, 독도를 지키다
77) 학생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4·19 혁명
리뷰
책속에서
“너희는 절대로 벼슬을 탐내어 서로 다투지 마라. 서로 반목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
서기 665년, 연개소문이 죽기 전에 아들 삼 형제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연개소문에게는 남생(男生), 남건(男建), 남산(男産)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사이가 나쁨을 잘 알기에 위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남생은 대막리지가 되어 고구려의 실질적 통치자로 나섰습니다. 그러자 고위직에 있던 둘째 남건이 그런 형을 질투하며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나도 최고 권력자가 되고 싶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남생이 지방을 둘러보러 성을 비운 사이, 남건이 일을 벌였습니다. 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이 대막리지로 올라선 것입니다. 지방에서 그 소식을 들은 남생은 크게 분노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했습니다. 곧바로 당나라에 항복했거든요.
“잘 왔소이다.”
당나라 정부는 남생을 환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 감히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는데 그의 맏아들이 자진하여 항복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는 남생을 통해 고구려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연개소문도 없고, 권력 다툼에 빠진 고구려를 칠 기회다!”
666년 12월에 당나라는 제3차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습니다. 남생은 동생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기꺼이 고구려 정벌의 앞잡이로 나섰습니다. 조국에 대한 반역이었지만 남생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당나라는 이듬해 신라에게 연락해서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신라 김유신 장군은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공격에 나섰습니다.
고구려는 여전히 강한 나라였지만 연개소문이 통치할 당시만큼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당나라와 신라의 100만 대군이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해오자 상대하기 벅찼습니다. 고구려의 여러 성이 차례로 무너지고 668년 7월에는 평양성이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포위되었습니다. 고구려는 한 달이 넘도록 평양성을 굳게 지켰습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보기에 평양성 공략은 쉽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평양성은 안에서 금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 지도부가 두 가지 의견으로 갈라져 대립했으니까요.
“끝까지 싸워 저놈들을 물리쳐야 한다!”
“병력이 너무 부족하니 항복하는 게 낫습니다.”
남건은 계속 맞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동생 남산은 일단 항복한 뒤 재기할 기회를 엿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차례 대화해도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각자 알아서 처신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내가 나가서 협상을 해 보겠습니다.”
남산은 성 밖으로 나가서 당나라에 화해를 청했습니다. 당나라는 화해의 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구려를 더욱 얕잡아 보았습니다. 성안에 있는 대부분의 고구려 사람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여전히 맞싸우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은 싸울 의욕을 잃고 자기 살길을 찾았습니다.
“적군이다!”
9월 26일 새벽, 평양성 성문으로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적군과 내통한 누군가가 성문을 열어 준 것입니다. 성안 곳곳에서 피 튀기는 살벌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고구려의 운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드디어 평양성을 점령했노라!”
그날 고구려는 멸망했습니다. 고구려 국왕을 비롯해 남건과 남산 형제, 수많은 대신과 장수 그리고 백성 등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포로가 되어 당나라 장안성으로 끌려갔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연개소문의 족벌 정치입니다. 능력에 상관없이 세 아들을 고위직에 임명함으로써 유능한 사람들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세 아들은 서로 다투기만 하다 나라를 망하게 했으니까요. 어쨌든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우리나라의 영토는 한반도로 좁아졌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 '고구려는 왜 멸망했나' 중에서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분산 정책을 펼쳤습니다. 고구려인이 뭉쳐서 다시 도전해 올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정부는 고구려인 3만여 가구를 요하(遼河) 서쪽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대조영(大祚榮, ?~719) 가족도 거기에 끼여 있었습니다. 대조영은 속으로 결심했습니다.
‘분하다. 하지만 반드시 고구려인의 강한 기질을 보여 줄 거야.’
당시 요하 서쪽 지방에는 거란족이 당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거란족도 당나라에게 불만을 가졌습니다. 서기 696년,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민심이 더 나빠지자 거란족 추장 이진충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해 10월 당나라는 토벌군을 보내어 이진충을 죽였지만, 다른 거란족 추장이 반항을 계속하며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가 온통 시끄러워졌습니다.
“지금이 기회다!”
대조영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고구려인을 모은 후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고구려의 옛 영토로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당나라는 군대를 보내 그 뒤를 쫓았습니다. 말갈족이 먼저 당나라 군대와 싸웠고 그 과정에서 걸사비우가 죽었습니다.
“우리도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살아남은 말갈족 사람들이 대조영의 이동에 참가했습니다. 대조영은 쫓아오는 당나라 군대를 격파할 묘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천문령(天門嶺) 산악 지대로 유인한 다음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지도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대패한 당나라 군대는 거기서 물러났고, 대조영은 699년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동모산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한 다음 나라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국호를 ‘진(震)’이라고 했으나 나중에 ‘발해(渤海)’로 고쳤습니다. 이후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이라 불리며 200여 년 동안 번성했습니다.
- '대조영, 발해를 세우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