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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전기(개국~임진왜란 이전)
· ISBN : 9788994125169
· 쪽수 : 384쪽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제1부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숙청
움트는 역사의 비극
권력 장악의 당위성 | 신권 확대에 따른 왕족들의 불안감 고조 | 다른 길을 걷는 형제들 |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와 상왕 단종의 죽음 | 단종의 복위에 걸린 244년의 세월
역성易姓 반역으로 출생한 조선왕조
혼란한 고려 말에 등장한 이성계 | 대륙의 세력에 기댄 고려 조정 | 이성계의 선택
조선왕조의 왕위 계승
세자에 오른 여덟째 왕자 방석의 죽음 | 둘째 아들 이방과에게 돌아간 왕위 | 정종의 불안한 나날 | 2차 왕자의 난과 태종의 즉위 | 나라를 중흥시킨 성군聖君 세종의 등장 | 심약한 문종의 험난한 항해 | 비극의 역사 중심에 선 문약한 군주 단종 | * 단종 가계도 | * 단종 연표
단종의 즉위와 종실 대군의 정치 참여
신권 정치를 추구하는 대신들 | 정치에 적극 참여한 두 왕자, 수양과 안평 | 숙청당하는 문종의 충신들 | 계유정난으로 칼자루를 잡은 수양 대군 | 임금을 협박하고 왕자를 죽인 43인에게 내린 공신 | * 계유정난 공신표 | 단종 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이징옥의 반란
단종의 퇴위와 복위 운동
명나라 황제도 속은 거짓 주청 문서 | 실패할 줄 알면서 시작한 단종 복위 운동 | 김질의 변절 | 세조의 왕위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한 석방 | 상왕 단종을 궁지로 몰아넣는 찬탈 왕 세조의 하수인들 | 내가 군주인데 이디를 가라고 하는가 | 금성 대군의 직언은 유배 길이 되었다 | 달콤한 한 토막 춘몽이 깨어지는 소리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향하는 단종
단종에게 송별연을 베푸는 세조 | 죽음보다 더한 유배지 청령포 | 굵게 떨어지는 빗물은 선왕들의 눈물인가 | 영월 부사 자리는 달갑지 않았다 | 세조 본심의 뿌리는 | 단종의 목줄을 조이는 먹구름 | 혼 없는 단종의 시신은 어디로 | 노산군 묘墓가 능陵이 되기까지
제자리를 찾는 단종의 체백體魄 - 실록을 중심으로
숙종의 심기를 흔든 신규의 대쪽 같은 상소 | 단종 복위를 위한 본격적 논의 | 숙종, 영조, 정조, 고종으로 이어지는 난제 |244년 만에 바치는 시책문 | 장릉과 사릉의 분묘 수축 공사 | 단종 복위에 대한 의의
제2부 사육신과 생육신
김문기가 정사의 사육신인 이유
사육신과 생육신은 누가 지은 이름인가 | 남효온이 엮은 「육신전」은 믿을 만한가 | 사육신으로 판정받기까지의 경위 | 국사편찬위원회 판정 뒤 제기된 문제 | 사육신은 언제 가려졌는가
사육신의 선정 기준
허후가 중요 기준이 되는 근거 | 『세조실록』에 기록된 사육신 | 허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의 공통점 | 단종 복위 운동으로 처형당한 인물들
김문기는 사육신이다 ? 『조선왕조실록』과 『육신전』의 비교
능력에 걸맞은 명망 | 단종 복위를 위한 역할 | 유응부로 오전된 근거 - 『추강집』「육신전」의 분석 | 추강 남효온의 「육신전」에 오른 사육신 | 이개의 큰 숙부 이계린과 작은 숙부 이계전 | 「육신전」의 보급으로 인한 영향 | *『조선왕조실록』과 남효온의 「육신전」 비교표 | 「어정 배식록」과 김문기 삼중신론의 허위성 | 장릉에 세워진 정단 32명 배식 위차 표 | 「어정 배식록」 자료의 오류 | 『조선왕조실록』의 사육신 관계 주요 기사 표
단종을 추모하며 벼슬을 버린 생육신
매운 절개를 가진 탁원한 문장가 김시습 | 청백리 이맹전 | 자신의 인생을 담담히 받아들인 조여 | 욕심을 버리고 속세를 이긴 성담수 | 의리를 버린 세상을 개탄한 원호 | 스승 김종직의 존경을 받은 남효온 | 남효온이 아닌 권절을 생육신으로 모셔야 하는 이유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세종에게 원손의 탄생은 왕실의 적장손으로서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기반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근정전에서 군신들의 하례를 받으며 감옥에 갇힌 죄인들을 풀어주는 특사를 내리며 기쁨을 표하였다. 세종은 이홍위(단종)를 무척 아꼈고 왕자가 8세 되던 1448년(세종 30)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세종은 홍위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면서 만조백관의 하례를 받고 죄인을 방면하는 등 국가의 큰 경사로 의식을 거행하였다.
제1부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숙청 - 비극의 역사 중심에 선 문약한 군주 단종 中
1452년 윤 9월, 마침 명나라에서 단종을 임명한다는 고명과 비단을 보내 왔다. 그에 대한 답례로 명나라에 사은사가 가게 되었는데, 이 사은사로 수양 대군이 자청해 나섰다.
수양 대군의 심복 권람과 한명회가 극구 만류하였으나 수양 대군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대해 후세의 사가들은 수양 대군이 힘을 기르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며, 또한 다른 정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위장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양 대군은 명나라로 떠나기 전부터 정권 찬탈의 확고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신숙주가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고도 많은 동지를 배반하고 세조 편에 서게 된 것도 종사관으로 세조를 따라 명나라에 갔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면서 정적들의 자제인 김승규, 황보석 같은 젊은 사람들의 의향도 파악하였고 신숙주와 같은 심복도 얻게 되었으니 수양 대군이 사은사를 자청한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었다.
제1부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숙청 - 정치에 적극 참여한 두 왕자, 수양과 안평 中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일으켜 제1차로 정적을 몰아낸 수양 대군은 본인 스스로 영의정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를 겸임하고 문무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수양 대군은 정인지, 신숙주, 권람 등의 심복들을 요직에 배치하여 사실상 단종을 추종하는 세력을 제거하였다. 수양 대군은 제2차로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여 금성 대군, 조유례, 성문치 등 반대 세력들을 귀양 보내거나 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양 대군을 추종하는 세력은 단종을 압박하고 위협을 가하면서 수양 대군을 신왕으로 추대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실질적인 모든 권한을 상실한 단종은 왕으로서의 지위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도승지에게 선위 준비를 하도록 하명하였다.
제1부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숙청 ? 단종의 퇴위와 복위 운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