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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92711098
· 쪽수 : 176쪽
· 출판일 : 2013-11-10
책 소개
목차
추천사
시적 언어로 표현된 깊은 사유의 시간들 - 손연자
빨래하는 날
글
그리그리나무
꿈속의 메렝게
오빠의 친구
어느 일요일
권력의 색
내 언어의 빛깔
작가의 말
옮긴이의 말
부록
도미니카공화국 소개
라틴 춤의 기원
책속에서
“보렴, 아나 로사.”/ 엄마가 말했다. / “강을 한번 보렴.” / 난 보았다. 엄마의 갈색 무릎 주위와 물집이 잡힌 붉은 손가락 사이로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엄마의 살갗에 젖은 키스를 남겨 두고서. / “이 물은 다시는 이 길로 지나가지 않을 거란다. 바다로 흘러갈 거야. 이 물은 파도와 만나 거품을 일으키고 물고기들과 헤엄을 치다가 때에 따라 살며시 혹은 거칠게 배를 쓰다듬으며 지날 거야. 내 옆에서 이렇게 재빨리 빠져나가는 이 물은 세상을 돌고 돌 거야. 도미니카공화국에서도, 내 곁에서도 멀리 떠나가서. 하지만 항상 같은 하늘, 같은 태양 아래서 흐르겠지.” / 엄마가 말했다. / 난 엄마가 한 번에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가까이서 강을 들여다보았지만 난 엄마가 그 안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을 다 볼 수는 없었다. / “네가 바로 이 강물이야, 아나 로사.” / 엄마가 속삭였다. / “하지만 바다를 만나기 위해선 도중에 바위를 부드럽게 흘러 넘어야 한단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어.” / 엄마는 상냥하게 말했다. 하지만 엄마의 갈색 눈에는 어두운 밤하늘의 조각달처럼 근심이 서려 있었다. ― 〈빨래하는 날〉 중에서
갑자기 집 안에 산들바람이 불어와 오빠의 수첩 표지가 나부끼며 펼쳐졌다. 빈 페이지들은 바람으로 가득 찼고 간절히 글을 기다리는 그 사랑스런 공백들을 내게 보이면서 한 장씩 넘어갔다. ‘그래, 몇 장만 쓰고 찢어 내면 될 거야’라고 난 생각했다. 과리오 오빠는 절대 눈치채지 못하겠지. 난 연필을 들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그래서 난 글을 썼다. 우선 한 장을 쓰고, 그 다음에 한 장, 또 한 장씩. 내가 사랑하는 이사벨 데 토레스 산과 소수아 해변에 대한 이야기로 다섯 장을 채우고 나서야 연필을 멈추었다. 남자애들에 대해서도, 내 다정한 친구 그리그리나무에 올라가는 일에 대해서도 썼다. (중략) 갑자기 불이 꺼졌다. 또 정전이다. 뭐, 차라리 잘 되었다. 안 그랬으면 쉬지 않고 글을 써댔을 테니까. / 주머니 속에 있는 종이를 만져 보았다. 두세 장만 더 쓰자. 아무도 모를 거야. 난 발가락 끝을 세워 살금살금 들어가서 촛불을 켰다. 식탁에 앉아 촛불 아래서 글을 썼다. 한 장씩 쓰다 보니 결국 오빠의 수첩에는 더 이상 빈 공간이 남지 않게 되어 버렸다. /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나 로사, 거기 있니?” / 엄마였다. 난 발딱 일어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첩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 〈글〉 중에서
어느 일요일, 하늘까지 치솟는 / 푸른 금빛 파도와 함께 / 폭풍이 불어닥쳤어요. / 코코넛나무가 세차게 흔들렸죠. / 거짓을 속삭이는 / 유령 구름과 춤을 추듯이. // 그리고 비가 내렸어요. / 모래 위에 그려진 날카롭고 창백한 말들이 / 내 인생을 바꿔 버렸죠. / 별도, 달도, / 노래도, 이야기도, / 나를 찾아내지도 숨겨 주지도 못해요. / 오빠도 언니도 / 엄마도 아빠도 / 나를 붙들지도 진정시키지도 못해요. // 비가 하는 말들은 터널 속으로 떨어졌어요. / 내가 누구인지 / 그 진실에 어두운 구멍을 남겨 두고서. / 난 누구일까? / 이 일요일의 폭풍이 다 말해 버리기 전에 / 제발 나에게 알려 주세요. ― 〈어느 일요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