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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4300054
· 쪽수 : 1024쪽
책 소개
목차
1. 혼인하러 가는 길 ― 꽃가마 대신 기차?
2. 초례청(醮禮廳) 풍경 ― 새신부는 소박데기
3. 눈 오는 날의 불청객들 ― 여우선녀와 거렁뱅이
4. 부부 비밀협정 ― 글을 배워보지 않을래?
5. 님의 침묵 ― 처음 배운 사랑노래
6. 푸른 새벽의 이별 ― 지독한 고별사
7. 연자죽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똥물
8. 쌀례 아닌 성례 ― 빨간 구두 아가씨
9. 두 번째 초야(初夜) ― 삼월 봄비 내리던 밤
10. 1950년, 숨 가쁜 여름 ― 부산(釜山)에서
11. 짐승들의 밤 ― 늙은 야차 VS. 젊은 야차
12. 달밤의 약속 ― 다시 만나자.
13. 반갑지 않은 재회 ― 미용사와 사장님
14. 도깨비 소굴의 식모님 ― 적과의 동거
15. 영화(映畵) 같은 인생 ― 한낮의 활극
16. 산다는 것은 ― 은빛물결과 꿀꿀이죽
17. 말이 갈리는 자들의 연회 ― 나무 그늘 아래 왈츠
2권
18. 지옥 꽃밭에서의 고백 ― 악몽의 밤
19. 쌀례, 성례, 밥순이 ― 그 여자의 이름들
20. 날벼락 ―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들
21. 기묘한 약혼 ― 얼음이 녹은 날에
22. 재회(再會) ― 꿈꿨던, 꿈과는 다른
23. 이상한 선생님 ― 목소리만 좋은 남자
24. 둘만의 조조관람 ― 정체불명 그 남자와
25. 불타는 둥지 ― 절정의 다음
26. 목련나무 정원의 사진들 ― 내가 아는 당신
27. 사랑 ― 달콤하고 잔인한 것
28. 두 남자 ― 검사와 악당
29. 상갓집 밥 ― 세 사람의 만찬
30. 심장에 핀 황금 꽃 ― 쌀례를 찾아서
31. 삶 ― 멈출 수 없는 기도
32. 안녕 ― 눈물의 원천, 혹은 새로운 희망
에필로그 : 조왕신을 위한 기도 ― 어느 겨울 아침 부엌에서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성례야, 네 나이 올해 열다섯이렷다?”
쌀례는 내심 이상하다 싶었다.
성례는 분명히 그녀의 이름이었지만 집안사람들에게 그녀는 ‘쌀례’로 불린다.
사대부 여식으로 본명은 ‘성례’이나 쌀알이 주렁주렁 열리는 아명을 가지고 평생 배곯지 말라는 뜻에서 그녀는 일 년 365일 중 360일 정도는 ‘쌀례’였던 것이다. 나머지 5일, 쌀례가 ‘성례’로 칭해지는 날은 뭔가 껄끄러운 일이 생기는 날이었다. 가장 최근 ‘성례’로 불렸을 때, 쌀례는 어머니의 재가에 대해, 엄마와 동생과 이제는 이별이라는 사실을 함께 들어야 했었다. 이번엔 뭐지? 잔뜩 불안한 얼굴로 손녀가 답했다.
“아홉 달쯤 더 있어야 열다섯이 되어요.”
순간, 늙은 선비의 주름진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쳤다. 손녀딸이 못 먹고 자라 또래보다 작은 줄만 알았는데 아직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노인은 망설임을 털어버리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다. 열넷이건 열다섯이건 계집아이가 출가하기에 아주 적당한 나이니라. 네 할미도 그 나이 때 이 할아비에게 왔느니.”
혼인하기 위해 경성으로 출발하던 날 아침, 쌀례가 일어나 처음으로 발걸음한 곳은 부엌이었다.
아침마다 부엌에 제일 먼저 들어온 여자는 성스런 부엌의 신 조왕신(?王神)을 위해 맑은 물을 조왕중발에 떠놓고 절을 해야 한다. 아궁이에 힘차게 타오르는 불처럼 집안이 번성하길 빌고, 이곳에서 빚어진 음식들이 집안사람들의 힘이 되길 빌고, 배곯지 않기를 빈다. 대부분 할머니나 상희 언니가 그 역할을 했지만 경성을 향해 출발하던 그날, 부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쌀례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조심조심 맑은 샘물을 주발에 부어놓고 손바닥을 비비면서 뭐든 빌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말문이 막혀버렸다. 뭘 빌어야 하나?
선재가 종이 위에 나란히 쓴 두 개의 이름을 쌀례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소리로만 불리던 자신의 이름이 흰 종이 검은 글씨로 형태를 이루어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란히 적힌 두 이름. 보기에 나쁘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던 여자아이는 곧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성례로 다시 써주세요. 원래 제 이름은 성례니까요.”
이제 열다섯인데 언제까지 아이처럼 쌀례라고 불린 순 없지 않은가.
여자아이의 요청에 선재는 쌀례 아래에 다시 그녀의 이름을 썼다. 그제야 쌀례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스며들었다. 여자란, 비록 열다섯 살짜리라 해도 그 속에 천 가지 뿌리를 숨기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남자에게 쌀례는 신이 난 얼굴로 물었다.
“이제 밖에서 제 이름 쓸 일 있으면 이렇게 쓰면 되는 거죠?”
그 질문에, 남자의 얼굴에선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잠시 후,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일단은, 우리끼리 있을 때만.”
“우리……끼리요?”
“음, 집안에서라든지 야학 교실에서라든지. 너랑 나같이 조선사람들하고만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