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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중세사(위진남북조~당,송)
· ISBN : 9788994606477
· 쪽수 : 616쪽
· 출판일 : 2017-09-21
책 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는 말
1_ 당 제국의 지리적 경관
중국 고대의 중심지, 관중 | 북동부, 중원 평원, 그리고 사천 | 남부 지역 | 수상 운송 | 내지와 외지
2_ 당 제국 건국에서부터 반란으로
당 제국의 통합 | 현종의 치세와 안녹산의 반란 | 당의 군사 시스템 | 중국 중세의 ‘귀족’ | 당대의 법전 | 토지 소유와 조세
3_ 절도사와 재정관
중앙 조정과 절도사의 긴장관계 | 당쟁 | 다양한 지역세력 | 군사적 지방 분권주의와 새로운 정치적 역할들 | 재정적 지방 분권주의와 새로운 정치적 역할
4_ 도시 생활
장안과 낙양의 배치 | 장안성의 유흥 지역 | 모란꽃 열풍 | 당대 도시의 상업화 | 세금과 화폐
5_ 농촌 사회
토지 소유의 새로운 양식 | 농업 기술 | 원거리 교역과 상업화 | 차와 설탕
6_ 외부 세계
천가한으로서의 당 황제 | 동아시아의 등장 | 국제 교역의 재편성 | 당대 중국 거주 외국인들 | 외국에서 온 불교도들
7_ 친족
당대 집안의 여성들 | 조상 숭배의 변화 | 당대의 문벌귀족들 | 대가문(문벌귀족)의 최후
8_ 종교
당대 도교 | 여관과 여성 사제 | 중국 불교의 등장 |
국가 신앙과 지역 신앙에서의 유교식 의례 | 유교 경전의 독해 | 인쇄술
9_ 저술
초당 시의 위치와 가사 | 고대 시가에 대한 성당시의 계승 | 시인에 대한 인식 변화 | 애정소설 | 비평 수필
나오는 말
당대 주요 연표
중국의 역대 왕조
참고문헌
지은이의 말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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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모란꽃에 대한 열정은 때때로 당대 도성에서 시기와 범죄를 유발하기도 하였다. 한 승려는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에게 독특한 붉은색을 띠는 꽃들이 피어난 모란꽃 나무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넋을 잃었고, 그 가운데 일부가 승려를 유인해 다른 곳의 모란꽃을 보러 가게 한 사이에 그 나무를 훔쳐 버렸다. 그들은 황금과 차를 남겨 두어 절도에 대한 보상을 하였지만 승려는 꽃나무를 되찾지 못했다. 모란꽃 열풍은 그것을 재배하는 사업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어느 한 글에서는 꽃나무를 사는 데 5,000전을 지불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누가 최상의 꽃나무를 가꿨는지를 겨루는 시합이 벌어졌고 유력 가문들은 최상품으로 판별된 것들을 상당한 금액을 주고 사들였다.
꽃나무에 대한 열풍과 관련된 산업에 관한 증거의 대부분이 장안과 관련이 있었지만, 측천무후의 신성한 도성 즉 신도神都인 낙양은 모란꽃 재배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 모란꽃에 대한 광풍이 남부 지역으로도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저명한 학자 관리였던 한유韓愈는 한때 그의 조카를 가망 없는 인간이라 생각해서 의절을 선언한 적이 있는데, 그 젊은 조카가 모란꽃 나무의 뿌리에 염료를 뿌려 극도로 다양한 색채를 지닌 모란꽃들을 키워 내는 기술을 개발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 조카는 남부 지역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 일화는 당대의 모란꽃에 대한 집착이 남부 지역으로까지 스며들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강도, 항주杭州 그리고 소주蘇州와 같은 남부 지역의 시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꽃을 보러 오고 그중 최상의 품종을 사기 위해서 높은 값을 지불하였던 것 같다.
당대 대가문들의 조정 관직에 대한 의존과 지역적 기반의 부차적인 중요성은 그들의 변화된 행동의 패턴에서도 드러난다. 4세기에 중국 북부가 경쟁적인 국가들로 분열되었을 때에 산동 지역의 박릉博陵 최씨催氏 집안은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 동북 지역의 대가문들과의 통혼, 주변의 친족들에 대한 상호 부조 그리고 때때로 지역 관직의 보유 등에 의존하였다. 5세기에 북위가 중국 북부를 재통일하자, 최씨 집안은 다시 관직을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대다수의 최씨 집안 남자들은 5품이나 그 이상의 관직에 등용되었다. 6세기 중반부터의 분열의 시기에 최씨 집안은 그들이 지지하는 지도자들을 따라 분열되었고, 더 중요하게는 수도에서의 관직 경력에 초점을 맞추거나 아니면 지역적 기반에 초점을 맞추는지에 따라서도 나뉘어졌다. 사실상 당대에 알려지게 된 자들은 모두 6세기 후반기에 관직의 길을 선택하였던 자들의 후손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에 최씨 가문의 후손 중에서 정치적으로 활동 중인 자들은 모두 산동 지역을 떠났고 동북부 지역의 다른 대가문들의 기록에 남아 있는 구성원들 역시 모두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을 떠난 자들이었다. 모든 이들이 즉각적으로 수도에 재정착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다른 대가문들 역시 동일한 패턴을 따랐다. 당대에 박릉 최씨 가문과 정기적으로 통혼을 하였던 주요한 문벌귀족이었던 조군趙郡 이씨李氏는 모든 중요한 지역적 기반을 포기하고 수도에서의 관직 경력 보유에 가문의 운명을 걸었다. 문벌귀족 가문들이 과거의 북동부 지역의 토지 자산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이주하는 경향은 아마도 8세기 중반 안녹산의 반란에 의한 혼란에 의해서 촉진되었을 것이다.
당대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중화 제국의 공간에 대한 재정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