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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액션/스릴러소설 > 외국 액션/스릴러소설
· ISBN : 9788984374904
· 쪽수 : 440쪽
· 출판일 : 2024-08-20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이 세상에서 아주 작은 흔적 하나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려면 얼마나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뭔가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사라지기 직전 전화 한 통, 가벼운 접촉 사고, 취소된 항공편, 마지막 순간의 행선지 변경 등등. 아주 작은 실마리, 이를테면 송곳이 겨우 들어갈 만한 틈새 하나면 모든 비밀을 풀기에 충분하다.
수증기로 뿌옇게 흐려진 유리창 너머로 검은색 타운카가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뒷좌석에 함께 앉아 있던 누군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리더니 종종걸음을 치며 공항으로 들어선다. 바로 그 순간 나와 몸이 밀착되며 여자가 입은 분홍색 캐시미어 스웨터가 내 팔에 스친다. 여자는 마치 어디선가 주먹이
날아올 거라 예견한 사람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다. 나는 여자가 멀찌감치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쉰다.
이제 시작이다. 나는 가방 어깨끈을 당겨 메고 여자가 줄을 서려고 걸어가는 보안 검색대를 향해 간다. 도망자들은 늘 앞쪽이 아니라 뒤쪽에 신경 쓰기 마련이다. 여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겠지만 이제 곧 사라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한 줄기 연기처럼 차츰 옅어지다가 끝내 사라질 것이다.
“미리부터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지금은 미투 시대야. 미국 사람들 대다수가 네 말을 믿어주고 적극 지지해줄 거야. 《폭스》나 《CNN》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할 거야. 그 기회를 이용해 수시로 구타를 당하면서 살아온 결혼 생활을 청산하려 한다고 털어놓는 거야. 여론이 들끓으면 아무리 막강한 로리라도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어.”
나는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나도 한때 공개 석상에서 로리의 폭력 행위를 알려 비등해진 여론을 등에 업고 이혼을 밀어 붙여볼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 하지만 과연 내가 쿡 가문 사람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 소송만으로도 최소한 몇 년은 걸릴 테고, 온갖 구설수가 난무하겠지. 아마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미쳐버릴지도 몰라. 설령 승소한다고 해도 내 인생은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겠지. 나는 그저 자유를 원할 뿐이야. 남편으로부터의 자유.”
로리와 친해질 수 있다면 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볼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쿡 가문에 들어와 사는 동안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칙이 여전히 진리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마조리 쿡은 협상력이 탁월한 인물로 유명했다. 그녀가 협상에 나서면 완고하고 보수적인 상원의원들도 마음을 바꾸고 협조하기 일쑤였다. 힐러리 클린턴이나 제럴딘 페라로보다 훨씬 앞서 대통령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마조리 쿡은 로리가 대학 1학년 생일 때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은 로리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 구멍은 불안한 심리와 딱히 대상이 불분명한 원망으로 채워졌다.
“기자회견과 관련된 내용을 나에게 전혀 안 알려줬잖아.” 나는 퇴근을 앞두고 책상 정리에 열중하는 브루스에게 말한다. 브루스는 펜은 서랍에, 노트북은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가며 일언반구 대꾸가 없다.
브루스가 퇴근하자 로리는 의자에 기대앉으며 다리를 꼰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좋았어.” 나는 왼발을 까딱거린다. 내 불안한 심리가 은연중 드러나는 행동이다. 그 모습을 본 로리의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간다. 나는 왼발 뒤꿈치에 힘을 주어 가까스로 다리가 까딱거리지 않도록 한다.
“센터 스트리트 리터러시에 갔었어?” 로리가 묻는다. 타이가 그의 목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다. 나는 한때 사랑했던 남자를 바라본다. 로리의 눈가 주름은 우리가 한때 행복한 웃음을 나눈 흔적이다. 하지만 로리의 눈은 자주 분노를 담은 눈이 되고 있다. 로리의 음험하고 폭력적인 모습은 내가 한때 그에게서 느꼈
던 호감을 지워버렸다.
“8개월 후에 기금 마련 파티를 열기로 했어. 다니엘이 녹취록을 작성해 내일 당신에게 보여줄 거야. 난 올해 열리는 입찰식 경매의 진행을 맡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