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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94353401
· 쪽수 : 696쪽
· 출판일 : 2014-06-16
책 소개
목차
바랜 붉은 빛_ 구병모
약한 자의 슬픔
목숨
유성기
폭군
배따라기
태형
이 잔을
피고
감자
○씨
명문
시골 황 서방
명화 리디아
딸의 업을 이으려
눈보라
K 박사의 연구
송동이
광염 소나타
구두
포플러
순정
배회
벗기운 대금업자
수정 비둘기
소녀의 노래
수녀
화환
죽음
무능자의 아내
약혼자에게
증거
죄와 벌
여인담
거지
결혼식
작가 연보
책속에서
배따라기 p. 169~170
방 가운데는 떡 상이 있고, 그의 아우는 수건이 벗어져서 목 뒤로 늘어지고 저고리 고름이 모두 풀어져가지고 한편 모퉁이에 서 있고, 아내도 머리채가 모두 뒤로 늘어지고 치마가 배꼽 아래 늘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그의 아내와 아우는 그를 보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움쩍도 안 하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어이가 없어서 서 있었다. 그러나 좀 있다가 마침내 그의 아우가 겨우 말했다.
“그놈의 쥐 어디 갔니?”
“흥! 쥐? 훌륭한 쥐 잡댔구나!”
그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짐을 벗어 던지고 뛰어가서 아우의 멱살을 그러잡았다.
“형님! 정말 쥐가―.”
“쥐? 이놈! 형수하고 그런 쥐 잡는 놈이 어디 있니?”
그는 아우를 따귀를 몇 대 때린 뒤에 등을 밀어서 문밖에 내어던졌다. 그런 뒤에 이제 자기에게 이를 매를 생각하고 우들우들 떨면서 아랫목에 서 있는 아내에게 달려들었다.
“이년! 시아우와 그런 쥐 잡는 년이 어디 있어!”
그는 아내를 거꾸러뜨리고 함부로 내리찧었다.
“정말 쥐가…… 아이 죽겠다.”
“이년! 너두 쥐? 죽어라!”
그의 팔다리는 함부로 아내의 몸 위에 오르내렸다.
“아이, 죽갔다. 정말 아까 적으니(시아우)가 왔기에 떡 먹으라구 내놓았더니―.”
“듣기 싫다! 시아우 붙은 년이, 무슨 잔소릴…….”
“아이, 아이, 정말이야요. 쥐가 한 마리 나…….”
“그냥 쥐?”
“쥐 잡을래다가…….”
“샹년! 죽어라! 물에래두 빠데 죽얼!”
그는 실컷 때린 뒤에, 아내도 아우처럼 등을 밀어내어 쫓았다. 그 뒤에 그의 등으로,
“고기 배때기에 장사해라!”
하고 토하였다.
분풀이는 실컷 하였지만, 그래도 마음속이 자못 편치 못하였다. 그는 아랫목으로 가서 바람벽을 의지하고 실신한 사람같이 우두커니 서서 떡 상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서편으로 바다를 향한 마을이라 다른 곳보다는 늦게 어둡지만, 그래도 술시戌時쯤 되어서는 깜깜하니 어두웠다. 그는 불을 켜려고 바람벽에서 떠나서 성냥을 찾으러 돌아갔다.
성냥은 늘 있던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뒤적이노라니까, 어떤 낡은 옷 뭉치를 들칠 때에 문득 쥐 소리가 나면서 무엇이 후덕덕 뛰어 나온다. 그리하여 저편으로 기어서 도망한다.
“역시 쥐댔구나.”
그는 조그만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만 그 자리에 맥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감자 p. 275~276
가을이 되었다.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은 가을이 되면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밭에 감자(고구마)며 배추를 도적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복녀도 감자깨나 잘 도적질하여 왔다.
어떤 날 밤, 그는 감자를 한 바구니 잘 도적질하여가지고, 이젠 돌아오려고 일어설 때에, 그의 뒤에 시꺼먼 그림자가 서서 그를 꽉 붙들었다. 보니, 그것은 그 밭의 소작인인 중국인 왕 서방이었다. 복녀는 말도 못 하고 멀진멀진 발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집에 가.”
왕 서방은 이렇게 말하였다.
“가재문 가디. 훤, 것두 못 갈까.”
복녀는 엉덩이를 한 번 홱 두른 뒤에 머리를 젖히고 바구니를 저으면서 왕 서방을 따라갔다.
한 시간쯤 뒤에 그는 왕 서방의 집에서 나왔다. 그가 밭고랑에서 길로 들어서려 할 때에, 문득 뒤에서 누가 그를 찾았다.
“복네 아니야?”
복녀는 홱 돌아서 보았다. 거기는 자기 곁집 여편네가 바구니를 끼고 어두운 밭고랑을 더듬더듬 나오고 있었다.
“형님이댔쉐까? 형님두 들어갔댔쉐까?”
“님자두 들어갔댔나?”
“형님은 뉘 집에?”
“나? 눅 서방네 집에. 님자는?”
“난 왕 서방네…… 형님 얼마 받았소?”
“눅 서방네 그 깍쟁이 놈, 배추 세 페기…….”
“난 삼 원 받았디.”
복녀는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십 분쯤 뒤에 그는 자기 남편과, 그 앞에 돈 삼 원을 내어놓은 뒤에, 아까 그 왕 서방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광염소나타 p. 429~430
어떤 날 밤중, 가슴이 너무 무겁고 가슴속에 무엇이 가득 찬 것같이 거북하여서, 저는 산보를 나섰습니다. 무거운 머리와 무거운 가슴과 무거운 다리를 지향 없이 옮기면서 돌아다니다가 저는 어떤 곳에서 커다란 볏짚 낟가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때의 저의 심리를 어떻게 형용하였으면 좋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슨 무서운 적敵을 만난 것같이 긴장되고 흥분되었습니다. 저는 사면을 한 번 살펴보고, 그 낟가리에 달려가서 불을 그어서 놓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무서움증이 생겨서 돌아서서 달아나다가, 멀찌가니까지 달아나서 돌아보니까, 불길은 벌써 하늘을 찌를 듯이 일어났습니다. 왁, 왁, 꺄, 꺄, 사람들이 부르짖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저는 다시 그곳까지 가서, 그 무서운 불길에 날아 올라가는 볏짚이며, 그 낟가리에 연달아 있는 집을 헐어내는 광경을 구경하다가 문득 흥분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에 된 것이 〈성난 파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