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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1918986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21-07-27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내 영혼의 나그네
세월의 뼈
여름 한낮
벽 속의 너
살아 있는 돌
전생에서의 하루
미늘의 눈
묻어 있는 시간
망각의 세월
아름다운 이별
작품 해설:음영(陰影)에서 생성되는 이별과 해후 ― 이길환
발표지 목록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때는 무조건 빨갱이는 처단해야 했고, 빨갱이가 설 자리가 없었다. 한 집에 빨갱이가 있으면 그 가족까지 몰아서 처형하는 연좌제가 있었고, 어머니는 아들에게만큼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멍에를 씌우지 않으려고 생면부지인 남자를 자신의 남편이라고 부둥켜안고 울었나 보다. 다, 나 잘 되라고.”
아버지는 다시 막걸리를 마신다. 칠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둔 한이 이제야 풀리는 모양이다. 인부들은 삽을 놓고 저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 어차피 산업단지가 조성되므로 남은 묘도 없애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연고가 없는 묘라고 시에 알리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화장하든, 다른 곳으로 옮기든 알아서 할 것이다. 나는 굴착기 기사에게 파헤쳐진 묘를 복원하라고 말한다. 할아버지의 묘인 줄 알고 명절 때마다 찾아와 절을 올린 것이 꺼림칙하다.
(「세월의 뼈」)
나는 거동을 못 하는 노인을 침대에서 일으켜 휠체어에 앉혔다. 노인은 앙상한 뼈만 남아서 깃털처럼 몸이 가벼웠다. 알아서 손수 몸을 씻는 노인들은 그나마 생활이 나은 편이었다. 실내에서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므로 식사를 끝낸 노인들은 세면장에 갔다 와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게실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모두 환자복을 입은 노인들이라 멀쩡한 노인도 환자처럼 보였다.
이곳에는 총 사십여 명의 노인이 요양하고 있다. 그중에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다. 여든여섯이나 된 아버지를 시골집에 혼자 있게 할 수 없어서 요양원으로 모셨는데,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함에도 다시 집으로 보내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성화였다.
(「살아 있는 돌」)
「호곡」에서 이미 밝혔듯이 그는 바로 그 무렵에 김설원 씨를 만났다. 이십 대 초반에서 함께 강의를 듣던 여학생이었다. 김설원 씨는 그때 발랄하고, 우울하고, 현실을 비판하고, 시위하고, 공부하고, 어디에 비위를 맞춰야 할지 모를 여자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그다음 날, 그러니까 5월 19일 20시경에 그는 광주 서구청 앞에서 김설원 씨와 함께 있었다. 그는 구경꾼으로, 김설원 씨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렸다. 시민들이 쓰러지고 피 흘리고, 군화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는 김설원 씨의 손목을 잡고 뛰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며 달렸는데 이상하게도 군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돌부린가에 걸려 그는 넘어졌다.
-형, 일어나. 잡히면 죽어. 김설원 씨가 그를 부축했는데, 군화 소리가 다가오자 그녀는 저편으 로뛰어가고 있었고 누군가가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잡는 전율을 느꼈다. 그때,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있었다. ‘저 여자가 주동자예요. 난 단지 구경만 했어요.’ 그 후로 김설원 씨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망각의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