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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미술가
· ISBN : 9788991847965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12-11-12
목차
책머리에 19
Ⅰ .성장기와 신혼 시절1755~1782
Ⅱ .전성기와 후원자1783~1786
Ⅲ. 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1787~1789
Ⅳ. 망명 생활의 명암1790~1801
Ⅴ. 귀향과 망각1802~1842
부록
자료 출처 ‡ 『회상록』비제 르 브룅의 대화에서 채록_피에르 드 놀라크 ‡
『엘리자베트 비제의 교육과 데뷔』(저명 예술가 총서)_샤를 피예 ‡ 역자후기 ‡ 인물설명
리뷰
책속에서
1779년, 비제 르 브룅에게 일생 가장 큰 행운이 찾아왔다. 그녀의 화풍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후대로 전해질 인기를 다졌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으로 불려가 그곳에서 마침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그림을 보고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직접 보고 그리게 되었다.
그렇게 커다란 ‘파니에’(살대를 넣어 받친 커다랗게 부푼 코트)를 입은 왕비의 초상을 그렸다. 새틴 드레스 차림으로 손에 장미를 들고 있었다. 이 초상은 동생 요제프 2세에게 보낼 것이었다. 왕비는 내게 두 점을 그리도록 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자(9쪽 참조). 전신상이다. 원작은 빈에 있는데, 호프부르크 궁내 아파트 장식판에 붙여놓았다. 작가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서 외교문서만 언급했다. 원래 요제프 2세에게 줄 것은 아니었고, 아주 어려서 프랑스로 시집간 자기 딸이 완전히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한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 안달하던 여제(女帝)의 뜻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그림을 보자마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편지를 썼다.
네 멋진 초상은 너무 귀엽구나. 리뉴 왕자도 똑 닮았다고 하더라.
아무튼, 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 성장기와 신혼 시절1755~1782
그런데 이 그림은 왕비의 가장 아리따운 초상이었을 듯하다. 뽀얗고 소박한 모습으로 젊은 왕비의 인간미를 가장 잘 드러냈을 것이다. 왕비는 탁자에 꽃바구니를 올려놓고서 화환을 만드는 모습이다. 주름장식도 패물도 없다. 모슬린 드레스에, 옷깃도 아주 짧은 “상스러운” 복장으로, 노란 명주 망사로 허리띠를 삼았다. 이렇게 어린이 같은 소박한 분장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젊고 우아해 보이게 했으며, 이런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모습이야말로 그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머리는 다른 여자들과 구별되도록 위엄을 지켰는데, 곱슬머리에 밀짚모자를 썼다. 모자에는 깃털을 꽂고 파란 띠를 둘렀다. 너무 높은 이마는 가리고, 얼굴은 화가가 즐겨 다루듯 햇빛을 받아 부드럽다. 왕비의 얼굴과 분위기는 모두 “장밋빛”이었다. 왕비가 걸친 ‘대례복’은 위악적인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면서도 매력적인 풍모를 간직하도록 대중 취향에 맞춰 그려진 듯하다. 왕비는 정원을 산책하고, 꽃바구니는 장미 나무 한 그루로 바꾸었다. 화환은 그대로인데, 고운 손으로 띠를 묶는 재미는 여전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해에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총애하는 화가에게 자기 초상을 가장 많이 주문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상스러운” 초상이라는 것은 거의 똑같이 두 점씩 그려져 하나는 다름슈타트의 루이즈 드 헤스 공주에게, 다른 하나는 샤를 드 다마스 공작부인에게전했다. 하지만 그녀가 “장밋빛” 초상과 같은 시절에 두 점씩 그렸던 그림은 이와 전혀 다르다
- Ⅱ .전성기와 후원자1783~1786
비제 르 브룅의 그림은 유행의 변화에 따라 당대 여성들의 도덕관과 감정의 진보를 훑어볼 수 있게 해준다.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와 그 애독자들이 그토록 훈계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그녀가 처음 초상화를 그릴 때부터 뚜렷하다. 당시 사람들은 루이 15세 치하에서 일상적으로 그려왔던 궁정 예복이나 치장 등 거창한 옷차림을 포기하고 간편한 복장을 추구했다. 루이 16세 시대에 단순한 복장이 널리 유행하여 새로운 분규를 초래할 정도였다. 그러나 과장되게 격식을 차린 복장이 진부하다는 비판에도 장식 취미는 여전했다. 마치 청춘의 여신과 사냥과 달의 여신의 시대라는 듯이, 정숙하던 여자들이 대담하게 남성복 차림을 하는 유행을 따랐다. 항상 허구적인 자극을 원했던 여자들은 더 이상 신화가 아닌 농촌생활에서 그런 것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모든 사상은 한 방향을 지향했다. 귀족 저택에서 교묘히 자연스레 꾸민 영국식 정원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프랑스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파르테르(네모반듯하게 손질한 화단)로는 자연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찍부터 이런 식으로 가꿔놓은 정원 대신 이제 완전히 전원적인 조원(造園)을 하고자 했다. 또 가능하다면 반쯤 폐허가 된 시골 흙담집 같은 장식을 선호했다. 이렇게 이끼 덮인 벽의 그림자가 늪 위에서 너울대는, 초가와 물레방아가 딸린 집이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이미지는 밀짚모자를 쓰고 머리를 수건으로 묶고, 얇고 뻣뻣한 한랭사(寒冷紗)로 짠 기다란 목도리를 걸치고서 농촌생활의 이상을완전히 몸에 익혔음을 보여주었다. 너도나도 시골 대부인 같은 치장으로 변신했다.
여성들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이런 것이 즉시 드러난다. 폴리냐크 공작부인과 카드루스 공작부인의 초상에서 이런 변화는 뚜렷하다.
- Ⅲ. 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1787~1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