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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중국문화
· ISBN : 9788984455931
· 쪽수 : 356쪽
· 출판일 : 2014-11-10
책 소개
목차
001 가도사벽(家徒四壁)
002 건곤일척(乾坤一擲)
003 견리망의(見利忘義)
004 견벽청야(堅壁淸野)
005 경궁지조(驚弓之鳥)
006 고산유수(高山流水)
007 과전이하(瓜田李下)
008 구밀복검(口蜜腹劍)
009 귀마방우(歸馬放牛)
010 금상첨화(錦上添花)
011 금석위개(金石爲開)
012 기세도명(欺世盜名)
013 기인우천(杞人憂天)
014 기화가거(奇貨可居)
015 남가일몽(南柯一夢)
016 녹사수수(鹿死誰手)
017 대공무사(大公無私)
018 대기만성(大器晩成)
019 대성질호(大聲疾呼)
020 대의멸친(大義滅親)
021 도탄지고(塗炭之苦)
022 도행역시(倒行逆施)
023 동심동덕(同心同德)
024 득의망형(得意忘形)
025 소제대작(小題大作)
026 명철보신(明哲保身)
027 모수자천(毛遂自薦)
028 모야무지(暮夜無知)
029 목불견첩(目不見睫)
030 목인석심(木人石心)
031 무가지보(無價之寶)
032 문가라작(門可羅雀)
033 문경지교(刎頸之交)
034 문정약시(門庭若市)
035 반면지교(半面之交)
036 백락상마(伯樂相馬)
037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038 백발백중(百發百中)
039 복수난수(覆水難收)
040 봉공수법(奉公守法)
041 부지소조(不知所措)
042 부형청죄(負荊請罪)
043 불가구약(不可救藥)
044 사공견관(司空見慣)
045 사면초가(四面楚歌)
046 삼고모려(三顧茅廬)
047 상가지구(喪家之狗)
048 상행하효(上行下效)
049 세여파죽(勢如破竹)
050 순망치한(脣亡齒寒)
051 신기묘산(神機妙算)
052 약법삼장(約法三章)
053 양질호피(羊質虎皮)
054 연목구어(緣木求魚)
055 와신상담(臥薪嘗膽)
056 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
057 위편삼절(韋編三絶)
058 유방백세(流芳百世)
059 유비무환(有備無患)
060 유지경성(有志竟成)
061 이이제이(以夷制夷)
062 인사유명(人死留名)
063 일망타진(一網打盡)
064 일명경인(一鳴驚人)
065 일모도궁(日暮途窮)
066 일락천금(一諾千金)
067 일의고행(一意孤行)
068 일자천금(一字千金)
069 일전쌍조(一箭雙雕)
070 작법자폐(作法自斃)
071 장수선무(長袖善舞)
072 전가통신(錢可通神)
073 정위전해(精衛塡海)
074 정저지와(井底之蛙)
075 조령모개(朝令暮改)
076 조삼모사(朝三暮四)
077 중지성성(衆志成城)
078 집사광익(集思廣益)
079 천군만마(千軍萬馬)
080 천금매골(千金買骨)
081 천변만화(千變萬化)
082 천의무봉(天衣無縫)
083 초요과시(招搖過市)
084 추심치복(推心置腹)
085 출이반이(出爾反爾)
086 충언역이(忠言逆耳)
087 취이대지(取而代之)
088 타초경사(打草驚蛇)
089 탐천지공(貪天之功)
090 퇴피삼사(退避三舍)
091 투편단류(投鞭斷流)
092 파부침선(破釜沈船)
093 팔면위풍(八面威風)
094 편장막급(鞭長莫及)
095 평수상봉(萍水相逢)
096 필부지용(匹夫之勇)
097 항장무검(項莊舞劍)
098 현량자고(懸梁刺股)
099 화병충기(畵餠充饑)
100 화룡점정(畵龍點睛)
저자소개
책속에서
과전이하(瓜田李下)
글자 풀이 : 오이 과瓜, gua, 밭 전田, tian, 오얏나무 리李, li, 아래 하下, xia
뜻 풀이 :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의 줄임말이다. ‘오이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의심받을 행동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유래
전국시대 제나라 위왕 때의 일이다.
위왕이 즉위한 지 9년이나 되었지만 간신 주파호가 국정을 제멋대로 운영해 오던 탓에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후궁 우희가 위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음흉한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 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옵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 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이를 믿게 된 위왕이 우희를 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지만 이미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내려고 했다.
그러나 위왕은 그 조사 방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위왕이 우희를 불러 직접 묻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하, 신첩이 일편단심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지금은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청천백일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라고 한 선인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신첩이 옥에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으로, 이는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겠사오니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주시옵소서.”
위왕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위왕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잡아 죽이고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았다.
한편,『구당서·유공권전(舊唐書·柳公權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당나라 문종 황제가 ‘곽녕(郭寧)’이라는 관원을 우녕(郵寧), 오늘날의 섬서성 우현지방의 지방관으로 임명한 적이 있는데,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는 곽녕이 두 딸을 대궐에 들여보냈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이에 황제가 충직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유공권에게 “곽민의 두 딸은 태후의 적적함을 달래주기 위해 입궐한 것이지, 짐과는 전혀 상관이 없노라.”라고 말하자, 유공권은 “오이밭이나 오얏나무 밑에서 생기는 혐의를 어찌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나이까?(과전이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과전이하(瓜田李下)’라는 고사성어는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이는 ‘오이밭에서 신발 을 고쳐 매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의심받을 행동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일모도궁(日暮途窮)
글자 풀이 : 날 일(日, ri), 저물 모(暮, mu), 길 도(途, tu), 다할 궁(窮, qiong)
뜻 풀이 : ‘막다른 길에 들어서다.’라는 뜻으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몰락의 일로를 걷다.’, ‘ 궁지에 몰리다.’ 등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유래
춘추시대 초평왕은 어리석고 파렴치했다. 그의 궁에는 아름다운 후궁들이 많았지만 초평왕은 며느리를 왕비로 삼았다.
재상 오도는 왕의 패륜적인 행위가 여러 제후국들의 비웃음을 살것을 우려해 초평왕에게 여러 번 간언했다. 그러나 미색에 빠진 초평왕은 오히려 오도를 죽이라는 어명을 내렸다.
초평왕은 오도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오도의 두 아들인 오상과 오원을 도성으로 불렀다. 이들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겠다는 계산에서였다.
조서를 받아든 오원은 초평왕의 음모를 간파하고, 형 오상에게 도성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 절대 도성에 가지 말고 다른 나라로 도망간 후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오상은 고지식하고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라 필히 죽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왕명은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오상은 초평왕의 요구에 따라 도성에 들어가 죽임을 당했다. 초평왕은 그래도 성에 차지 않자, 전국에 오원을 잡아들이라는 수배령을 내렸다.
오원은 한밤중에 오나라를 탈출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간 끝에 15일 만에 소관에 도착했다.
초평왕도 오원이 탈출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관문에 군사를 배치했다. 소관에도 많은 군사들이 검문 검색을 하고 있었다. 성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된 오원은 친구인 부공의 집에 몸을 숨겼다.
오원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부공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원을 숨겨주고 오원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집을 나서면서 부공은 “소관은 오나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검문이 심할 것이네. 자네는 집에서 내 소식을 기다리게.” 하고 신신당부했다.
부공이 집에 돌아와 보니 그동안 오원의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이를 본 부공은 계책이 떠올라 오원에게 말했다.
“자네 머리칼과 수염이 하얗게 세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절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네. 자네의 지금 모습이 내 친구인 황보납하고 비슷하네. 그러니 그 친구와 옷을 바꿔 입고 탈출하면 될 것 같네.”
부공의 계략대로 오원은 소관을 무사히 빠져나가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에 당도했다.
오왕 합려는 오원이 무예가 출중하고 지략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이미 들은지라 즉시‘ 상장군’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오원은 10년 동안 오나라를 위해 군마를 훈련시켰고, 군사들에게 진법을 가르쳤다.
오원은 대군을 인솔해 초나라를 공격했다. 총 5번의 격전 끝에 초나라 군대는 완패하고 오원은 초나라의 도성까지 함락했다.
이때 초평왕은 이미 죽었지만 오원은 마음속의 화를 누를 길 없어 초평왕의 무덤을 파고 그의 시신을 황야에 내버리게 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자, 철 채찍으로 초평왕의 시신을 300대나 때리기도 했다.
이 일을 안 신포서가 오원의 행위가 지나치다고 말하자, 오원은 “나는 갈 길을 재촉하는 나그네와 같다. 날은 이미 저물고 길은 막 으니(일모도궁) 나의 이 기괴한 행동을 이해해달라.”라고 대답했다.
‘일모도궁(日暮途窮)’이라는 고사성어는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이는 ‘막다른 길에 들어서다.’라는 뜻으로, ‘궁지에 몰림.’을 비유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