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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외교정책/외교학
· ISBN : 9788993027907
· 쪽수 : 415쪽
· 출판일 : 2017-06-01
책 소개
목차
머리말 : 나는 어떤 외교를 지향했는가
1부 학문의 길
500년 서울 토박이 : 나의 출생과 성장의 배경
전쟁과 평화 : 초등학교 시절의 6·25전쟁
북침인가, 남침인가 :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논란
영어에 눈뜨다 : 내가 영어를 배운 4가지 방법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 미국과의 첫 대면
다시 한 번 생사의 고비를 넘다 : 대학 시절의 4·19혁명
다양한 세상을 만나다 : 미국 유학 시절
유대인과 한국인 : 뉴욕시립대 교수 시절의 견문
전두환 대통령에게 한미관계 강의 : 고려대 교수 시절
활동 무대를 넓히다 : 민간외교 참여
뉴스위크와의 인연 : 영어 칼럼을 통한 나의 정치 활동
학문과 현실 정치 : 학계 대표로 현실 외교 참여
2부 외교의 길
외무 장관을 맡아주시오 : 김영삼 대통령의 ‘깜짝 인사’
장관도 대통령도 모르는 것은 배워야 : 취임 후 아쉬웠던 점들
“인사 청탁은 받지 않겠습니다” : 믿고 맡겼던 김영삼 대통령
미국의 폭격을 막아라 : 북한의 NPT 탈퇴 선언
1994년 6월 : 북핵 위기와 한국·미국·중국의 대응
미국의 북한 공격을 한국이 막았다? :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의 진상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 불발로 끝난 남북 정상회담
미국이 북한에 너무 끌려다닌다? : 제네바 합의를 둘러싼 갈등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 제네바 회담의 득과 실
가깝고도 먼 사이 : 한일관계의 과거와 미래
정치냐 경제냐 : UR과 쌀시장 개방
신외교의 다섯 가지 목표 : 퇴임에 얽힌 이야기들
장관 시절 만난 사람들 : 부트로스-갈리·페레스·첸치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 언론과의 관계
3부 다시 외교의 길로
반미 대통령, 친미 대사 : 내가 주미 대사가 된 속사정
반미 대통령의 친미 정책(?) : 2004년 5월 한미 정상회담 전후
노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했던 파병 : 한국의 이라크 파병
미국의 대통령 선거 : 이해하기 어려운 미국인의 선택
북핵과 또 다른 위기 :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미·북의 갈등
“노 대통령, 큰 텐트를 치세요” : 국내 정치와 대미 외교
황장엽의 미국 방문 : 황장엽과의 짧은 만남
한승주 대사는 너무 차분한 사람 : 워싱턴에서의 교류
한미 FTA와 쌀 개방 : 소홀히 할 수 없었던 통상 문제
주미 대사 22개월을 돌아보며 : 장관 시절과의 차이
대통령의 언행 불일치(?) :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정책
혹 떼려다 혹 붙이다 : 북한의 고백 외교
강경이냐 온건이냐 :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양국의 갈등
주미 대사직을 마무리하다 : 장관과 대사 시절의 보람
4부 민간외교의 길
분단국의 비극 : 키프로스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
인종학살의 비극 : 르완다 인종학살 조사위원
동아시아 비전그룹(EAVG) : EAVG 의장
주미 대사 이후의 민간외교 : 삼각위원회 등
에필로그 : 우리 외교의 다섯 가지 도전
맺는말 : 실용주의 외교를 향하여
부록
외교란 무엇인가? : 통념과 실제
세계화시대와 한국의 외교
불안정한 삼각관계 : 중국과 일본 사이의 한국
한반도의 분단 관리와 통일 문제
주요 해외 신문기사와 인터뷰 동영상
약어 일람
저자 연보
집필 후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아홉 살 때인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이고, 두 번째는 195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에 2개월간 연수를 다녀온 것이고, 세 번째는 1960년 4·19혁명에 참여한 것이다.
9월 27일 밤에는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서울 근교까지 들어와 동대문 밖 창신동 일대에 포탄을 쏘아 댔다. 그 와중에 총알만 한 파편이 날아와 내가 입고 있던 바지를 뚫고 오른쪽 엉덩이에 박혔다. 부모님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나를 업고 포격을 피하여 부친의 친구가 살고 계신 의정부 마전리 쪽으로 향했다. 창동쯤에서 북한군이 서울 전투에 투입되기 위해 길가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내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더니 배낭에서 자기 어머니가 주었다는 명주천을 꺼내 내 상처 주변을 묶어 지혈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그때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다.
맨손의 시위대에게 공포탄도 아닌 실탄을 쏜 것이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기 위해 바닥에 엎드려 다른 사람 밑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나도 얼른 엎드렸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긴박한 순간, 나의 스무 살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잠시 후 나는 낮은 포복 자세로 골목길로 들어가 진명여고 담장을 넘어 학생들이 수업 중인 교실로 몸을 피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총소리가 멎은 후 나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날 경무대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만 무려 50여 명에 달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