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일본문화
· ISBN : 9788990509581
· 쪽수 : 412쪽
· 출판일 : 2024-07-13
책 소개
목차
인간의 가치를 실현한 아사카와 다쿠미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이해와 감사 친선을 위한 아름다운 기록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영면한 두 식물학자
문화예술인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학」에서 배우는 행복
디아스포라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제1장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추모집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발간사
머리말
축사 (한국 측
축사 (일본 측)
축사 포천시
축사 호쿠토시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작은 거인
김성진 그로부터
자료관 건립 과정
성지순례
인간의 가치
순결한 영혼
교토의 귀무덤 및 망우리 다쿠미 묘
한일 공동 제작 및 흥행
사색의 길에 핀 성스러운 한 송이 꽃
영화 <백자의 사람> 포스터
맺는말
편집 후기
아사카와 다쿠미 80주기 추모집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목차
제2장
아사카와 다쿠미 90주기 추모집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신불신을 선택하지 말고 정불정도 선택하지 말아라
개정증보판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영화 <길~백자의 사람~> 상영을 진행하는 모임
증보판의 간행에 즈음하여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와 시인 윤동주
조선의 흙이 된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 아사카와 다쿠미
디아스포라와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사월이 오면
잣나무와 아사카와 다쿠미
잊지 말아야 할 형제, 다쿠미와 노리타카
인간의 가치를 실현한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를 만나러 가는 길
조선백자를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공덕(公德)
영화 <길-백자의 사람>이 보여 준 것들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을 품고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자료관을 다녀와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00년과 한국문학 및 망우역사문화공원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관련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
국회 토론회 / [제2주제 발제]
국회 토론회 / [제2주제 토론문]
제3장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수림문화재단, 2016)
김희수 이사장의 생각 ‘인간도처유청산’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교식 인사 말씀
아사카와 다쿠미
폴 러쉬 (Paul Rusch)
동교(東喬) 김희수(金熙秀) 선생
동강(東江) 하정웅(河正雄) 선생
청리은하숙(淸里銀河塾)과 하정웅(河正雄)
단단한 씨앗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의 개교를 앞두고
양심적인 일본인과 일본법이 한국에 미친 영향
조선백자의 세계
대입 학생부전형 합격 전략 ?어떻게 준비할까?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_ 개교 프로그램 평가 및 프로그램 계획안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교식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개교식을 열다
행복한 사람들 즐거운 배움의 길
홍림원(洪林園) 다쿠미(巧) 소나무 아래에서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1기 일본 연수를 다녀와서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가 나에게 주는 의미
나와 다쿠미의 백자
조선과 아사카와 다쿠미
Ice cream, I scream
역사를 마주하고
백자, 순백의 깊이
청리와 망우리 사이
진실속에 나를 찾다
날마다 일보전진의 마음
일어淸수
비밀의 묘지공원
그 마음이 닿기를
제4장
중랑인문학 글쓰기반 (중랑문화원, 2023)
아사카와 다쿠미 영화 <백자의 사람>
망우역사문화공원은 대한민국 호국의 산실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드신 아사카와 다쿠미
진흙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연꽃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 디아스포라
조선의 흙이 된 아사카와 다쿠미
1905년 을사생 할머니의 손녀와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를 생각하다
광릉수목원과 아사카와 다쿠미
중랑인문학글쓰기반 공부의 즐거움
가르치며 배운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 40년 찬란한 인생 기록
친절한 다쿠미 씨
아사카와 다쿠미 연보
맺은 말
편집 후기
책속에서
조선인을 위해 일생을 바친 후세 다츠지(布施辰治)변호사(1980~1953)
이 일본인은 2004년 10월 일본인으로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인물이다.
1880년 11월 13일,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묵자의 겸애사상 등을 접하면서 지식과 정의, 사랑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성장하게 된다. 1902년 메이지[明治]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판사·검사 등용 시험에 합격하여 판사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톨스토이의 휴머니즘에 깊이 심취했고, 후세는 40세를 맞이하던 1920년 스스로 출세의 길을 끊고 본인이 출간한 잡지인 『법정에서 사회로』에 자기 혁명의 고백을 남김.
후세는 일본 내의 노동운동과 무산정당운동, 수평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고 시사 강연회와 약자를 위한 무료 법률 상담을 지속적으로 실시했습니다. ‘2 · 8 독립 선언 사건’에서는 조선인을 최초로 변호하며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옹호하였고, 이후 수차례 조선을 방문하여 시국 강연회를 실시하고 토지 회수 운동을 돕는 등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에 힘을 실었습니다. 즉 3.1운동 이후 후세는 조선으로 건너와 김시열을 필두로 한 의열단원의 변호하고, 김해에서 열린 백정 철폐 운동인 형평사 창립기념 행사에 참여하고, 조선인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가 개최한 하계 순회 강연의 변사를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런 후세의 활동에 조선에서는 그가 조선에 올 때마다 열렬한 환대로 그를 맞이한다. 패전 직후에는 조선의 독립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외국인으로서 독립투사 박열과 함께 조선 독립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재일 조선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호를 거의 전담하여 맡았다. 비록 후세도 사회 운동의 최전선에서 변호사로서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지만 스스로를 변호사 적임자라고 믿고 변호사업을 본인의 소명으로 여기면서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