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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93854039
· 쪽수 : 304쪽
· 출판일 : 2009-07-27
책 소개
목차
제1부 생사를 건 암투, 그 슬픈 정치의 역사
긴 겨울 끝에 찾아온 ‘운현궁의 봄’
도령님, 도령님, 강화도령님
임금의 형님으로 살아간다는 것
치마폭에 휩싸인 임금
개혁을 좌절시킨 한밤의 쿠데타
민심도 외면하는 권력의 속성
유배길에 오른 ‘유토피아의 꿈’
끝내 사약을 받고 만 시대의 꿈
조광조의 죽음 그리고 중종의 변명
한양 천도를 둘러싼 갑론을박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국운을 건 한판 승부
새로운 도읍에 성리학 이념을 구현한 신진세력
정조가 화성으로 간 까닭은
목숨을 걸고 임금의 밥상을 지켜라
왕의 첩보경호대, 장용원 마작대
정조의 숨겨진 남자, 다산 정약용
임금의 비밀편지
불교를 부패의 원흉으로 몰아 척결하라
무학대사 죽이기
제2부 사로잡힌 영혼, 그 은밀한 사랑의 역사
대관령 주막집 여인의 유혹
에로티즘의 귀재 혜원, 그리고 ‘젖’과 ‘유방’ 사이
조선시대 연인들의 데이트 풍경
동양 삼국을 열광시킨 시인 허난설헌
임금님의 첫사랑, 붉은 치마를 흔들던 여인
창덕궁 후원의 음기와 숙정문의 음기
황진이의 남자 지족선사와 화담선생
꽃놀이 가자
자유를 위해 권좌를 버린 세자
이 밀서를 평양에 전하라
평양 안악궁터에서 ‘고구려의 혼’을 만난 양녕
치마폭에 써내려간 양녕의 마음
시공을 뛰어넘은 애틋한 사랑
양녕대군에게 묻다 “왜 왕위를 버렸나?”
궁에서 퇴출된 여인들의 ‘유배지’ 정업원
제3부 아하 그렇구나, 그 놀라운 뜻밖의 역사
절대권력도 못하는 일, 왕릉 만들기
정도전과 경복궁
연산은 과연 ‘폭군’이었을까
청계천에서도 정조를 만날 수 있다
호랑이와 통행세에 울고 넘던 무악재
나라님 가시는 길, 불 밝혀 드리오리다
절집인가 성당인가
원조 한류 스타, 추사 김정희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 영도교
이름 없는 묘에서 왕후 능으로
청령포의 한
한국경제의 얼굴이 된 모자
천기를 누설하겠소이다
햇살이 부끄러운 궁중의 속살
무덤을 헐어내어 다리를 만들어라
셋방살이 하는 수표교
오간수교에는 오간수문이 없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보물을 밟아보는 행운을
국보와 보물은 어떻게 다른가
세종의 ‘종’과 영조의 ‘조’는 어떻게 다른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좌사우언左史右言이라는 말이 있다. 절대권력 임금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하여 왼쪽에는 사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언관 즉 대간臺諫이 있다는 상징적인 말이다. 이 말이 좌사우언左事右言과 혼동되어 읽히고 있다. 임금과 신하가 대좌하면 사관이 입회했다. 좌측 사관은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우측 사관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오가는 말을 빠짐없이 기록한다는 뜻이다. 요즘으로 치면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디오를 촬영하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오디오를 녹음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 5쪽
청권사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못이 보이고 그 뒤로 고즈넉한 고택의 아취를 자아내는 모련재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오른쪽에 보면 돌거북을 기단으로 한 비석이 있는데 효령대군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다. 효령대군의 업적을 살펴보고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면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서 있는 문인석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중앙에 자리한 석등을 지나 상석을 마주보고 바라보면 왼쪽이 효령대군의 묘이고 오른쪽이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 해주 정씨의 묘이다. 주변을 바라보니 풍화에 세월의 더께를 말해주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시위하고 있는데, 담 밖으로는 치솟은 고층 빌딩들이 포위하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무겁다.
효령대군이 왕자로 있던 시절, 네 차례의 선위파동을 거치면서 외삼촌 둘은 사사되었고 외할아버지는 자진하는 등 외갓집은 쑥대밭이 되었다. 양녕의 폐세자에 반대하던 황희는 유배를 갔지만 형제는 다치지 않았고 아우 세종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는데 이들 삼형제의 우의가 돈독해서 그리된 것일까? 형제간에 골육상쟁을 벌인 일에 내심 진저리를 친 태종이 자식만은 피를 보지 않으려고 해서일까? 나그네의 생각은 오락가락하는데 효령대군은 말이 없고 햇살만 능에 가득하다. ― 40∼41쪽
이 그림을 보더라도 18세기 말엽까지 여성의 젖가슴은 2세를 양육하기 위한 수유기관으로 여겨졌을 뿐 성애의 상징으로 본 것 같지는 않다. ‘유방’이란 원래 의학용어로, 우리보다 앞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을 통하여 서양 의술이 들어오면서 묻어온 한자어다. 우리 조상들은 젖, 젖통, 젖퉁이 등으로 불렀는데, 순수하게 수유기관을 지칭하였을 뿐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자의 젖가슴은 다산풍요多産豊饒의 상징으로 드러내놓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 것이 우리네 풍속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유모를 댈 수 있는 궁중 여인과 사대부 마나님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인들은 모유 수유기간이라는 표시와 아이를 낳았다는 징표로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구한말, 우리나라를?유린하던 일제가 조선인은 아프리카 야만족들처럼 미개하다고 선전하기 위하여 젖가슴이 드러난 기생들의 모습을 찍어 악의적으로 세계에 뿌렸다는 설도 있지만 최근에 우리 손으로 발굴한 평범한 여인의 모습에도 젖가슴이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의식 속에서 젖과 유방은 언제부터 갈렸을까? 여자의 몸을 상품으로 보기 시작한 20세기 초가 아닌가 싶다. 영화산업의 발달과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광고 기법은 여자의 몸에 하나의 가치관으로 묶여 있던 젖과 유방을 분리하여 유방을 상품화하였다. 그 결정적인 시기는 브래지어가 대량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로 여겨진다. 이때만 해도 아기를 안고 가던 애 엄마가 젖가슴을 스스럼없이 풀어헤치고 젖을 먹이는 모습을 전차나 버스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젖을 먹이는 여인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나 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 148∼14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