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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중세사(위진남북조~당,송)
· ISBN : 9788994606415
· 쪽수 : 556쪽
· 출판일 : 2016-03-18
책 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는 말
1_ 북중국과 남중국의 지리
농업과 수리 | 농업과 수리 | 산지와 이민 | 주변부에 대한 글쓰기 | 화가, 은자 그리고 성소| 지역 우월의식의 탄생
2_ 유력 가문의 대두
유력 가문 사이의 지위 추구 | 한의 멸망과 삼국의 등장 | 인물평가와 관리 임용 | 청담과 은일문화 | 유력 가문의 황금기
3_ 군사 왕조
군사 왕조의 기원 | 남중국의 군사 왕조 | 북중국의 군사 왕조
4_ 도시의 변화
지방 도시와 풍속 | 도시의 풍경, 별장, 원림 | 준공공 공간으로서의 불교사원 | 도시경제
5_ 농촌의 삶
새로운 작물과 농업 기술 | 사회적 조직으로서의 가문 | 국유지 | 촌락생활에 대한 글쓰기
6_ 중국과 외부세계
중국 내의 북방 유목 민족 | 주변 정주 국가 | 교역과 불교 | 중국 내의 외국인들
7_ 친족의 재정의
묘지와 명절 | 가문에 대한 글쓰기 | 친족과 불교 | 여성의 새로운 역할
8_ 도교와 불교
교단 도교 | 교단 불교 | 도교와 불교 간의 중복과 차용 | 미개지 길들이기
9_ 글쓰기
현묘함에 대한 탐구 | 서정 시가 | 문학 이론 | 서예 | 산문 서사
나오는 말
위진남북조 주요 연표
중국의 역대 왕조
참고문헌
지은이의 말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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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산길을 통하고 물길을 따르는 경로 덕분에 사람들은 황하 유역에서 양자강 유역으로 보다 수월하게 이동했다. 주요 이주 경로가 셋 있었는데 각각 양자강의 세 권역을 향했다. 황하 하류 평야 지대에서 출발하여 동남쪽으로 나아가 중국 중부 회수 유역과 황하 하류 사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분수계(分水界)를 통과하는 경로가 가장 쉬운 경로였다. (중략) 양자강에 가까워지면서 이 경로는 시옷 자 형태로 갈라진다. 동쪽으로는 양자강 하구로 나아가 항주(杭州)로 들어가고 서쪽으로는 양자강을 따라 올라가 파양호로 들어간다. 파양호에서 감강을 따라 내려가 매령관을 넘어 북강으로 가서 지금의 광동으로 갈 수도 있었다. 이 동남쪽 이주 경로를 따라 가는 이주민들은 양자강 하류 지역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었다. 남방의 수도 건강(建康, 옛 이름은 건업으로 오늘날 남경) 주변 이 지역에서 이주민들은 장원 노동력과 군대 병력을 제공하였다.
두 번째 이주 경로는 한의 옛 수도인 장안이나 낙양에서 시작하였다. 장안에서 시작하는 경로는 무관(武關)을 통해 진령(秦嶺) 산맥을 가로지르는데, 절벽을 따라 판자를 연결하여 만든 잔도(棧道)를 지나 해발 고도 2,000미터를 넘어야 하는 힘든 길이다. 그다음에는 한수를 따라 강이 만나는 도시인 양양으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낙양을 출발하여 복우 산맥을 가로지른 경로와 합류한다. 하나가 된 경로는 한수를 따라 남하하여 동정호 지역에 이른다. 한의 옛 수도에서 출발한 피난민들은 이 경로로 양자강 중류 지역에 모였고, 서부 군단을 위한 병력을 충원해주었다. 일부는 감강을 따라 광동까지 더 남쪽으로 이동하거나 혹은 남서쪽으로 상강을 따라 장사(長沙)로 이동했다가 오늘날 베트남 지역까지 더 내려가기도 했다.
세 번째 가장 서쪽 경로는 제일 힘든 일이었고 따라서 역사적 중요성은 미미하였다. 이 길은 장안에서 서쪽의 보계로 갔다가 다시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서남쪽으로 나아가 사천성 심장부에 있는 민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 430여 킬로미터 여정 중 삼분의 일이 절벽 벽면에 만들어놓은 잔도였다. 당대 시인 이백의 유명한 시는 이 험난한 길을 따라가는 지난한 어려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책 곳곳에서 비국가적 영역이 계속 등장하겠지만, 우선 여기서는 새로운 지배층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인 청담(淸談)과 은일(隱逸) 풍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구품중정제의 위계구조는 조정에서의 승진이 몇몇 주요 가문의 영향력 아래 통합된 지역사회에서의 지위와 연결되어 있었고, 이 둘 사이의 고리가 청담이었다. 구품중정제에서 청담이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던 이유는 유소의 『인물지』가 보여주듯 대화가 인성을 판단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인물지』의 앞부분 「재리材理」편은 인간 재능의 종류를 분류하고 각 재능이 대화와 논쟁에서 표출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뒷부분「접식接識」편에서는 “한 사람의 일면을 알아보기에는 아침 한나절로 족하다. 그러나 모든 면을 완전하게 검토하려면 사흘이 필요할 것이다. 왜 사흘인가? 나라에 필수적 존재가 될 사람에게는 세 가지 타고난 재능이 있다. 그러므로 사흘에 걸친 대화 없이는 그 사람을 완전하게 할아볼 수가 없다. 하루는 윤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하루는 법에 관해 이야기 하고, 하루는 정책과 전략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재능을 전부 알 수 있고 주저 없이 그를 추천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청담’이라는 용어는 후한 말의 지배층과 관계가 있다. 이들은 환관이 장악한 조정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 투쟁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식하며 등장하였다. 이 집단의 정치 담론은 ‘청의淸議’라 불렸는데, 대화를 통한 인물평가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 지도자들, 특히 곽태(郭泰) 같은 사람은 이 분야의 능력으로 유명하였다. 후한 말 지배층은 이미 대화, 인물평가, 그리고 관리가 될 자격을 합쳐놓았던 것이다. 후한의 마지막 몇 년과 위나라 초기 몇 년 동안 ‘청의’와 ‘청담’은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용어였으며, 심지어 수 세기에 걸쳐 ‘청담’이라는 용어의 외연이 확장되었어도 이 용어는 여전히 인물평가라는 원래의 좁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론과 용례 모두에서 드러나는 바는 중국 지배층에서 정치적 행동과 관료 채용의 새로운 유형과 맞물려 대화를 중시하는 형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