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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91934955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11-08-24
책 소개
목차
《제인 오스틴의 비망록》발간에 붙이는 글
1부
2부
에필로그
작가의 말
제인 오스틴의 명문장
제인 오스틴의 생애
리뷰
책속에서
“나는 작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뭔가를 성취하기에 완벽한 시간이나 장소는 없어요. 우리는 해야만 할 일을 늘 미룰 핑계를 찾아내거나 선뜻 하기를 두려워해요. ‘내일 하자. 다음 주에 하자. 다음 달, 아니 내년에 하자.’ 그러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한 발만 걸친 채 주변을 뱅뱅 도는 이유가 결국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다면 사과할게요. 다만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애시포드 씨가 내게 다가오면 말했다.
나는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지금 하신 말씀이 옳아요. 어쩌면 전 지금껏 쓰지 않을 핑계를 찾았나 봐요. 더 이상 핑계 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설령 지금부터 책을 한 권 쓰고 마음에 들지 않는 문제점들을 몽땅 고친다 하더라도 어디로 보내겠어요? 문학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요.”
“왜 벌써부터 그런 걸 걱정하죠? 재능만 있으면 결국에는 다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요. 당신은 작품을 출판한 소설가가 되고 싶나요?”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문득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와 우리 머리 위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었다.
“그러면 당신은 꼭 그런 소설가가 될 겁니다. 제인 오스틴 양.”
화창한 날이면 애시포드 씨와 카산드라 언니, 나는 뉴포레스트로 마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비가 내리면 응접실 난롯가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면 나는 소설 작품 중에서 새로 쓴 부분을 언니와 애시포드 씨에게 읽어 주었다. 등장인물들을 연기할 때는 최대한 코믹한 분위기를 살리려 했다.
애시포드 씨는 내 소설과 작품의 팬이 되었다고 했다. 그와 카산드라 언니는 내가 고작 한두 페이를 완성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어서 들려 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당신의 소설은 매력적이고 재치 넘치고 낭만적이기까지 해요.” 어느 날 오후 애시포드 씨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마침 우리는 성벽을 넘어 해변의 숲 속을 거닐던 중이었다. “좀 더 대담하게 표현하자면 당신의 문체는 완전히 새로워요. 당신의 글은 서정적인 특징이 강해요.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뭔가가 느껴져요. 이런 글은 한 번도 읽거나 들어 보지 못했어요.”
“그 정도로 독창적인 건 아니에요.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젊은 자매의 이야기에 불과한걸요.” 나는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이상이에요. 내가 들은 부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사람들이 느끼고 표현하는 감정이 얼마나 정확하고 적절한지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알려 주는 토론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맞아요! 그게 바로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주제예요.” 나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처음 원고에서는 이 주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았어요. 이제 그 문제는 잘 해결된 것 같아 다행이네요.”
“당신이 창조한 인물들은, 뭐랄까 내가 잘 아는 사람들 같아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말이에요. 특히 2장이 돋보이더군요. 지금까지 내가 읽은 가장 재기 넘치는 대화였어요.”
“너무 좋게 말해 주시는군요.” 그의 칭찬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 작품은 꼭 출판될 거예요. 그렇게 되어야 해요. 이 책을 완성해서 출판사에 주기만 하면 돼요. 그러리라 확신해요.”
“물론 그동안 많은 여자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요. 자라면서 이사벨라를 누이동생처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걸로 충분하기만 바랐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나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라임에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알았습니다. 누구나 꿈꾸기만 하는 깊고 보기 드문 교감 같은 것을 우리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사벨라와 약혼한 사실을 말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당신도 당신과의 대화도 생기에 넘치고 즐거웠습니다. 다 털어 놓았다간 마법과도 같은 행복한 기분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소풍을 가서 내 상황을 털어놓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은 오지 않았어요. 저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당신을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거든요. 결국 운명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다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이사벨라와 억지로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만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확실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약혼을 파기해 달라고 다시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머리끝까지 화를 내시며 그런 식으로 명예를 저버릴 수 없다는 말씀만 하셨지요. 저는 비참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당신을 정말 만났었는지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듬해 3월 저는 사우샘프턴으로 향했습니다. 오스틴 양. 당신을 찾아내기 위해서요.”
“저를 찾아내려고?” 내 목소리는 작고 가늘어서 나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다급해졌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실제 한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느낀 감정이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때까지도 저는 언젠가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제 의무에서 풀려날 수 있기를 막연히 바랐습니다. 적어도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사벨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말할 자신이 없었어요. 사우샘프턴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을 향한 내 애정은 점점 더 커졌어요. 말을 꺼내기가 더 힘들어졌죠. 당신이 나를 밀어낼까 두려웠어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나는 어느새 눈가를 촉촉이 적신 눈물을 닦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감정이 복받쳐 목이 메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