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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88990369970
· 쪽수 : 192쪽
· 출판일 : 2013-07-08
책 소개
목차
티나의 모험
1. 자유주의의 대안은 없다
티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매기와 로니
조(이야기 1)
갈리아 마을
프랑스는 어떻게 변절했는가
로제르(이야기 2)
굿바이 레닌!
2. 국가의 대안은 없다
한 배를 탄 조와 로제르(이야기 3)
일은 어떻게 벌어졌는가
엄습하는 공포
희생양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시스템 위기
3. 영원히 대안이 사라진다면?
눈속임
돼지들(PIGS)은 물러가라!
고조되는 긴장
긴축, 조금 더!
사기극
책속에서
그러던 어느 날 부부의 집에 불쑥 젊은 남자가 찾아왔다. 대출 상품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이었다. 호남형에 예의가 바른 남자는 자동차 판매원과 행색이 비슷했다. 손에는 금반지를 끼고, 물방울무늬가 새겨진 초록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신뢰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남자는 상품 소개를 다 하고 난 뒤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갔다. 왜 조와 조세피나는 자동차를 소유하듯 집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일까?
실직자인 조는 신용카드를 긁어 생활비를 해결했다. 월말이면 번번이 결제 대금이 연체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다달이 저축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쥐꼬리만 한 수입에 모아 놓은 종잣돈마저 없는 부부에게 내 집 마련은 꿈같은 일에 지나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아메리칸드림이란 게 있잖아요.” 대뜸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굳이 부부가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도 충분히 집을 장만할 길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처음 2년 동안은 부담이 되지 않는 수준의 월 상환액만 갚으면 된다고 했다. 2년 뒤부터는 상환액이 다소 늘어날 테지만, 분명 그 사이 조는 다시 직장을 구할 테고 집값도 지금보다는 훨씬 올라 있을 것이었다. 은행에서 나온 남자는 부부에게 변동 금리 상품을 권했다. 미 중앙은행의 기준 금리에 가산 금리를 더한 25년짜리 대출 상품이었다.
말쑥한 차림의 젊은 남자는 부부의 결정에 쐐기를 박을 결정타를 날렸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집을 되팔아 시세 차익을 건질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게임 오버!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부부는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주택 한 채를 매입했다.
그러나 2009년 초, 별안간 상황이 돌변했다. 4백만이 넘는 다른 미국 가정들처럼, 조와 조세피나 부부도 하루아침에 보금자리를 날려 버렸다. 일 년 전 대출금을 체납하자 은행이 부부의 재산을 차압했다. 집값은 반 토막 났다. 설상가상 헐값으로 내놓은 집을 선뜻 사겠다고 나서는 임자도 없었다. 조와 조세피나는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조세피나가 일하는 대학가 피자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뉴헤이븐. 그곳에서도 수천 킬로미터를 더 가야 나오는 대서양 건너 프랑스의 몽벨리아르. 그곳에서는 로제르가 창가 뒤에 조금 떨어져 앉아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로제르는 몇 주 전 직장에서 쫓겨났다. 로제르는 프레스 기계 소리가 몹시도 그리웠다. 로제르가 떠난 뒤 강드랑주 자동차 하청 공장은 문을 닫고 해외로 이전했다.
사실 프랑스에 사는 로제르의 운명은 미국인 조의 운명과 톱니바퀴처럼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조가 갚을 능력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대출을 무분별하게 받은 행위가 결과적으로 로제르가 매일같이 고용 센터를 바닥이 닳도록 드나들게 만든 것이었다. 은행과 대출 기관은 불량주택담보대출 채권을 국채 관련 상품처럼 좀 더 팔기 쉬운 금융 상품과 결합해 판매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파생 상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면서 결국 수백만 명의 조가 양산된 것이다. 그들은 빌렸던 융자금을 상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담보물의 가치도 애초 추산했던 시세보다 추락했다. 그것은 흡사 유대인 이야기에 나오는 다리통이 하나 뿐인 바지, 아무도 입을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샀다 되팔기를 반복하는 바지를 떠올리게 했다.
은행은 공연히 끈적끈적한 잼 통 안에 손을 넣었다 모두가 천덕꾸러기로 취급하는 서브프라임만 덕지덕지 붙인 꼴이 됐다. 파산하거나 혹은 파산 직전에 이들 은행들은 결국 기업과 개인에 대한 대출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는 뉴욕에서 모스크바, 북경에서 프랑크푸르트, 코네티컷에서 몽벨리아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 위기로 확대됐다. 세계 각지에서 기업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세계 각지에서 해고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세계 각지에서 실업률이 치솟았다. 세계 각지에서 소비가 추락했다. 그럼에도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자유주의 예찬자들은 앞으로 최소한 천년은 거뜬히 번영기가 이어지리라 예언했다!
-<한 배를 탄 조와 로제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