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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한국 문화/역사기행
· ISBN : 9788993553345
· 쪽수 : 408쪽
책 소개
목차
상권
01. 때를 잘못 만난 한국 최대의 실학자, 정약용
02. 조선의 최연소 대제학, 이덕형
03. 조선을 세운 혁명적 제왕, 이성계
04. 쿠데타로 왕권을 강화한 임금, 세조
05. 격동의 시대를 산 비운의 황제, 고종
06. 안동 김씨 명문가의 초석, 김번
07. 조선의 정승 맹고부리, 맹사성
08. 기업은 사람이다, 삼성의 이병철
09. 정조의 지팡이가 된 명재상, 채제공
10. 한글 창제의 으뜸 공신, 신숙주
11. 조선이 낳은 으뜸 충신, 이항복
12. 대구 서씨 명문가의 배경, 서성
13. 3대로 이어진 대제학, 이정구
14. 한국을 잘사는 나라로 이끈 정치가, 박정희
15. 구도장원한 조선 최고의 천재, 이이
16. 18년 조선의 최장수 영의정, 황희
17. 여진을 정벌한 고려의 명장, 윤관
▣ 풍수 용어 해설
▣ 참고문헌
하권
01.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02. 80만 거란군을 물리친 외교가, 서희
03. 왕건을 위해 순절한 충신, 신숭겸
04. 조선의 대표 암행어사, 박문수
05. 처신과 출세의 지략가, 한명회
06. 한국의 3대 명필가, 김정희
07. 2대 황제를 배출시킨 야망가, 흥선대원군
08. 백성의 마음과 소통한 기인, 이지함
09.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성웅, 이순신
10. 술에 취해 충효를 노래한 시인, 정철
11. 송자(宋子)로 추앙받는 큰 학자, 송시열
12. 명나라 주지번의 스승, 송영구
13. 광산 김씨 명문가의 가교, 김극뉴
14. 호남 유일의 문묘 배향자, 김인후
15. 군주가 부럽지 않던 가인(歌人), 윤선도
16. 동방의 주자로 추앙받는 학자, 이황
17.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공신, 유성룡
18. 평생을 처사로 산 큰 선비, 조식
19. 죽장에 삿갓 쓴 방랑자, 김병연
▣ 풍수 용어 해설
▣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채제공의 업적과 체취가 흠뻑 배인 파워스폿은 그의 묘역이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5번지로 청광아파트 뒤쪽의 산기슭이다.
묘로 오르는 초입에는 ‘어제뇌문’이 새겨진 비가 보존된 비각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아한 건물 안에는 뇌문비가 서 있고, 비의 전면에는 정조가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죽음을 애도한 500여 마디의 글들이 흑요색의 비신에 새겨져 있다.
비의 측면과 후면에는 글자가 없이 깨끗하다. 서두에 ‘소나무는 높고 높아 송연히 솟아 있고, 산 또한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 하며 채제공을 칭송했으니 세상에 다시없는 예우가 아닐 수 없다. 채제공은 정조가 재위한 24년 중 23년을 보좌하고 정조보다 1년을 앞서 숨졌다. 그러자 정조는 식사도 하지 않고 곤룡포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슬퍼했고, 장례일에는 승지에게 제문을 보내고 문숙이란 시호를 내렸다.
뇌문비의 위쪽에 새겨진 ‘어제뇌문’이란 글자는 200년이 지났어도 또렷하고 임금의 친필이기 때문에 이 비에는 찬하고 쓴 사람의 기록이 따로 없다. 많은 고관대작의 신도비를 보았으나 임금이 직접 지은 뇌문은 세상에 흔한 것이 아니다.
‘뇌문’은 ‘죽은 이의 명복을 신에게 비는 글’이란 말이니 보석보다 귀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장점보다는 단점을 보기 쉽고 좋은 말보다는 흉을 보기 쉬운데, 그 중에서 군신관계는 사랑[親]보다는 올곧음[義]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난세에 ‘인간경영’의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만지고 쓰다듬어야 할 비석이다.
- <수도권> p.203, “정조의 지팡이가 된 명재상, 채제공” 중에서
이황은 당장 먹고살 걱정이 태산인 백성들의 탄식은 외면한 채 팔짱을 끼고 불구경하듯 엉뚱한 소리나 이러쿵저러쿵하는 조정의 대신들이 밉고 싫었다. 그래서 벼슬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가 호시탐탐 벌인 노력은 눈물겨웠다. 하지만 사표는 번번이 반려되었고, 사양할수록 더 높은 품계와 작위가 되돌아왔다. 그것은 골치가 아픈 정도를 넘어 공포였다.
명종의 눈물겨운 출사 요구에 “어리석음을 숨기면서 벼슬하는 것은 도둑질이다.”라고 사양하며 일체 응하지 않더니 1561년 도산서당을 세워 7년간이나 후진 양성에 박차를 가해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무더기로 길러냈다.
선조가 즉위하자 끝내 거절할 수 없어 68세에 대제학을 역임하며 기대승과 함께 경연에서 『대학』과 『예기』등을 강론했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지며 그만큼 스트레스가 클 수밖에 없다. 1569년 이조 판서로 임명됐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낙향했다. 이황은 벼슬길로 나가 종1품까지 올랐고, 70여 차례나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벼슬에는 욕심을 내지 않은 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쓰다 1570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황은 후손들이 미사여구로 찬한 묘비를 세울 것을 염려해 스스로 묘비명을 직접 써놓고 “후면에는 본관, 조상 내력, 입지, 행장만을 간단히 기록하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문(銘文)을 쓰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현재 묘비에는 생전에 자신의 생애를 4언 24구 94자로 압축한 자찬 묘비명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 <지방권> pp.342~355, “동방의 주자로 추앙받는 학자, 이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