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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91310360
· 쪽수 : 400쪽
책 소개
목차
서문 태초에 세탁기가 있었네
1. 가끔 방향 전환을 해봐, 인생을 깨우칠걸!
2. 너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3. 분노, 그게 대 유행이야, 확실해!
4. 사랑, 욕망, 그리고 황홀경에 빠지다
5. 슈퍼마켓의 부당행위
6. 무시무시한 권력의 손아귀
7. 창고 테러
8. 내 친구이자 적, 모하메드
9. 그냥 공짜로 가져가세요!
10. 사실이다, 신은 소매점에도 있다
11. 꼼짝 마! 넌 철창행이야!
12. 위치, 윕스, 그리고 위카
13. 우리 트레버가 악마처럼 변해요! 도와주세요!
14. 이브를 타락시킨 과일과 정말 쓰레기 같은 고객
15. 빵 부스러기가 주는 위안
16.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하기 힘들어요
17. 망자의 신발
18. 청문회장에서
19. 삶이라는 책
20. 조용한 전쟁
21. 시간이 멈출 때
22. 권력으로 향한 미친 열정
23. 계절마다 치르는 행사
24. 상황을 압도하는 재난의 대가
25. 익살꾼에게 개그가 필요할 때
26. 달콤한 딸기의 씁쓸한 성공
27. 경리부 여자들, 친환경 녹색 운동, 그리고 대걸레
28. 콩이 온다
29. 세상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사건
30. 쓰레받기와 새치기꾼
31. 폐점 시간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트럭 운전사 마이클을 살펴보자. 트럭 기사는 상점 커뮤니티에서 명예회원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밤 근무를 마치고 아침 일찍 어슬렁거리며 상점 안으로 들어와 화장실에 갔다가 따끈한 음료를 마시며 잡담을 했다. 그때 기사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응원하는 축구팀에 관한 조소 내지 농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축구는 그들 사이에 통용되는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축구말 할 줄 아세요?”
물론 다 할 줄 안다. 마이클만 제외하고. 그는 딱히 응원하는 팀이 없고, 응원하는 척하지도 않았다. 말투는 지적이고 전문적이다. IT 계통에서 20년이나 종사했지만 어느 날 정부가 계약에서 발을 빼는 바람에 직장을 잃고 말았다. 마이클은 지금도 신랄하게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비난만 하고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나이 쉰하나에 2,500파운드약450만 원 상당를 들여 대형트럭 면허를 땄고, 지금은 얼룩 한 방울 묻지 않은 백옥 같은 셔츠를 입고 다니는 가장 트럭 운전수답지 않은 트럭 운전수로 지내고 있다.
마이클은 평온하던 삶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만약 신이 레몬을 준다면 나는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내겠어.”
정말 그렇다. 우리는 레몬을 내려준 것에 대해 신께 감사하지 않을지 모른다. “레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안 그래요?”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전기세나 집세는 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중년의 나이에 마이클은 책상을 떠나 트럭을 몰고 있다. 그가 이 일을 계기로 자기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16쪽, ‘가끔 방향 전환을 해봐, 인생을 깨우칠걸!’)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손님.”
여자 손님이 그의 계산대 앞으로 다가설 때 윈스턴이 말했다. 이 말 역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다 차례가 된 고객에게 계산원이 반드시 하기로 되어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여성은 줄을 서 있던 고객이 아니라 매장에서 곧바로 계산대로 온 고객이다.
“아니요, 기다리지 않았어요.”
여자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가요?”
“기다리게 해서요, 손님.”
“안 기다렸다니까요.”
윈스턴은 다 알고 있으니 그만하라는 듯 미소 짓지만, 여성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안 기다렸다고요! 줄이 없었잖아요.”
여자는 갈수록 코미디언 배질 폴티와 닮아가고 있었다.
“손님이 뭐라고 하시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죄송해야 하니까요.” (45쪽, ‘분노, 그게 대 유행이야, 확실해!’)
카운터 앞에 늘어서 있던 줄이 사라지고 생각할 여유가 생기면 늘 정육 코너 쪽 통로를 바라보면서 세인트 폴 대성당의 넓은 통로와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제서품을 받던 날을 떠올렸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크게 울리는 가운데 사제복을 차려입은 사람이 가득 들어찬, 성대하면서도 자긍심을 한껏 드러낸 행사였다. 하지만 행사 자체보다는 사제서품을 받은 후 신부 자격으로 처음 성당을 나서던 순간을 더 자주 떠올렸다.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한 남자가 대리석 바닥을 미끄러져 내 앞에 엎드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신부님! 제가 신부님의 첫 축성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에게 신부로서의 첫 축복을 내려주었고,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흡족했지만, 알고 보니 내가 내린 축복이 그가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에게 받은 첫 번째 축복이 아니었다.
“그 사람 축복 킬러입니다.”
“아!”
“예, 마치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 놓인 돼지비계처럼 이 신부에서 저 신부로 미끄러져 다니는 거죠.”
그 킬러의 바보짓에 맞장구를 쳐준 사실을 바로 후회했다. 왜 아무도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는 걸까? 무릎 아프게 그러지 말라고, 원래 경이로움이니 축복이니 하는 건 다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거라고. 그리고 믿든 말든 간에 그도 실제로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있다고 왜 조용히 속삭여주지 않는 것일까? (75쪽, ‘슈퍼마켓의 부당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