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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미술가
· ISBN : 9788994015651
· 쪽수 : 168쪽
· 출판일 : 2014-04-21
책 소개
책속에서
바로 그 그림은 나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면서 날카로운 햇빛 한 줄기가 모델의 얼굴에 닿자, 그 금빛 햇살은 금빛 유약이 번쩍이듯이 불타올랐다. 짙은 색깔의 창살 아래에서, 커다랗게 뻥 뚫린 구멍 같은, 그녀의 깊고 깊은 두 눈이 뿜어내는 힘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눈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나를 자석으로 끌어당기듯이 빨아들였다. 두 눈은 내게 최면을 걸려고 동공 안에서 살며시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외부에서 다른 어떤 받쳐주는 힘도 전혀 없이.
지금, 데생의 모델을 한지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바로 그때의 초록색 눈빛이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 눈빛을 알아보는데 어려울 것은 없다. 눈빛은 직접적이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눈빛은 묻는다. 그건 바로 그의 마지막 모델, 자코메티가 사랑한 〈까롤린〉의 눈빛이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슬픔을, 힘을 알아본다.
줄이고 줄인 덕분에, 빛은 훨씬 더 강렬해질 뿐이고 겉으로 보이는 세상과는 멀리 떨어져있다. 자코메티는 우상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를 쓰는가? 그는 왜 까롤린에게 상반신을 벗으라고 요구했는가? 그의 그림에는 관능만이 있을 뿐 에로티시즘은 없다. 욕망도 감각적 쾌락도 없다. 자코메티는 그림을 그릴 때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육체와 그 육체 속에 흐르는 피를 무시한다. 그는 보여 줄 게 더 많이 있다. 그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화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여자는 그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