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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중기(임진왜란~경종)
· ISBN : 9788994606156
· 쪽수 : 372쪽
· 출판일 : 2012-09-03
책 소개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1. 새로운 정치의 시작
왜 쫓겨나야 했는가 | 빈전에 부는 바람 | 보름 만에 귀양을 가다 | 옥사의 시작 | 이른바 연루자들의 면모 | 종부시 도제조 | 고립무원의 임해군 | 방방곡곡이 들썩이다 | 서인으로 낮추어지다 | 불편해진 대명외교
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즉위식 장면, 그리고 함의 | 변화의 연착륙 | 유교 7신 | 국가 오례와 즉위 | 여러 당파의 분리 | 세자를 흔들다 | 즉위 후의 조치 | 무신년 당적 | 우연, 절묘한 타이밍 | 정인홍의 귀환 | 그로부터 15년 뒤 | 회퇴변척의 부메랑 |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 | 폐비의 길을 열다
3. 먹는 것이 하늘이다
이원익의 건의 | 대 개혁, 대동법 | 연산군, 그리고 인재 | 율곡과 서애가 본 공납제 | 재정 정상화가 필요하다 | 조심스러운 시범사업 | 왕실과 권세가의 방납 커넥션 | 뒤로 가는 광해군 | 호조판서 황신 |국가재정 개혁에 대한 비전 | 사건의 상관성과 인과성 | 좌절할 선혜, 대동법
4. 경연보다 친국이다
보수의 긍정성, 안정감 | 땅은 위에, 하늘은 아래에 | 파행, 문치주의의 교훈 | 아프다, 춥다, 덥다 | 경연 vs 여알 | 《서경》을 강의하다 | 즐거운 공부 시간 | 뚱뚱해진 이유 | 국문할 시간은 있어도 | 드물어진 만남 | 침묵의 조정이 가는 길
5. 기억을 바꾸고 싶다
‘떠든 아이 효과’ | 국왕의 첫 번째 하교 | 사초를 태우고도 | 사초 찾아 방방곡곡 | 들어가는 기록들 |실록이 잘못될 수 있다 | 선조 23년? 24년? | 실록청의 운영 개선안 | 《선조실록》이 완성되다 | 신록 수정에 대한 편견 | 사론의 수정
6. 과대 소비의 소용돌이
집은 커야 하는가 | 불타버린 궁궐 | 백성이 쉬어야 할 때 | 목재, 석재, 철, 기와 | 대동법을 가로막은 궁궐 공사 | 풍수와 소문 | 꼼꼼하고 섬세한 관심 | 문제는 재정이다 | 경복궁보다 10배 크다 | 소요 비용의 추산 | 주춧돌을 빼어 바치고 | 관직 매매 또는 죗값 | 군량미를 빼어 쓰다 | 남의 집 불 보듯
7. 절망 속에 피는 희망
수의, 흉소 | 폐모의 내용 | 이런 죽음, 저런 죽음 | 윤선도의 청론 | 밀려난 사람들 | 심하의 패배 | 의심, 균열, 포섭 | 모르지 않았거늘
에필로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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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추국 마당에는 운이 없어서 잡혀 온 사람도 있었다. 평양 산다는 인수(仁守), 황주에 살던 용이(龍伊)라는 사람이 그들이다. 인수는 평양에서 한양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왔다가 잡혔고, 용이는 궁가에 밀가루를 납품하려고 왔다고 붙잡혀 갇혔다. 또 임해군 궁 옆에 살다가 잡혀 온 사람도 있었다. 산휘(山輝)는 궁가에 땔나무를 팔러 왔다가 잡혀 왔다.
특히 궁가에 칼 등 일용할 물건을 대던 대장장이 조명환(曺命環)은 못과 말발굽을 만들어주려고 드나들다가 잡혀 왔다. 활 기술자 양선경(梁善慶), 칼 기술자 묵이(墨伊)도 그런 경우였다. 임해군 집에서 놀이판을 벌였던 광대 백은금(白隱金) 등도 임해군의 종으로 오해를 받아 끌려왔다. 그러나 의심의 눈으로 보면 이들 광대 무리보다 의심스러운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필자가 조사해보았더니 《선조실록》의 사론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수정한 인물이 40명인데, 위에서 보듯 《선조실록》에서는 대북(大北) 또는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 몇몇을 빼곤 모두 깍아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편찬자 자신인 이이첨이 스스로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간쟁하는 기품이 있었다.”고 평가한 데 이르면 낯간지러운 점도 없지 않다. 기자헌에 대해, “과묵했으며 바르고 아부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과묵하고 아부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방납을 하면서 대동법을 무력화했던 인물이고 보면, 바르다는 평은 옳지 않은 듯하다.
또한 서인이나 남인, 소북 중에서 능력 있고 존경받는 인물이 없을 리 없고, 또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 것이 사람일진대, 원본에서 보여주는 대북 정권 담당자들의 자찬과 배타성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런 점 때문에 결국 실록 수정 논의가 제기되었고, 실록 수정의 명분이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선조실록》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건도감에서는 아예 무과 시험에서 활쏘기를 대리로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속은을 받기로 했다. 이들은 법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과거 시험의 법을 어길 것이므로 아예 재물을 걷자는 말이다. 영건도감에서는 이들을 “말세의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 말세가 맞기는 맞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들을 대상으로 정목(正木) 각 2동씩을 속죄금으로 거두어 쓴다면 무명의 필 수가 거의 3백여 동에 이를 것이니 이것을 영건에 보태자고 건의했고, 광해군도 따랐다.
아예 유배 보낸 사람들에게 일정한 수량의 은을 받고 방면시켜 살게 하는 방안까지 실행에 옮겼다. 광해군의 사돈인 밀창부원군 박승종의 아이디어였다. 계축옥사 때 당대의 이름 있는 재상들이 모두 귀양을 갔으므로 이들을 사면시키는 방편으로 이렇게 은을 받고 놓아주기를 청했던 것이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더 치욕을 느끼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