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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한국 문화/역사기행
· ISBN : 9788991945647
· 쪽수 : 372쪽
· 출판일 : 2014-05-16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 · 5
제1구역
一步. 동구릉
건원릉 | 태조 이성계 · 24
북한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풀
현릉 | 문종과 현덕왕후 · 38
소나무 사이로 마주보는 왕과 왕비
목릉 | 선조와 의인왕후 · 인목왕후 · 47
뻗고, 꺾이고, 층진 길
숭릉 | 현종과 명성왕후 · 54
17세기 정자각은 어떻게 생겼을까
원릉 | 영조와 정순왕후 · 61
호랑이인가, 도마뱀인가, 다람쥐인가
<왕과 왕비의 나이 차가 51세?> · 69
휘릉 | 장렬왕후 · 73
잡상과 ‘어처구니없다’의 관계는?
혜릉 | 단의왕후 · 78
웃고 있는 무인석, 못마땅한 문인석
경릉 | 헌종과 효현왕후 · 효정왕후 · 82
세 개의 능을 지키는 태극 전사
수릉 | 문조와 신정왕후 · 87
왼쪽 세호는 내려가고, 오른쪽 세호는 올라간다
二步. 홍유릉
홍릉 | 고종과 명성황후 · 94
나는 황제로소이다
유릉 | 순종과 순명효왕후 · 순정효왕후 · 118
흉지와 구설수를 넘어서
三步. 사릉
사릉 | 정순왕후 · 108
죽어서도 단종을 보고 싶다
四步. 광릉
광릉 | 세조와 정희왕후 · 118
5,170종의 생물이 사는 곳
제2구역
一步. 서오릉
명릉 | 숙종과 인현왕후 · 인원왕후 · 136
장희빈의 묘는 어떤 모습일까
경릉 | 덕종과 소혜왕후 · 144
여인 천하, 인수대비 천하
창릉 | 예종과 안순왕후 · 152
청룡이 높고 백호가 낮은 땅
익릉 | 인경왕후 · 159
균형감과 정교함을 갖춘 꽃무늬
홍릉 | 정성왕후 · 164
텅 빈 왕의 유택
二步. 서삼릉
예릉 | 철종과 철인왕후 · 170
왕릉의 석물도 재사용한다?
희릉 | 장경왕후 · 176
단명한 왕후, 웅장한 왕릉
효릉 | 인종과 인성왕후 · 180
조선 왕실의 묘가 모였다
<동물 머리에 사람의 몸, 십이지 신상> · 188
三步. 공순영릉
순릉 | 공혜왕후 · 192
성종의 예술 감각을 엿보다
공릉 | 장순왕후 · 195
정자각이 하늘에 떠 있다?
영릉 | 진종과 효순왕후 · 198
최고의 명필, 정조의 능표석
四步. 온릉
온릉 | 단경왕후 · 203
잊혀진 여인의 쓸쓸한 묘
<왕의 모습을 기리다, 제향 기신제> · 209
五步. 파주 장릉
파주 장릉 | 인조와 인열왕후 · 213
17세기와 18세기가 공존한다
六步. 김포 장릉
김포 장릉 | 원종과 인헌왕후 · 222
뽕나무에 깃든 부모의 영혼
제3구역
一步. 태강릉
태릉 | 문정왕후 · 232
조선의 측천무후가 잠든 곳
강릉 | 명종과 인순왕후 · 238
비공개에서 공개로, 모습을 드러내다
二步. 의릉
의릉 | 경종과 선의왕후 · 247
홍살문 앞에 명당수가 흐른다
三步. 헌인릉
헌릉 | 태종과 원경왕후 · 256
세종의 효심이 깃든 곳
인릉 | 순조와 순원왕후 · 264
석양과 석마, 석인이 살아 있다
<조선 왕조 묘호의 비밀> · 272
四步. 선정릉
선릉 | 성종과 정현왕후 · 280
왜 화재와 도굴이 끊이지 않을까
정릉 | 중종 · 285
석상의 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
<조선 왕릉, 도굴과의 전쟁> · 297
五步. 정릉
정릉 | 신덕왕후 · 301
ㄱ자로 꺾인 참도, 입구부터 다르다
제4구역
一步. 영녕릉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 · 312
최고의 왕, 천하의 명당
<연이 떨어지는 자리, 연주리> · 318
영릉 | 효종과 인선왕후 · 324
15년 내내 수리해야 했던 왕릉
二步. 장릉
장릉 | 단종 · 334
비운의 왕, 오지에서 눈을 감다
三步. 융건릉
융릉 | 장조와 현경왕후 · 344
아름다움이 사도세자를 위로할지니
건릉 | 정조와 효의왕후 · 356
여의주를 문 용을 만나다
주 · 364
저자소개
책속에서
조선 왕릉 40기는 선릉과 정릉을 제외하고 한 번도 도굴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조선 왕릉이 도굴을 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학적인 건축 기술에 있다.
왕릉 석실의 벽과 천장은 두께가 76센티미터나 되는 화강암을 통째로 사용했다. 석재의 끝은 비스듬히 파서 이음매 부위를 서로 끼워 맞췄다. 거기다가 工자 형태의 철제 고리로 두 석재를 고정해 석실 전체를 하나로 엮었다. 입구에는 61센티미터 두께의 돌을 두 겹으로 세워 외부의 접근을 막았다.
석실 주변에는 시멘트와 비슷한 삼물을 1.2미터 두께로 둘러쌌다. 삼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하게 굳을 뿐 아니라, 느릅나무 껍질에 있는 코르크층이 물과 공기를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이뿐 아니다. 삼물 바깥에는 숯가루를 15센티미터 두께로 감싸 나무뿌리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1.2미터 두께의 잡석으로 다져 봉분을 쌓아 올렸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견고한 방지책도 도입했다. 세종의 영릉은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를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고, 입구에는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또한 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다.
- 「조선 왕릉, 도굴과의 전쟁」 중에서
세종대왕의 영릉은 이장하면서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합장릉인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둘렀으며 난간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는 한자로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병풍석 없이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 좌우에 망주석을 놓았는데 혼유석의 고석은 선대의 5개에서 4개로 줄었다. 또한 2개의 격실 사이에 48센티미터의 창문(창혈)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해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했다.
봉분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서로 엇바꾸었고 좌우로 각각 2쌍씩 8마리를 밖을 향해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했다. 봉분의 동, 서, 북 세 방향에는 곡장을 둘렀다. 봉분 앞 중계에는 문인석 1쌍, 하계에는 무인석 1쌍을 세우고 문 · 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를 배치했다.
세종은 한국의 장례 방식에도 획기적으로 기여했는데, 예조의 다음과 같은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그동안 운구를 유거로 한 것은 중국의 풍습으로,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아 불편하니 어깨에 메는 상여가 좋다.” 이후 일반인의 상여도 수레가 아니라 사람들이 메고 운반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상여는 매우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폭이 1미터도 안 되는 좁은 논두렁을 지나갈 때 양쪽에 있는 상여꾼들은 각각 발을 좁은 길의 벽에 붙이면서 한 발 한 발 전진하며 지나간다. 경사진 산비탈도 이런 형태로 나아갈 수 있다. 아무리 좁은 길도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역삼각형 피라미드의 형태를 취해 힘을 분산시키면서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 자랑하는 지게의 원리와 다름없다.
- 「영릉」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