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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3489040
· 쪽수 : 335쪽
· 출판일 : 2010-02-02
책 소개
목차
007_1. CR4팀
038_2. 12개의 날
067_3. 오피스레이디의 포토타임은 오전 10시!
101_4. 남자와 생리대는 겪어봐야 안다.
163_5. 역주행
212_6. 화통기획
246_7. 기억하지 말고, 잘 지내죠!
276_8. 하자, 하지 마. 그냥 하자!
331_9. 어디까지 왔니?
저자소개
책속에서
1.
어렸을 적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말야. 아, 그 땐 아직 국민학교였지. 세탁비누... 쌩쌩한 것 하나 조각도……. 각각 모양이 다른 여섯 개들이 한 세트 이렇게 준비를 했거든. 그래. 내 조각도는 여섯 개 들이였어. 초승달 모양과 그 반대 끌 모양 직각 빗살 사각 그리고 V자 홈 작은 것, 큰 것. 그런데 옆 자리 친구의 조각도는 열두 개의 칼날이었어. 뭐 뭐가 들었는지도 잘 모르겠는 각양각색의 조각도. 세탁비누로 두상 깎기를 했는데 그 때 그 두상을 깎으면서 정말 칼날이 열두 개나 필요했는지는 모르겠어. 여섯 개만 가지고도 멋진 두상을 만들었지. 머릿결 모양은 작은 V자 홈 칼로 입 모양은 빗살 사각조각칼로 끄트머리를 세워서 날카롭게 깎았어. 그 땐 그랬어. 칼날이 많아서 더 좋을 것도 없었고 좋은지도 몰랐고…….
면도기를 한참 쓰다보면 왠지 날이 잘 안들 때가 있어. 성곡이나 균세는 잘 알겠구나. 평소 같으면 그냥 슥슥 문지르면 수염이 잘 밀려나갔지. 날이 동그랗게 세 개가 중심을 향해 모여 있는 파란 몸체의 필립스 면도기야. 근데 그렇게 한참 쓰면 대개 칼날이 무뎌져서 수염이 잘 안 깎이게 돼. 칼날이 세 개나 되는데 말야. 어느 날인가 면도기를 거꾸로 잡았어. 거꾸로 잡고 면도를 하는데 평소보다 더 빨리 그리고 깨끗하게 깎이는 거야.
그래. 안 쓰이던 칼날이 있었던 거지. 늘 잡던 익숙한 손잡이를 버리고 면도기의 헤드를 잡고 슥슥 밀었더니 슥슥 깎이는 거야. 그 안 쓰이던 칼날이 제대로 쓰인 거야. 날이 열두 개든 날이 여섯 개든 아니면 세 개든……. 당신들 속엔 쓰이지 않은 칼날이 몇 개 쯤 분명 숨어있어. 늘 쓰던 익숙한 그 칼날 대신 숨어있는 그 칼날을 꺼내봐.
거꾸로 잡든, 옆으로 잡든 왼손으로 잡든 오른손으로 잡든…….
하지 않던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해봐 . 그것도 열심히. 그러다보면 그 새로운 칼날이 어느새 당신들의 또 다른 칼날이 되어 제 실력을 발휘할 거야. 그거 아나? 당신들이 늘 무엇인가를 보는 눈은 두 눈이 아니라 한쪽 눈뿐이라는 거. 자 이 손가락을 눈 앞 정 가운데라고 생각되는 곳에 대봐. 얼른 대봐. 그리고 한쪽 눈을 감아봐. 왼쪽 눈, 혹은 오른쪽 눈. 한쪽 눈을 감았을 때 처음에 놓았던 그 위치에 손가락이 그대로 있다면 당신들은 주로 그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거야. 맨날 한쪽 눈으로 다른 이의 얼굴을 보는 거같이 당신네들 마음도, 당신네들 자신감도 실력도 맨날 보던 그 눈으로만 보는 건 아닌가 생각해봐. 어쩌면 말야. 한쪽 눈을 감았을 때 손가락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그 눈으로는 아마도 보려는 시도도 잘 안 했을 거야. 누군가의 마음을 볼 땐 다른 눈을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럼 어쩌면 다른 면을 보게 될 지도 모르니까. 그게 어쩌면 당신들의 또 다른 칼날이 될 지도 모르니까. 여섯 개와 그리고 다시 여섯 개를 더해 열두 개의 칼날로 새겨나가는 또 다른 면의 '인생' 말야.
2.
“그 사람이라면 나도 들어본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그런 거물이 커머셜을 찍겠다고 하게 됐나요?”
공상무가 흥미가 있는지 질문을 한다.
“그는 처음엔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카메라야말로 문명의 총화라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들과 잘 맞는다고 했답니다. 어차피 돈을 받더라도 기부를 하면 되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겁니다. 게다가 콘티를 보여줬더니 참 좋아했다고 하네요.”
공상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먼저 이 사람이 한국의 상징적인 곳에서 카메라를 집어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이어서 5분 후부터 동시다발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별다방, 콩다방에서, 공항에서, 버스정류장에서 200명의 도우미들이 카메라를 집어 던지게 됩니다. 그런 후 바닥에 엎어져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지요. 이 퍼포먼스의 상징적 대표작가가 아까 말씀드린 에인 클라모에 입니다. 이 작가를 통해 언론에 기삿거리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별다방, 콩다방이요?”
화통 사장이 중간에 되물었다. 김만휴가 요즘 잘 나가는 커피전문점의 별명이라고 말해주고 사람들이 한바탕 와르르 웃었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여자들과 그녀들이 못 생기게 나오도록 찍는 카메라에 테러를 한다 이거죠? 이거 여자들의 보복이군요. 재밌겠네요. 그러면 TV는 그 퍼포먼스를 찍어서 나가는 겁니까?"
제작 본부장이 질문했다.
"같지만 다르게 하려고 합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카메라를 집어 던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인터넷에서도 카메라를 집어 던지는 게임을 개발해서 선보일 것입니다. 화면에 카메라가 나오고 자신을 찍게 됩니다. 물론 화상카메라가 달려있다면 최상의 게임을 즐길 수 있는데 그렇게 찍은 사진은 가로로 세로로 왜곡되고 일그러진 사진이 됩니다. 화면에서 찍힌 사진이 마음에 안 들게 되어 게임 속에 있는 카메라와 렌즈를 벽에 그려진 타깃에 집어 던집니다. 요즘 같을 때 속이 후련하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 게임입니다. 그리고 TV광고는 퍼포먼스가 매스컴에 릴리즈 되고 나서 딱 3일 후부터 방송을 타게 됩니다. 그러면 콘티를 보여 드리면서 설명을 계속 하겠습니다"
화면에서는 여러 가지 이벤트와 플래시몹에 대한 자료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스토리보드가 등장했다.
3.
공상무가 홍콩에 있는 린타스 월드와이드 아시아 총괄 본부에 모습을 보인 건 김만휴가 이틀 동안 잠자는 걸 포기하고 완성한 보고서를 공상무에게 건넨 다음 날이었다. 그 날은 홍콩에 있는 린타스 아시아 총괄 본부에서 아시아 전역의 린타스 계열사들이 모여 분기별 실적과 그때까지 제작된 크리에이티브를 선보이고 앞으로의 포캐스팅까지 협의하는 린타스 아시아 컨퍼런스 데이였다. 공상무가 보고서 작성에 단지 이틀 여유밖에 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 날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컨퍼런스가 끝난 후 공상무는 홍콩 린타스 사장을 겸하고 있는 린타스 아시아 총괄 사장 박승하와 독대하고 있었다. 박승하는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월드와이드 광고그룹 린타스의 아시아 CEO 공개모집에서 발탁되어 이슈가 된 인물이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민화동 사장이라 그건가요?”
“과거 린타스 코리아는 아시아 지역 총매출에서 린타스 저팬보다 많은 35%를 차지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불과 15%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번 프레젠테이션을 린타스가 가져왔다면 꽤 큰 매출 상승이 있었겠지요. 뭔가 획기적인 대안이 없다면…….”
"패배한 원인이 뭡니까?"
공상무는 숨 가쁘게 돌아갔던 대행사 결정 과정에 대해서 박승하에게 설명했다. 자신이 화통 사장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린타스 코리아가 나쁜 관행의 선두주자가 될 수 없다는 화통 사장의 말은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경영 기법으로 매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