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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문화콘텐츠로 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문화콘텐츠로 난다

정규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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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문화콘텐츠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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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문화콘텐츠로 난다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인문 비평
· ISBN : 9788989011491
· 쪽수 : 254쪽
· 출판일 : 2009-01-22

책 소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지혜 또는 진리를 상징한다. 책 제목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문화콘텐츠로 난다’는, 독일 철학자 헤겔의 <법철학> 서문 내용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난다’는 말에서 따왔다.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에서 문화산업을 담당하고 있는 정규호 저자는 미네르바의 황혼녘을 대신하여 문화콘텐츠로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목차

예술지상주의는 가능한 것인가 ―9
샤갈의 ‘꿈’, 혹은 눈 내리는 마을의 추억―10
추상- 一切唯心造와의 소통, 칸딘스키에 대하여―13
큐비즘, 공간의 해체와 과학으로의 충동―16
추상표현주의, 동양의 해체와 과학으로의 충동―19
다다(DADA), 우연에 기대는 영역의 확대―23
야수파, 순수와 원시로의 유혹―29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사회학이란 무엇인가―32
운보와 CAF(충북아트페어)―36
정보사회에서의 자아 상실 혹은 지식 역량 강화―43

영화에서 묻다 ―49
프라하의 봄날은 간다―50
왜 문화산업이어야 하는가―53
눈먼 자들의 도시와 이미지 메이킹―56
만화 ‘식객’과 영화 ‘식객’―58
밀양(密陽), 그 빛의 다양한 스펙트럼―60
베토벤 바이러스와 어느 붓쟁이의 회한―62
사자와 양, 혹은 양과 사자―64
영화 ‘카핑 베토벤’의 눈물―66
영화 ‘쿵푸팬더’의 상징성―68
이청준과 섬―70
배우의 힘, 이야기의 힘―72
그 놈 목소리, 대중에 대한 끝없는 의지와 호소―74
에덴의 동쪽과 독일의 정신―77
영화와 영어―80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82
이야기의 힘 4―84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문화콘텐츠로 난다 ―85
청남대와 봉하마을―88
지방식민지론과 오바마―90
즐기면서 배우라―93
군주론과 가난, 그리고 지도자―96
쓰촨성 대지진과 낯설게 하기―98
현대시 백 년과 김광석―100
‘말’과 ‘이야기’의 차이―102
‘생각대로’ ‘Show’를 하라―104
‘아리랑’과 ‘애국가’―106
4월에―108
가가린과 이소연, 그리고 어린왕자―110
가을 전어와 직지축제―112
게임 시장의 변화와 대선정국―114
가을의 단상―116
계란과 상정일 련(嘗鼎一)―118
고향 가는 길에 쓴 편지―120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난다―122
광복절 노래와 음반산업―124

말의 힘, 이야기의 힘 ―125
기차에 관한 단상(斷想)―128
나는 물입니다―130
나폴레옹과 007, 그리고 머독―132
돈의 역사와 화폐의 가치―134
두꺼비와 욕망의 정치―136
이야기의 힘―138
라르크 앙 시엘, 라깡씨엘―140
마지막 수업과 빵 한 조각, 그리고 대의민주주의―142
만들어진 전통과 말의 변화―144
11월, 그 쓸쓸함에 대하여―146
말년병장과 레임 덕, 그리고 남북정상회담―148
목수와 사람, 사람과 목수―150
이야기의 힘2, 역사드라마의 파괴적 상상력―152
밴드웨건 효과와 여론조사―154
빈 센트 반 고흐 전(展) 유감―156
이야기의 힘3―158

문화로 보기, 문화산업으로 풀기 ―159
청주의 성장동력과 일본문화산업―162
선생님 전상서―164
시간의 역사―166
시월의 마지막 밤―168
아! 숭례문―170
아이폰과 프로슈머―172
우리동네 가을풍경―175
에듀테인먼트의 도시 청주―178
예술과 학력―180
우표와 연탄―182
잔치는 끝났다―185
음반산업과 네티즌의 힘―188
6월, 자유와 민주의 길항관계―190
정월 대보름과 새 정부―192
조각가와 선생님―194
짜장면은 서럽다―196
착하게 살자―198
촛불입니다. 눈물입니다.―201
친구에게―204
컨테이너와 소―206
부산 야구와 처음처럼―209
탈레반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212
박지성과 문화 동질성―214
‘곰’인가 ‘문’인가―216
올림픽과 민족주의―218
최요삼, 그가 죽었다―220
축구의 사회학―222
올림픽을 보는 방법―224
크리스마스에 쓴 편지―226
김연아와 람보르기니―228
완위각과 에듀테인먼트―230
TV 드라마의 OSMU(One-Source Multi-Use) 한계 극복 방안 연구―232
문화산업 진흥의 필요성과 육성정책―245

저자소개

정규호 (지은이)    정보 더보기
70년대 끝 무렵 대학공부를 시작해 한때 연극판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 전에는 일찌감치 팝음악에 미쳐 다운타운가의 음악상자에 파묻히기도 했다. 뜻한 바 있어 연극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대학을 기웃거리더니 어찌어찌하다 신문쟁이가 되어 문화보다는 사회 쪽, 특히 사건부문에 주로 얹혀 지냈다. 마침내 문화콘텐츠에 눈을 뜬 것은 21세기 시작 이후의 일. 중앙대에서 문화예술경영을 공부하면서 겨우 치레를 하고 있으며,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에 목을 매고 있다. 순종 청주 사람임이 자랑이자 곤궁함.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http://cjculture.org) 문화산업팀장(2009 당시. / 2012. 6. 현재 비엔날레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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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머/리/말
자전거를 타는 일은 걷는 일에 비해 위태롭습니다.
오른발과 왼발, 양쪽 두 다리로 지구를 지탱하는 일에 비해 앞과 뒤, 외줄로 놓여있는 자전거의 질서는 힘을 많이 필요로 합니다.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는 익숙해지면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재미있으며,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세상 무슨 일이든 처음은 낯설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인간의 개성은 갈수록 옅어지고 또 대립구도 역시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는 문화집중의 시대에, 새로운 시도는 결코 아름다울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 텅 비어 있는 발산리 들판엔 어느새 인간의 욕심이 스멀스멀 겨울을 삭혀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가오는 봄엔 발산리 푸른빛은 전설로만 남아 있을 겁니다.
하여, 문화라는 엄청난 무게로 모든 것이 치부되고, 문화콘텐츠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속절없이 포장되는 세태에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야기의 원형이 됐든, 아니면 영화적 상상력이 됐든 간에 그 수많은 언어들은 세상인심과 일정부분 교집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화를 통해 삶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를 통해 문화산업의 가능성을 진단한다는 일은 내 어리석음으로는 가당치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풍성함은 애초에 가난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가난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며, 그 이름은 우리가 자꾸 불러줌으로 인해 익숙해질 것이라는 확신은 내게 남은 유일한 통로라는 점입니다.
틈나는 대로 적어 본 것이거나, 이미 충청타임즈를 비롯한 일간지를 통해 선보였던 ‘말’들을 정리했습니다.
그런 편린들이 겨울 시린 들판에 흩뿌려지는 사이 언 강은 밤새도록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고맙기만 한 기축년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2009년 정월


샤갈의 ‘꿈’, 혹은 눈 내리는 마을의 추억

올겨울은 눈이 적다는 기상예보가 실망스럽다. 어쨌든 겨울은 겨울다워야 하고 그 겨울의 상징은 눈일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상실감은, 무수한 세월을 거치면서 겪은 변화무쌍한 사고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
그런 계절의 흐름을 감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축복이라고 위로하면서 지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았던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의 즐거운 회상이 반갑다.
지구촌 한구석, 늘 엄청난 저력을 갖고 있는 나라라는 자부심 속에 살고 있음에도 우리에게 문화적 소외, 내지는 박탈감은 의외로 크다. 게다가 신행정수도의 부푼 꿈이 무산돼버린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는 한계는 더욱 두텁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테고, 그런 이유로 샤갈을 만나러 가는 지난여름 길은 당연히 조급하다.
삼복더위 탓이었을까. 기대하던 ‘눈 내리 는 마을’은 없었고, 대부분의 작품들이 판화본이 어서 탄성이 반감되는 사이 ‘꿈’을 발견한 것은 그즈음 내 노곤한 심리 상태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미술평론가 서순주는 샤갈을 ‘대중에게 친숙한 작가’로 단정한다. 그는 샤갈의 그런 친숙함이 ‘작품이 담고 있는 이미지’에서 비롯되며, 그 이미지들은 “그의 작품에 주된 모티브로 등장하는 꽃, 연인, 신랑신부, 동물, 마을 그리고 마을의 사람들 같은 일상의 소재들에게 찾아진다.”고 강조한다.
샤갈이 1927년 그린 ‘꿈’ 역시 그런 친숙함으로 우리와 상통한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진 ‘꿈’은 마치 수채화 같은 부드러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혹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몽환적인 푸른색은 잠들어 있음과 깨어있음의 경계가 모호한 일상을 표현하면서 화폭에 등장하는 사물을 더욱 강렬하게 대비시킨다.
어슴푸레 번져가는 달빛?혹은 짙은 구름에 갇힌 태양 빛일지도 모를?은 눈부신 여체와는 애써 무관하다.
‘꿈’에서의 빛은 세 가지이다. 하늘에서의 빛이 그 하나요, 눈부신 여체가 둘이고, 마지막으로 혼돈스러운 땅의 빛이 있다.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흩어지는 빛을 찾아다니다 보면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흉몽을 꾸고 난 뒤 꿈은 현실과는 반대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과연 그럴까. 꿈이 반드시 반대로만, 거꾸로만 작용하는 것일까. 우리의 일상은 이처럼 질서가 허물어진 카오스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음을 샤갈은 ‘꿈’을 통해 제시한다.
달빛과는 무관하면서도 시린 빛을 발하는 여체는 무기력하다. 당나귀만은 아닌 여러 가지 형상의 동물 위에서 축 늘어진 몸과, 그런 몸을 애써 지탱하려 는 숨겨진 의도가 담겨 있는 처진 팔과 다리, 표정 없는 얼굴은 세상의 고단함과 그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는 나른함을 함께 담으면서 ‘꿈’을 통한 현실과의 소통을 추구한다.
뒤집힌 세상에서 거꾸로 자라는 나무와 그 대지를 향하는 여체의 회귀는 ‘꿈’을 통해 다다르고자 하는 현실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고, 의지하고 있는 동물의 몸체와 떨어뜨려 살펴보면 그 여체는 땅을 향해 비상하는 이 상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꿈은 빨강과 초록이 어우러지면서 훨씬 강렬하다.
반면에 당나귀인지 염소인지, 또 귀만 보면 토끼 같기도 한 동물은 화폭에 고정된 듯하면서도 달빛을 응시한 채 ‘꿈’을 실어 나르는 전령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두 귀 사이에 삐죽 삐죽 솟아오른 깃털은 모성 본능으로 향하는 섹슈얼리 티를 연상시키면서 프로이드를 떠올리게 한다.
샤갈의 ‘꿈’은 모든 것이 사실적이지 못하다. 현실과는 다른 초현실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이나 환영(幻影) 속의 세계는 결국 현실에 집착하려 는 인간의 의지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상상은 이상을 낳고 이상은 현실에 대해 또 다른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모처럼 한국 땅에서 사진이 아닌 진품을 통해
샤갈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는 기대와 비슷하게 어울리고 있다.
샤갈을 좋아하고, 꽃을 즐겨 노래한 김춘수 시인이 얼마 전 작고했다. 내년 3월 그의 묘비명에는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덮인 채 내 가슴속에 신비롭게 남아 있을 것인가.

샤갈의 마을에는 3월의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의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


추상- 一切唯心造와의 소통, 칸딘스키에 대하여

전체에서 하나를 보는 것과 하나를 통해 전체를 보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신라시대,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것은 전체를 보려 는 시도였을 테고, 어둠 속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뒤 날이 밝은 후 실체를 확인하고서야 본질을 깨우쳤다는 것은 하나 또는 부분을 통해 전체를 확인했음과 다름없다.
추상은 모든 개념과 판단이 성립되는 기초적 사고 과정임을 가장 넓은 의미로 포괄하고 있다. 사물의 전체 표상을 구성하는 모든 특징, 속성, 관계 중에서 하나 또는 몇 개를 떼어내어 그것만을 본질적인 것으로 독립시키면서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 분석적 정신 작용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갖고 있는 추상은 예술사에서 그 의미만큼이나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어떤 사물의 특징, 속성, 관계 등 감각에 의해 주어지는 개별적 구체적 인식자료를 가공하여 일반적 개념과 판단을 형성하는 추상세계로의 이동은 이 때문에 예술사에서의 관심이 집중되기에 충분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바세계의 모든 일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은 추상을 지향하는 예술의 가장 유력한 이론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예술, 특히 회화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와 지근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칸딘스키는 다른 많은 독일 화가와 마찬가지로 진보와 과학의 가치를 싫어했다. 그는 순수한 ‘정신성’을 지닌 참신한 미술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재건하기를 바랬던 신비주의자였다.
순수색의 심리학적 효과를 통해 정신과 정신의 결합이 가능하며, 또 그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이를 위한 방법으로 색채로 음악을 표현하는 최초의 시도를 한다.
일종의 회화에서의 화성이론 창출을 목표로 하는 칸딘스키는 신비적 체험과 음악적 유비(類比)를 지향하면서 ‘보다 높은 목표들’과 ‘내적인 울림’을 선언한다.
“예술에서 이러한 두 요소(위대한 추상성과 위대한 사실성)들은 항상 존재했는데, 그것들은 ‘순수 예술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추상성은 사실성 속에서 표현되며, 사실성은 추상성에 봉사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인 평형 속에서 이상의 최고점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상이 한 종류의 균형 잡기였다.” (Wassily Kandinsky: Uber die Formfrage, 우도 쿨터 만, 예술이론의 역사, 문예출판사, 1999, p.237 재인용)
칸딘스키는 예술적 수단의 자율적인 작용을 중요시하면서 색채에 중심적인 의미를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색 채는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다. 색채는 건반이요, 눈은 망치이다. 영혼은 많은 현을 지닌 피아노이 다. 예술가는 이런 저런 귀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손이다. 따라서 색채의 조화가 인간 영혼의 가장 함목적적인 접촉의 원리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칸딘스키의 이 같은 견해가 예술사에서의 기존 질서의 해체일 수 있다는 추상주의에 대한 경외에도 불구하고 전통과의 연결고리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즉흥적 미술로서의 추상에 이르는 과정에서 들라크루아가 ‘그림에 있어서 음악적인 것’이라고 지칭했던 측면과 형태와 색채의 소통적 기능이라는 특성을 추구해 온 전통이 그것이다. 입체주의는 기하학적이고 구축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라파엘, 푸생, 베르미어, 앵그르, 쇠라 등과 같은 신중한 화면 구축가들로 대표되는 구축적 전통에 속한다. ‘그림에 있어서 음악적인 것’은 모네, 들라크루아, 벨라스케스, 램브란트, 루벤스를 거쳐 16세기 베니스 화파의 티치아노와 그의 동료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채색적 그림의 전통을 의미한다. (노버트 린튼, 20세기의 미술, 예경, 2003. p.82)
회화에서의 추상적인 접근을 추구했던 칸딘스키는 이 같은 예술사에서의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전통과의 소통을 유지하고 있다. 신지주의 (新知主義)적 사회의 건설을 통해 인도적 명상을 토대로 한 문화개혁 을 추구한 블리 바츠키(H.P.Blawarzky)에 대한 언급과 함께 쉰베르크로부터의 영향은 상징주의에 대한 관심의 척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시각세계는 상상력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심층세계를 가리고 있는 겉모습이 라고 믿었던 신념은 고전철학에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형 태 에 대한 관심은 회화의 표현에 있어서 음악에 필적할 수 있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칸딘스키의 세계가 표현주의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회화에서의 화성이론’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칸딘스키는 바그너를 대단히 찬양하였으며, 바그너가 음악, 대사, 무대효과를 ‘총체 예술’로 결합한 것에 대해 지나치게 세속화되었던 당시의 오페라에 정신성을 부여한 것으로 평가한다.
추상에서의 칸딘스키는 예술적인 요소와 장르간의 결합을 추구하면서 바우하우스를 통해 현대적 삶의 모든 영 역에 영향을 미치는 계기를 마련한다. 디자인과 공예에 대한 관심의 표출은 예술작품의 현실화를 가속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기술적 발전 경향에 상응하여 예술적 형태 역시 전체적인 예술 영역으로의 통합을 유도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결국 예술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만 좌지우지되는 일체유심조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정신세계가 강조되는 새로운 흐름은 내 마음가짐에 따라 주인공이 될 수도, 초월자가 될 수도 있음을 일깨워 준다는 측면에서 예술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될 것이다.
추상은, 그리고 칸딘스키는 하나 또는 부분을 통해 전체를 고찰하는 사고의 분석과 이를 통합하는 역사와 전통, 그리고 현실과의 소통과 바우하우스라는 공간을 통해 건축과 공예, 그리고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영향력을 여전히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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