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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96381273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13-08-09
책 소개
목차
. 서문 9
1부: 빈 망토
1. 실종된 중간 23
2. 반대편의 문제 : 몸통은 다 있는데, 망토가 사라졌다 51
3. 불충분한 답변들 71
2부: 음량 조절하기
4. 이스라엘의 이야기 97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야기로서 예수의 이야기 125
6.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의 출범 155
7. 나라 간의 충돌 181
3부: 나라와 십자가
8.우리가 발목 잡힌 지점 : 계몽주의, 권세, 그리고 제국 219
9. 사차원으로 살펴본 나라와 십자가 243
10. 나라와 십자가 : 새로운 의미 만들기 289
4부: 신조, 정경, 그리고 복음서
11. 하나님의 이야기를 기념하는 방법 341
. 더 읽을 책들 373
리뷰
책속에서
[서문]
지난 수년간 서서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실천의 핵심이라고 이해하는 내용 깊숙한 곳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문제는 아주 쉽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우리 모두는 사복음서(four gospels)가 말하는 핵심 내용을 잊어버렸다. 당연히 그 책들은 예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예수에 대하여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맞다, 그 책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에 관하여 실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맞다, 그 책들은 후대에 기독교로 알려질 어떤 움직임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낯설고 새로운 운동에 대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그리고 그 책들은 기독교의 삶과 사역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을 지닌 그 내용들을 어떤 방식으로 제시하는가?
나는 예수와 복음서를 주제로 연구와 집필 활동을 해 왔고, 최선을 다해 예수를 따르고 복음에 의거하여 자기 삶을 정돈하려 애쓰는 기독교 공동체를 인도하고 가르쳐 왔다. 그러면서 지난 수년간 시간이 지날수록 서구 기독교 전통에 속한 대부분의 교회가 복음서에서 실제로 말하는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인상을 더 강하게 받았다. 우리는 수세기 동안 복음서들의 온갖 특징들을 연구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열정적으로 쏟아 부었다. 그런데도 사복음서가 우리에게 강력히 전달하려 한 주된 내용에서 용케도 비켜나 있었다. 따라서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에게 필요한 조치는 미세한 조정이나 이곳저곳을 약간 수정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우리에게 말하려 애쓰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로서 복음서를 읽는 최선의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한 상태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복음서에 맞추어 우리의 삶과 일을 어떻게 정돈해야 할지에 관해서도 다시금 성찰이 필요하다.
복음서가 말하는 내용을 잊어버렸다는 이 문제는 교회의 어느 한 갈래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서로 다른 분파들, 즉 가톨릭, 개신교, 개혁주의, 은사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사회복음주의, 그리고 오해를 유발하는 이런 이름표를 동시에 두 개 이상 달고 있는 교회들의 많은 지류들까지, 모두들 서로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지난 수세기 동안 이러한 교회 분파들 모두가 공히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던지는 도전에 충분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게 나의 확신이다. 교회의 서로 다른 분파들이 복음서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왔는지 (내 관점에서는 오독해 왔는지) 정리해 보는 일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작업에는 또 다른 책 한 권이 들 것이며, 이는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나는 그 대신에 내가 가장 잘 아는 한 교단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싶다. 나는 영국 성공회에서 고위 관료 역할을 거의 20년 동안 맡았고, 그 중 7년을 더램(Durham)의 주교로 지냈다. 그러면서 내가 소속된 전통뿐만 아니라 그와 매우 다른 전통들 역시 꽤 폭 넓게 경험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편협하거나 특이한 관점을 반영하는 게 아니며, 다양한 전통에 속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질문을 정리해 두자. 그 질문은 ”원저자들의 의도한 방향에 맞추어 복음서를 더 잘 해석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뿐만 아니라 다음의 질문들도 포함한다. “우리가 그러한 방식을 따라 사복음서를 해석하면, 이 세계 안에서, 그리고 예수 안에서/예수를 통해서, 그리고 (지금은!) 그의 추종자들 안에서/그의 추종자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선교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할 수 있을까? 또한 그러한 해석 과정을 거치면 우리가 선교와 삶 속에서, 믿음과 소망 안에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서로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복음서를 새롭게 읽으면 선교와 교회 일치를 위한 새로운 노력으로 향하는 길이 열릴까? 또 그러한 모습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왕이심을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때에 나타날 그런 모습일까?”
결국 따져보면, 사복음서 모두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사복음서 외에도 “복음서”라고 불리는 다른 문서들이 존재한다. 그 사실은 나도 잘 안다. 그 문서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필요할 때 지나가면서 언급하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기독교의 아주 초창기부터 교회의 ‘규율’(rule of life)로 인정된, 즉 ‘정경’(canon)으로 인정된 네 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만을 다루겠다. 그리고 그 사복음서의 저자들이 말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의 제목인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에 관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생경하게 들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충격적인 이야기일 것이라는 사실을 나도 안다. 이런 이야기는 요즘 말로 하면 직관에 반하는(counterintuitive) 이야기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주장은 우리가 아는 바 실제 세상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 같지 않다. “하나님이 정말로 왕이시라면, 왜 여전히 암이 발생하는가? 왜 여전히 해일이 덮치는가? 왜 아직도 독재 정치, 집단 학살, 아동 학대, 대규모의 경제 부패가 존재하는가?” 한 술 더 떠서 (앞으로 살펴 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특히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생각, 혹은 ‘왕’이 되신다는 생각에 거칠게 손사래를 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을 오직 승리만을 지향하는 왕으로 간주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두려운 단어인 ‘신권정치’(theocracy)로 우리를 이끌겠다는 말인가? 신권정치는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이 시대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아닌가?’
그와 같은 의문들은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던지는 이런 질문들을 복음서 저자들이 실제로 듣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펼치던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그 이유를 발견하고, 그러한 논평들에 그들이 대꾸했을 내용들을 살펴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심호흡을 크게 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 보자.
이 책은 네 부분 혹은 네 단계로 진행될 것이다. 제1부에서는 내가 문제로 여기는 내용들을 소개하고, 그 문제들을 더 명확하게 정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능하면) 해결책을 찾기 위한 신선한 시도를 필요로 하는 문제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릴 것이다. 제2부에서는 정경의 복음서들이 지닌 네 가지 차원을 탐험할 것이다. 이 차원들은 현대 서구의 해석에서는 보통 배제되지만, 복음서가 말하려고 의도한 그 이야기가 우리 귀에 들리게 하려면 반드시 복원해야 할 내용들이다. 그런 후에 제3부에서는 이 그림의 진정한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제2부에서 정리한 네 가지 차원들을 동원해서, 종종 분리해서 다룬 두 개의 핵심 주제인 왕국(kingdom)과 십자가(cross)가 복음서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또 어떻게 서로를 자극하는지,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에서 거의 잊힌 주장인, 우리가 종교적 혹은 영적인 영역이라 부르는 곳만큼이나 정치라고 부르는 영역과도 관련된 그 주장을 제기하는 데 있어 어떻게 서로를 강화해주는지 보여줄 것이다. 왕국과 십자가의 이 중요한 결합을 살펴보고 나면,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관한 이야기에 비추어 이 주제들의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그 다음 마지막 장에서는 위대한 신조들로 관심을 돌릴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이 신조들이 우리를 속여 안심시키고는 복음서의 핵심 메시지를 배제하기 쉬운 사고의 틀로 이끌고 갔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수를 인식하기만 하면, 복음서의 충만한 메시지를 긍정하는 풍성한 표현으로서 그 신조들을 암송하고 노래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는 제안도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위치한 이 문서들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본 가르침과 실천의 전통을 어떻게 재고해야 할지에 관한 제안으로 논의를 이끌 것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 단계에서, 이 책이 일차적으로 예수 자신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최근에 출간된 『톰 라이트가 묻고 예수가 답하다』를 비롯하여 역사적 맥락에서 예수를 설명하는 책들을 많이 집필했다. 나는 그 주제에 관한 작업을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지만, 이 책에서 하려는 작업은 그것이 아니다. 어디에서나 서로 얽혀있는 두 개의 질문이 있다. 가) 예수는 누구이며, 그는 무엇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했는가, 그는 왜 죽었는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나) 네 개의 복음서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원칙적으로 이 두 질문은 분리될 수 있다. (이 말이 너무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 두 질문을 손에 따로 쥐고 다룰 수 없다면, 다시 합치는 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다른 책들에서 예수에 관한 질문을 다루었으니, 이 책에서는 다시 한 번 [예를 들면,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에서 이미 다룬 적이 있으니] 복음서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아주 상이한 방식으로 예수 이야기를 전달하는 다른 문서들이 최소한 2세기 후반까지는 유포되어 읽혔기 때문에, 복음서 문제는 한층 더 흥미로운 주제다. (당연히 도마복음과 그와 유사한 책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왜 그러한 방식으로 예수 이야기를 전한 것일까?
이쯤 되면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정경의 사복음서 사이에 존재하는 꽤나 큰 차이들에는 적절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 차이들을 그냥 뭉뚱그리려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바로 이야기하겠다. 사복음서는 정경이 아닌 복음서들과는 공유하지 않은 굉장히 많은 내용들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정경이 아닌 복음서들과의 차이와는 그 내용이 다른 차이가 사복음서 상호 간에도 존재한다.3) 이 4인조 안에서도 당연히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요한복음과 비교하면 서로 비슷한 점이 많지만, 그 세 책 역시 여전히 서로 매우 다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탐구하려는 질문은그런 내용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복음서가 전하려고 애써 노력했던 이
야기는 무엇인가?’이다.
나사렛 예수가 실존하지 않았다거나, 그의 행적이라 생각되는 내용 가운데 대부분은 실제로 그가 행한 일이 아니라거나, 혹은 그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앞서 제시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그 이야기들이 완전히 허구라는 결론을 내리겠지만 말이다. (누군가 기록을 구성하고, 조합하고, 어떤 자료를 남기고 어떤 자료는 뺄 것인지, 그리고 전체 구성을 어떻게 할지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사실 모든 글과 모든 역사는 ‘허구’다.) 하지만 그런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의미에서 복음서들이 ‘허구’라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전히 완벽하게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즉 이 저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나는 이 책에서 (역사가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까지 묶어서)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려 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복음서의 전-역사(prehistory)에 대한 질문 혹은 복음서의 집필 시기, 저작권, 집필 장소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것이다. 나는 복음서의 자료와 기원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친 학자들을 존경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더 큰 기획 안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주제들로서, 끊이지 않고 지속해야 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 책의 목적과 관련하여 이야기하면, 나는 복음서의 배후에 있을지도 모를 가설적인 문서보다는, 우리가 실제로 지금 소유하는 문서들에서 다음과 같은 핵심 질문을 던지는 게 가능하다고 추정한다. 즉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전한다고 생각했을까? 20세기의 학자 대다수가 제안한 전통적인 설명처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둘 다 한 편으로는 마가복음을, 다른 한 편으로는 보통 Q로 알려진 제2의 자료를 기본 자료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혹은 요즘 논의되는 대안적인 설명처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뿐만 아니라 마태복음도 자료로 사용했고, Q를 굳이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선호할 수도 있다. 혹은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해서, 다양한 구전전승과 문서 자료를 이제 와서 재구성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러한 제안 가운데 어떤 게 맞건, 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 눈앞에 실제로 놓인 책들이 있으며, 그 문서들이 스스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전히 이치에 맞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양식 비평(form criticism)으로 알려진 작업 역시 마찬가지다. 양식 비평가들이 던지는 질문(전승들이 이야기되고 전수되던 원래의 양식은 무엇이며, 우리는 이러한 양식들을 연구함으로써 초대 교회에 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도 굉장히 합리적이고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룰 질문은 아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이유 때문에 양식 비평이 보통 수행되는 방식에
상당한 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다.
같은 이유로 나는 편집 비평(redaction criticism)이라 불리는 작업도 시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거룩한 3인방을 모두 언급한 게 됐다.) 나는 원-자료에 대한 이론들을 전제하고, 복음서 저자들이 각자의 자료들에 어떤 변화를 가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표출하고 그들의 신학적 혹은 교회적 성향을 드러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재배열하는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 역시 가치 있는 일이지만, 최근 공관복음서 연구의 분절화와 함께 그러한 ‘편집적인’(redactive) 암시를 찾으려는 노력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가 훨씬 더 많다. 그보다 내가 여기에서 하려는 작업은 종종 구성 비평(composition criticism)으로 불리는, 편집 비평의 육촌쯤 되는 작업이다. 우리는 실제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가지고 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소설 혹은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곡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복음서들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다고 본다. 즉 저자가 말하려는 이야기는 무엇이며, 그 혹은 그녀는 어떻게 그 일을 해내는가? 내가 이제 대답하려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대답에 도달한다면, 방금 소개한 다른 작
업들에도 상당한 파생 효과를 미칠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이 책의 소관 밖이다.
부분적으로 이 책의 기원은 우리가 “빅 리드”(The Big Read)라고 이름을 붙인, 더램을 기반으로 진행된 프로그램에 있다. 그 프로그램은 나의 소중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자로(Jarrow)의 주교 마크 브라이언트(Mark Bryant)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2010년 더램에서 시작된 이 대규모의 사순절 성경읽기 프로그램에서 내가 맡은 일 중의 하나는 영국의 북동부를 순회하며 복음서를 읽는 방법에 대한 공개강좌를 하는 것이었다. (그해에는 누가복음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녹음과 배포도 했다. 2011년에는 마태복음, 2012년에는 마가복음을 각각 다루었다.) 지역 사람들과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토의하면서, 나는 그때 거기에서 사람들이 넓게는 기독교에 관해, 좁게는 복음서에 관해 얼마나 많은 오해들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2월의 어느 저녁에 열리는 모임에 기꺼이 참석하는 신실한 소수의 성도들이 가진 오해가 그 정도라면, 집에서 아주 부적절한 제목을 달고 방송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내가 이러한 책이 필요하다고 처음 생각한 때는 2010년 어느 봄날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현재의 형태로 구체화된 시점은 2011년 5월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에서 보낸 잊을 수 없는 한 주 동안이었다. 그때 나는 네 번의 새럼 강연(Sarum Lecture)을 진행했다. 내가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초대해주고 달콤하고 따뜻한 환대를 베풀어준 데 대하여 새럼 대학의 총장과 그의 동료들에게 지금도 여전히 무척 감사하다. 이 책은 그 강좌들의 내용을 따랐다. 첫 세 장은 첫 세 강좌의 내용과 각각 일치한다. 네 번째 강좌에서는 특별히 교구 사역과 목회 사역을 담당하는 청중들에게 적합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강연을 했다. 이 책의 경우에는 성경학자들뿐만 아니라 신학자들도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제안들을 포함하여 그 내용의 범위를 약간 확장하였다. 상당 부분 이 책의 기저를 이루는 ‘정경과 신조’에 관한 질문은 이제는 굉장히 시급하고 논란이 많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이미 소유한 조직 신학에 대한 약칭으로서 “정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보다는, 실제로 정경인 성경 자체를 가지고 작업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대답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 큰 논제(agenda) 안에서 실제 적용의 문제도 자연스레 틀이 잡힐 것이다.
새럼 강연을 준비하던 2010년 10월경에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 더램에 위치한 듀크대학교 신학대학원(Duke Divinity School)이 주최한 컨퍼런스에서 이에 대한 예비적인 이야기들을 했다. 그때 나는 준비한 내용들을 좀 더 느긋하게 시험적으로 이야기해보았고, 같은 달 말에는 아일랜드의 다운(Down)과 드러모어(Dromore) 교구의 목사들을 상대로도 유사한 시도를 했다. 나를 그 강좌들에 초대하고 환대해 준 듀크신학대학원 학장인 헤이스(Richard B. Hays) 교수와, 다운과 드러모어의 주교인 밀러(Right Reverend Harold Miller)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는 또한 이러한 생각들을 2010년 11월에 조지아(Georgia) 주 애틀랜타(Atlanta)에 있는 성경연구소(Institute of Biblical Research)에서, 그리고 2011년 1월에는 브리스톨 기독교연구대학원(Bristol School of Christian Studies)에서 다양한 형태로 단독 강의를 진행하며 더 갈고 닦을 기회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나는 새럼 강의를 마친 지 1주일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2011년 5월에 그리니치(Greenwich), 코네티컷(Connecticut), 내슈빌(Nashville), 테네시(Tennessee)의 교회들에서, 2011년 6월에는 햄프셔(Hampshire)의 해군 군목모임에서 같은 내용으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두서없이 나열한 이 여행 일정의 순간순간마다 즐거운 기억들이 둘러싸고 있다. 나의 감사는 이 여정의 다양한 시점들에 함께 참여했던 목회자들과 여러 성도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애틀랜타 신문에 나의 강연에 대한 리뷰를 기고한 마이클 버드 박사(Dr. Michael Bird)에게도 특히 감사를 전한다.) 뉴욕에서 아파트에 거주하도록 배려해 준 로이스 부부(Chuck and Deborah Royce)에게도 따스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들은 강의 내용을 내가 다시 한 번 정리해서 책으로 출간할 수 있도록 조용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복음서에 관한 책이 이처럼 많은 감사와 환대의 기억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은 너무나 온당해 보인다. 이 역시 복음서에 담겨 있는 내용 중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퍼출판사(HarperOne)의 편집자인 모들린(Mickey Maudlin)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내게 보여주었고, 많은 이야기를 빠른 말투로 전하려는 나를 적절히 제지해 주었다. 완성된 이 책을 보며 내가 원하는 바는 이렇다. 기독교의 울타리를 쳐다보며 기독교의 핵심 문서들이 실제로 이야기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과, 그 배경이 어떻든 모든 기독교인들이 폭발력 있는 1세기의 그 책들을 신선한 시각으로 다시 한 번 펼쳐 보고, 복음서들이 으레 던졌을 것이라고 우리가 추정하는 (물론 그 내용들도 중요하긴 하다) 질문들과 도전들이 아닌 복음서 자체가 실제로 던지는 질문들과 도전들에 다시 한 번 맞닥뜨리는 계기를 이 책이 만들면 좋겠다.
나는 이 책을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의 신학부 세인트메리스 컬리지(St. Mary’s College)에 소속된 나의 동료들에게 헌정하고 싶다. 지난 20년 중 거의 대부분을 신학계의 비주류였던 나를 교수진으로 기꺼이 받아준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두 손 벌려 환대한 사실은 그들이 지닌 믿음과 관용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 복음서에 대한 내 강의들은 앞서 언급한 상황에서 진행되었고, 이 강의들은 학계의 복음서 연구를 교회라는 일상의 삶과 관련지어 보려는 시도였다. 그와 같은 일이 세인트메리스의 내 새로운 친구들과 동료들 사이에서도 진행되기를 바란다.
물론 이 책은 원래 그와 반대 방향으로 이바지하도록 의도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내가 수행한 작업의 결과로 나타난 성찰들을 더 넓은 세상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내고, 또한 학문적인 질문을 탐색하는 모습을 내 동료들이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이끌었으면 한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이 물론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머지않아 훨씬 더 학문적인 수준에서 사복음서를 다루고 싶다. 이 책이 그 시작이며, 또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2011년 9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세인트메리스 컬리지에서
톰 라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