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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93703481
· 쪽수 : 322쪽
· 출판일 : 2018-09-30
목차
차 례
책머리에 … 5
1. 생활의 장
같이 살자 … 15
기차가 떠난 자리 … 18
하트 마크 자전거 … 21
두 편지 … 26
살아 있음의 선물 … 35
창밖 사계 … 38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 42
매화 … 47
저녁 … 50
새봄 예찬 … 54
기도 … 57
시월 … 60
산책길 그 쓸쓸한 즐거움 … 62
평범한 날의 일기 … 67
마루가 있는 집 … 71
조갯살을 먹으면서 … 74
2. 사색의 장
중대암(中臺庵) … 79
태풍이 지나간 뒤 … 82
사슴 조각상을 바라보며 … 85
나무 … 88
사과 … 92
윷놀이 판에서 인생을 배우다 … 95
능선길을 걸으며 … 99
백자 항아리 … 103
나무 잔받침 … 105
화석 속 물고기 … 108
폭설이 내린 후 … 111
감나무에게서 배우다 … 114
다탁 앞에서 … 117
3. 여행의 장
백두산 꽃은 돌만큼 큰다 … 123
이발소와 크레믈린 … 127
나무가 있던 풍경 … 131
풍경 속 길 끝에서 … 134
사회과 부도와 타지마할 … 138
블레드가 그리워 … 142
쌀밥 한 접시 … 146
내 경의의 대상 스위스 … 149
모넴바시아 … 153
풍경의 그리움 … 156
신성리 … 160
흘러가는 물처럼 … 163
불빛 … 167
조약돌 … 169
수덕여관 끝 방 … 173
접이의자 두 개 … 175
4. 자연의 장
달밤 … 181
어느 날 바닷가에서 … 183
노을 보러 가는 길 … 186
가을과 겨울 사이 … 188
벚나무 아래서 … 190
무인도에서 띄우는 편지 … 194
계룡산 가을비 … 197
아름다움의 거리 … 200
가을날 … 203
산 속에서의 합창 … 206
5. 추억의 장
다시 끌려간 검둥이 … 213
뻐꾸기의 단식 투쟁 … 218
집으로 가는 길 … 223
시계가 걸려 있던 집 … 229
향촌 사계 … 232
구물삼제(舊物三題) … 238
풍뎅이가 보여 준 것들 … 242
못 생긴 홍두깨 하나 … 247
학교 다니던 길 … 250
조기를 먹을 때면 … 254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들 … 256
흙빛 항아리 … 259
떠돌이 시인 … 261
순수에의 옹호 … 266
잊지 못할 제자 … 269
분꽃을 보며 … 274
6. 독서의 장
가방 속 책 한 권 … 281
책 … 284
백석시를 읽는 밤 … 288
아라베스크 문양의 끝 … 295
고조산책(古調散策) … 298
전각 글씨를 들여다보며 … 306
사군자를 배우며 … 310
책읽기의 즐거움 … 314
붙임 글 … 319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새소리에 잠 깨어난 아침 시간이 나를 기쁘게 한다.
화단에 돋아나는 새싹, 촛불처럼 피어나는 튤립, 처마 밑에서 들려오는 제비들의 재잘거림, 나비처럼 피어난 하얀 목련, 그 사이를 오가며 짝짓기에 여념이 없는 새들의 자태. 그 꽃그늘 아래에서의 나의 발길이 내 마음을 그들 같은 기쁨으로 이끌어 간다.
구름처럼 피어 있는 벚꽃! 그 아래로 외투를 벗고 나온 좀 추울 것도 같은 늘씬한 다리의 처녀애들. 걸어가는 젊은 여인의 몸매, 대학 캠퍼스 너른 잔디밭에 앉아 있는 동료이거나 연인들의 모습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한다.
프리지어 향기, 풀 속에 숨어 핀 앙증스런 제비꽃, 홀로 걷는 둑길에서 웃고 있는 민들레의 무리, 겨울을 감내하고 피어난 인동꽃의 내음, 패랭이꽃, 재잘대는 채송화의 웃음. 내가 웃음으로 느낄 때엔 내 마음부터가 벌써 즐거운 것이지만, 그 작은 미소들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한다.
이슬비 내린 초봄!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 단풍나무 잔가지에 맺힌 수많은 물방울들이 보석처럼 빛날 때, 나는 그 순간적 장면을 사랑한다.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야영을 하며 듣는 계곡물 소리, 고산(高山)에서 보게 되는 저녁노을, 봉우리만 남기고 안개에 묻힌 산, 흰 눈에 뒤덮인 산야(山野),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을 더없이 신비롭게 한다.
신록의 계절 숲으로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가게 될 때, 내 마음은 시작부터가 행복하다. 양산처럼 펼쳐 내린 나무, 오월의 투명한 햇살 속에 선명히 드러나는 잎맥. 아직 벌레들도 생기지 않은 숲 속 어디선가 휘파람새 소리가 들려오거나, 아주 먼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로 젖어들게 될 때, 그리하여 고요히 발길 멈추고 ‘오! 내 사랑하는 계절이여, 또다시 돌아왔구나!’ 하고 홀로 외일 때, 나는 흔히 행복한 느낌 속에 머물러 있다.
불빛에 비친 벚꽃나무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산벚나무꽃이 만발한 시골길을 달려가게 될 때, 나는 어느새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다. 그런가 하면 꽃 핀 때죽나무 그늘에 앉아 보거나, 커다란 목백합나무가 만개한 꽃송이를 달고 바람에 일렁일 때, 나는 대체로 감동하게 된다. 그런 감동을 느끼며 사는 삶을 나는 또한 사랑한다.
달 밝은 저녁 여울을 흘러내리는 물소리, 싱그러운 봄 숲 속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뻐꾸기 소리, 사원(寺院) 가까운 숲 속에서 후투티의 낢을 다시 보게 될 때, 푸른 벌판 백학(白鶴)의 비행. 바닷가 여행지에서의 아침 잠결에 귓가로 젖어드는 파도 소리, 일몰 후 드넓은 해변에서 보름달의 떠오름을 다시 보게 될 때, 그 또한 나를 더없는 기쁨으로 몰고 간다.
이슬 머금은 장미꽃의 매혹! 저녁 햇살 속에 피어나는 분꽃, 향기 짙은 백합, 못 가득 피어있는 연꽃의 모습, 관심 저만치에 밀려 있다 나팔 불듯 피어난 선인장 꽃잎. 이 모든 것들을 나는 또한 사랑한다.
다시 보게 되는 고향 마을의 느티나무, 청보리밭의 비릿한 풀 내음, 찔레꽃 향기, 솔밭을 스쳐오는 바람, 늦가을 논둑길의 풀 타는 냄새, 빨갛게 타 들어가는 모닥불. 농가의 저녁연기,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 누룽지 눋는 냄새, 고향집에 누운 밤 완숙에 지쳐 뒤란에서 ‘툭-’ 하고 들려오는 알밤 떨어지는 소리. 뭐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한다.
암수 서로 정답게 모이를 쪼아 먹고 있는 토종닭의 무리, 짚으로 싸 묶은 달걀 꾸러미를 보거나, 뽀얗고 갸름한 달걀에 남아 있는 따뜻한 온기를 느껴 보게 될 때, 혹은 물 마시는 새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연히 알이 담겨 있는 새둥지를 발견하게 될 때, 그것들은 또한 그처럼 다정스런 느낌들을 가지게 한다.
뜻하지 않게 만난 옛 친구, 먼 타처(他處)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보게 될 때, 그리하여 고향 사투리를 다시 듣게 될 때, 어린 딸내미가 친구들과 놀며 서로 지어내는 작은 미소들. 진열대 위에서 매일 웃고 있는 목각 인형 ― 그것은 러시아의 어느 장인이 만든 일곱 인형, 그 자잘한 미소가 나를 또한 즐겁게 한다. 그런가 하면 맛있게 먹거나 즐겁게 노는 내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아내의 웃음 띤 얼굴,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또한 행복하게 한다.
비단결이나 벨벳의 감촉! 옥상에 빨아 넌 새하얀 옷가지들. 몸이 약간 불편하여 홀로 잠시 누워 있게 될 때, 그리하여 명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 보게 될 때, 아니면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복도 층계에서 반갑게 나누는 인사하는 소리가 나를 또한 즐겁게 한다.
강을 따라 펼쳐진 누런 갈대밭, 떼 지어 나는 겨울 철새들, 홀로 걷는 길가에 늘어서 있는 플라타너스, 가을 누런 벌판으로 날아내리는 참새 떼, 소국(小菊)의 무리,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노을 진 저녁 강가 그 잔잔한 물결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을 다시 보게 될 때, 나는 그저 보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만났을 때, 푸른 들판을 뚫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달빛 속의 달맞이꽃, 맑은 물속에서 몰려다니는 피라미 떼, 여름 먼 길에서의 맑은 우물물, 비 온 뒤의 뭉게구름, 밤하늘의 초록 별빛, 안개 걷히는 호수, 새벽 낮달,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 보도(步道)를 뒤덮는 노란 은행잎, 마른 잔디이거나 쌓인 낙엽에 누워 푸른 하늘 우러를 때, 가로등불 밑으로 나뭇잎이 지거나 눈송이가 날릴 때, 내 마음은 또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크리스마스 무렵 가로수에 설치한 꼬마전구의 휘황한 불빛, 감동 깊은 영화의 한 장면, 불꽃놀이의 밤! 그런가 하면 푸른 잔디밭에서 골프하는 모습, 짝을 이뤄 타는 피겨 스케이팅의 조화로움, 체조 경기에서 완벽한 성공을 거둔 운동선수의 환희에 찬 미소가 나를 또한 기쁨으로 이끌어 간다.
글을 쓰다 하얗게 밝힌 밤, 홀로 듣는 새벽 종소리! 늙은 어머니의 기도 소리, 존경한다는 편지글을 받아 보게 될 때, 혹은 고적한 겨울 밤 눈을 밟고 오는 소리, 그리고 기다렸던 노크 소리가 나를 또한 기쁨으로 몰고 간다. 그런가 하면 원고료나 출장에서 남은 몇 푼 가외의 돈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한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가족과의 외식이 이루어질 때, 그것은 아내나 아이들을 뜻하지 않게 기쁘게 하는 것! 나는 기쁨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매순간들을 사랑한다.
맘에 드는 그림을 바라보게 될 때, 또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게 될 때, 읽을 만한 좋은 책을 수중에 넣었을 때, 그리하여 편안히 누워 그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될 때, 나는 정말 행복하다. 사소한 것들과의 만남, 그 접촉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느낌의 순간들을 이렇게 적어 보는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나는 다행으로 여기며,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복잡하지도 않은 읍내에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자연을 몸으로 느낄 수 있고, 느끼며 산다는 것에 우선 행복감을 갖는다. 자그마한 기쁨들을 행복이려니 생각하며 사는 삶이 나는 좋다. 말하자면 내가 건강히 살아 있으니 좋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좋고, 내가 사랑할 사람과 새로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 나는 좋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 어디서나 행복에 닿아 있다. 나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될 수만 있다면, 나 또한 그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기쁨이고 행복이고 싶다.
(1994)
시월
시월의 무르익음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게 하는 계절이다. 가족 간에 모여 웃는, 오랜만에 함께 나누는 넉넉한 잔칫상이다.
시월은 코스모스와 국화의 달이요, 시월은 단풍의 달이다.
또한 시월은 무엇보다도 과일의 달이다. 포도, 사과와 배, 감과 대추, 밤 등 ― 포도 향으로 흘러넘치는 과수원, 산기슭에서 가지를 늘어뜨리고 붉게 익어 가는 사과, 배는 먹음직하게 누렇게 큰 열매로, 감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주홍빛으로 빛난다. 대추는 뜰 안에 붉고, 숲은 알밤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여름이 가져다 준 이 풍요함…….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라는, 릴케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다.
시월의 빛은 들판의 황금빛이거나 아니면 청명한 하늘빛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가던 길 멈추고 온 길을 잠시 뒤돌아보게 하는 빛이다.
시월은 이처럼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회상케 하는 달이요, 지난 계절의 은혜로움을 되새겨 보게 하는 달이다. 때문에 시월은 마흔한 살 중년 고개를 넘긴 사람들이 가까이하는 달이다.
하늘은 흘러내릴 듯 푸른 빛! 그 빛 하나로 넓은 호수를 이루고 구름이 돛배 되어 흘러간다. 그런 하늘 밑엔 으레 들국화가 핀다.
이 세상 어디에 우리나라 시월의 하늘처럼 해맑은 곳이 있을까? 누런 플라타너스 널따란 잎새의 잎맥이 가을볕 속에 드러난다. 산책길 거닐며 다시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 조각을 본다. 참으로 맑고 푸르다. 이렇듯 시월은 경건히 하늘 우러르게 하는 달이다.
시월에는 온 날을 세지 말고 갈 날을 세지 말자. 잠시 만족해하자.
짙푸른 하늘에 눈을 박고 맑아진 가을물 소리를 듣는다. 이처럼 세상이 다 맑아지니, 마음까지도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어디선가 볕 속에 풀 마르는 냄새가 흘러온다. 풀숲에서 뛰어오르는 메뚜기, 여전히 살아 있음이 좋다.
제비들이 떠난 하늘엔 푸름만이 가득하다. 밤이면 달이 밝고, 귀뚜라미 울고, 이제 또 다른 철새들이 점점이 길 놓아 오리라.
폭염과 장마의 계절을 거쳐 내게 당도한 가을. 내 여기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인가? 나도 이제 열매처럼 서서히 익어가는 것…….
풍요로운 시월이 햇살 속에 향기를 더해 가고 있다.
(1996)
산 속에서의 합창
제자 중에 중학교 2학년 나이에 대학에 가 천재성을 발휘한 녀석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들은 이곳 서천에 집을 놔두고 더 깊은 산골에 가 살고 싶다며 부여 만수산 가까이에 가 살고 있는 분들이다. 어떻든 자유롭고 멋스럽게 사는 이들이, 기억에 남는 아들의 초등학교 때 선생님 한분과 중학교 때 선생님 한분을 모시고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은데 오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여선생님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그러마 하고 허락을 했다.
즐겁게 점심을 마친 우리는 산책이나 하자며 만수산 태조암 가는 길을 걸었다. 늦가을 빛이 더없이 맑은 오후였다. 단풍이 든 산도 아름답거니와 흰 자작나무 숲 또한 시원스레 보기 좋았다. 그런가 하면 길가에 끝없이 늘어선 감나무의 붉은 알들이 푸른 하늘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다.
비어 있는 암자를 거쳐 산책길을 내려오던 중에 제자가 선생님인 나를 업어주겠다고 했다.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녀석이 대견스러웠지만, 부모님이 계신데 업혀 가는 것도 뭣하고 해서 사양을 했다. 그랬더니 주변 풍경에 흥이 났던지 두 부자(父子)가 그러면 함께 선생님을 위해서 노래를 불러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음악에 소양이 깊고, 특히 첼로 연주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수인이 작시․작곡한 신작 가곡 「내 마음의 강물」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KBS 열린 음악회’ 때 한두 번 들러본 노래인 것도 같았다. 좋다고 했더니, ‘강물’의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지만, 좋아서 자주 부르는 노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하며, 갑자기 두 부자가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너무 커 약간은 당황도 했지만, 가을 정취에 젖어 대자연 속에서 부르는 노래는 그야말로 육성(肉聲)의 신선함이 느껴졌다. 그 노래는 계곡을 차오르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듯싶었다. 그리고,
새파란 하늘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국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하고, 1절이 끝났다 싶을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왼쪽 산봉우리 숲 속에서 우렁차면서도 아주 선명한 노랫가락이 이곳 감들이 꽃처럼 달려 있는 계곡을 향해 흘러내려 왔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단풍나무 숲 사이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마 산마루까지 오른 산나그네인 듯싶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그 깊은 계곡에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음색(音色) 또한 선명했다. 1절을 듣고 흥이 났던지 바로 2절을 이어 불렀던 것이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흥(興)이란 노래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 그들은 풍류인(風流人)일 것이 분명했다. 그때 두 부자는 갑자기 흘러온 노래에 이건 또 무언가 싶어 잠시 노래를 멈추고 있다가, 아하 오늘 뭔가 통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싶었던지 더욱 큰 소리로 산봉우리를 향해 2절을 함께 불러 제꼈다. 그야말로 단풍든 온 산을 가득 메우는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의 합창이었다.
양쪽 산봉우리 사이 푸른 하늘로 마침 흰 구름덩이 하나가 흘러갔다. 더없이 맑은 하늘 밑으로 단풍이 흐드러진 가을날이었다. 그때 계곡과 산봉우리에서 마주 부르는 노랫소리는 그 어떠한 음악보다도 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붉게 물든 산을 배경 삼은 그 노래는 마치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대자연의 합창과도 같았다. 가을 숲 속에서 내게 바쳐진 노래라 생각하니, 더욱 잊지 못할 진한 감동으로 밀려왔다.
이처럼 노래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대변해 줄뿐 아니라, 사람 마음을 한층 더 고양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동질감 속에 함께 어울리게도 하는 등 참으로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시켜 준다. 노래는 나그네의 길동무요, 분위기에 동화된 감정의 유로(流露)다. 나아가 아름다운 그 장소에 대한 친근감과 찬미의 표현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지난 세월을 그리워하며 그렇게 천천히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헤어져 돌아오면서 나는 제자에게 책을 선물하였고, 그분들은 또다시 내게 직접 가꾸어 캔 것이라며 고구마를 차에 실어 주었다.
산 계곡을 빠져나와 점점 멀어져 왔으나, 메아리 된 그 노래는 그때껏 내 가슴에 남아 흘렀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