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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작두 위에 선무당같이 춤춘 80년 1

역사의 작두 위에 선무당같이 춤춘 80년 1

(신용승 자서전)

신용승 (지은이)
  |  
잉걸미디어
2010-05-15
  |  
12,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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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작두 위에 선무당같이 춤춘 80년 1

책 정보

· 제목 : 역사의 작두 위에 선무당같이 춤춘 80년 1 (신용승 자서전)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95952528
· 쪽수 : 366쪽

책 소개

교직에서 명예퇴직한 뒤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남부지부 제3대 지부장을 역임하였으며, 2010년 현재까지 친일문제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활동을 중심에 놓고, 여러 진보적 사회단체들과 함께 민족과 역사를 생각하며 통일조국을 열어가는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신용승의 자서전.

목차

1권

발간의 글__ 참 ‘늑잖은’ 이야기꾼 신용승
추천의 글 1__ 옹이 박힌 ‘민중자서전’ (유시민?전 보건복지부 장관)
추천의 글 2__ 민족사의 오락반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추천의 글 3__ 의에 굶주려온 삶의 숨결 (표명렬?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
책을 펴내며__ 이런 졸작을 겁 없이 뻔뻔하게 세상에 내면서

나의 유년시절
1. 짧은 기억 속의 평양
2. 영등포에서 보낸 전시 공립보통학교
3. 우리 집은 아마 새끼 친일파였나 보다
4.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마지막 본 노비제도

갑자기 찾아온 해방
5. 해방 같지 않은 해방
6. 착한 누님과 무능한 큰형님의 기억

우여곡절 끝에 중학생이 되다
7. 서울 성남중학교 학생이 되다
8. 중학교 퇴학 후 연극배우의 꿈을 키우다

한국전쟁이 터지다
9. 인민군 치하에서 연극배우가 되다

서울이 수복되고
10. 서울이 수복되고 다시 1.4 후퇴를 겪다
11. 국군들의 만행과 참전용사들의 참상
12. 전쟁 통에 길을 잃고 방황하다 해군에 입대
13. 뒤 늦게 공부하고 싶어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14. 젊은 날의 가출과 방황

지겹기만 했던 군대생활
15. 해군 39기로 군대생활을 시작하다
16. 군의학교 탈영 후, 서울 국립맹아학교에 입학하다

탈영병으로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하다
17. 수감생활
18. 해군에 복귀, 월북기도사건에 연루되다
19. 불고지죄로 징역살고 복귀하다

해군을 제대하고
20. 해군을 제대하고 허허벌판에 서다


2권

드디어 교단에 서다
21. 대망의 국민학교 교사가 되어

교직을 떠나 방황하다
22. 교직을 버리고 방황하기 시작하다

수원시 공무원 생활
23. 수원시 행정공무원 생활이 시작되다

네 번의 결혼과 자식들 성장 이야기
24. 나의 자식들과 결혼 이야기

다시 교직에 복직하다
25. 시골학교로 부임하여
26. 처음으로 도시학교에서 겪은 교사생활
27. 각양각색의, 내가 본 교사들의 백태
28. 말년의 교사생활은 부끄러움이 너무도 많다
29. 정년퇴임 후를 생각하며 살다

교직을 퇴직하고 역사를 생각하며 살다
30. 역사의 현장에서
31. 평양방문기
32. 지금의 나의 삶

저자소개

신용승 (지은이)    정보 더보기
만각(晩覺) 신용승. 1933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교직에서 명예퇴직한 뒤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남부지부 제3대 지부장을 역임했다. 현재까지 친일문제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활동을 중심에 놓고, 여러 진보적 사회단체들과 함께 민족과 역사를 생각하며 통일조국을 열어가는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퇴학을 당하고 연극배우의 꿈을 키웠다. 뒤늦은 나이에 고교에 진학했으나 2학년 때 그만두었다. 악동들과 어울려 싸움질이나 하는 불량기 가득한 ‘문제아’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후의 삶 역시 방황 속에 주먹깨나 쓰며 치기와 객기로 점철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져 인공 치하에서 배우의 꿈이 실현되나 싶었는데, 오래지 않아 형편상 포기하고 말았다. 해군에 2번 입대를 했으며 탈영했다가 수감된 일도 있다. 탈영병 처지에 가짜 고교 졸업장을 가지고 서울 국립맹아학교에 입학해 교사 자격증을 획득, 훗날 교직에 설 수 있었다. 1964년부터 7년간, 또 1980년부터 명예퇴직을 한 199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간엔 수원시에서 행정공무원으로 지내기도 했다. 반골 기질의 ‘조숙한 반항아’로 극장이나 들락거려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으로부터 ‘극장 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6학년 때는 3일 학교에 오면 4일은 나오지 않는다고 ‘삼한사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청년기에는 무슨 일이든 안 끼는 데가 없는 동네 유지처럼 주먹깨나 쓰며 여기저기 끼어든다고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유지 건달’로 불렸다. 교직에서 물러난 뒤 사회활동을 하며 얻은 별명은 ‘유교적 사회주의자’다.
펼치기

책속에서

학교도 안 가고 미쳐 따라다닌 약장수
등교하라는 소집령이 내려서 우신공립보통학교에 찾아갔더니,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집이 당산국민학교와 가까운 아이들은 새로 생긴 당산국민학교로 분리시켰다. 그래서 나는 당산국민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전학을 하고 보니 거리는 좀 가까워졌으나, 우리보다 학교가 더 가까운 아이들이 하굣길에 동네 형들을 데리고 와서 교문 앞에서 우리 동네 아이들한테 싸움을 거는 일이 잦았다. 숫자로 밀리는 우리들은 매일 몰매를 맞았다. 우신공립보통학교 다닐 때 자기들이 매 맞은 앙갚음을 한다면서 가방도 뒤지고 돈도 빼앗았다. 그래서 속으로 ‘이 자식들을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할까?’ 늘 궁리를 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우리를 괴롭히던 놈 하나가 영보극장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내 눈에 걸렸다. 나는 그놈을 극장 뒤 골목으로 끌고 가서 흠씬 두들겨 패줬다. 속이 다 시원했지만, 다음날이 마음에 걸렸다. ‘내일 학교에 가면 이 녀석 동네 사는 놈들이 가만있지 않겠지?’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집에서는 학교 간다고 나와서 매일 영등포 시장으로 갔다. 거기 가면 익살스럽게 약을 파는 약장수가 있었는데, 그 익살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매일 그 약장수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점심때가 지나면, 약장수는 북도 치고 바이올린도 켜며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하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슬슬 모여든다. 지루하게 시간을 죽이던 나는 맨 앞으로 다가가 책가방을 깔고 앉는다.
- 1권 중에서


소사극장 화장실 구멍으로 무료입장을 하던 악동
소사의 악동들은 저녁을 먹고나면 극장으로 한 놈 두 놈 몰려왔다. 하지만 돈은 없고, 어떻게 몰래 들어가는 방법이 없을까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생각한 것이 그 극장 재래식 변소 인분 푸는 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구멍은 밖으로 나 있었기 때문에 잘만 하면 기어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냄새가 엄청났기 때문에 논바닥으로 몰려가 널려있는 짚단을 가져다 그 구멍에 무진장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인분 퍼내는 그 구멍으로 머리부터 몸까지 디밀고는 평균대에서 몸 올리기 하는 것처럼 화장실로 올라가 극장 객석으로 파고들었다.
그래도 우리 몸에서 똥냄새가 안 날 리가 없었다. 연극 관람을 하던 손님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누가 똥 싼 거 아니야!” 하고 옆 사람들을 향해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2층으로 뛰어가서 다시 관객 틈으로 끼어들었다.
그러면 2층에서도 또 손님들이 킁킁거리며 “이게 무슨 냄새야?”, “누가 똥을 쌌나? 웬 똥냄새야?” 아우성들을 쳤다. 그러면 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아래 위층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보면, 구경도 못했는데 어느새 연극은 끝이 나고. 연극 구경은커녕 땀만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닌 격이었다.(138쪽)
아침이면 눈치 없이 멀건 나물죽 한 그릇 얻어먹고 다시 소사역 앞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렸다. 운이 좋으면 좀 잘 사는 집 놈들 좀 위협해서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곤 했다. 배고픈 것은 그런대로 참겠는데 밤에 집에 들어가는 게 정말 괴로웠다.
초저녁까지는 친구들이 있으니 그럭저럭 지낼 만한데 날이 저물면 같이 놀던 친구들이 하나둘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나만 외로이 홀로 남겨졌다. 허허벌판에 버려진 것처럼 외로움이 밀려와 ‘오늘은 또 어디로 가서 하룻밤을 자야 하나?’ 걱정을 하면서도 집에는 들어가기가 정말로 죽기보다 싫었다. 배고픈 것보다 외로움이 더 무섭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잘 곳이 없는 줄도 모르는 친구들이 “내일 만나자!”고 무심하게 인사를 하고 다 돌아가 버리면 나만 홀로 남은 거리는 적막했다. 여기저기 거리를 밝히던 전등이 하나둘씩 꺼지면서 거리의 상점들마저 문을 닫고 나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때가 제일 외로운 때였다. 막막한 대해, 거센 풍랑 앞에 홀로 버려진 쪽배처럼 고독이 밀려왔다.
- 1권 중에서


그런데 근무를 하면서 지켜본 학교는 내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학교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며 획일적인지, 내 나름대로 아이들을 지도하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교육청 장학사들이라는 사람들은 평교사 1, 2년 하다가 해방을 맞아 일본 놈들이 모두 쫓겨 가는 바람에 30도 안 된 젊은 나이에 교장으로 벼락 승진했다가 장학사가 된 사람이 태반이었다. 교사들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놈들의 식민지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여 권위의식만 머리에 꽉 차 있었다. 그래서 교사는 아이들 수업보다는 교육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공문과 엉터리 통계만 잘 내면 되었다.
‘공문을 작성해 보고하라’는 상부지시만 내려오면 교감과 교무주임이 얼마나 일방적으로 설쳐대는지, 수업시간에도 무조건 자습을 시키고 교육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불필요한 공문을 작성해야 했다. “교사가 학생 수업이 제일 중요하지 무슨 놈의 공문 처리가 이렇게 중요하냐? 공문 처리는 수업하고 나중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항의 비슷하게 말하면, “신임 교사가 왜 학교 방침대로 하지 않고 말이 그리 많으냐?”는 것이었다.
불만을 토로하고 항의를 하거나 토론 등을 요구하면, 그런 선생들은 아무리 교사다워도 영영 진급을 할 수 없는 풍토였다. 아이들을 위해 교사답게 아무리 온 정열을 쏟고 올바른 행동을 하더라도 교장이나 교감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고 비교육적인 것을 보고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면 그 교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육계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 2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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