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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88996875611
· 쪽수 : 274쪽
· 출판일 : 2012-06-22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오늘, 시리도록 차갑고 그지없이 맑았다. 사람들의 시선도 말도 그대로 통과시키니, 술이 찰랑대다 비워져도 흔적일랑 없는 투명한 유리 술잔과 같았다. 왕의 비통 앞에서도, 가슴 속 냉혈은 유유히 흘렀다. 주변의 몇 사람인가 냉기에 몸을 떨었고, 감현과 마백 또한 심상찮은 기운을 눈치채기는 하였으나 그 근원을 몰랐다.
어전에서 산 귀신으로 화했으니, 궐에서 내쳐져 창날에 찍힐 터. 그러나 앞날에 대한 예지도 각오도 차가운 무관심에 마비되었다. 마음은 초연히 제 변모를 개의 송장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궐로 기어들어 말석을 차지했던 내가 곧 오늘의 흉조였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왕을 바라보지 않았다. 차마 부끄러웠기에. 나는 선뜻 가고자 하였으나, 왕의 청이어서도 명이어서도 아니었다. 왕은 나를 죽일 수 있으나, 그 때문에 나는 왕을 가련히 여겼다.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쥔 자에게 바치는 충절이 무언지 나는 몰랐다.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은 참된 것이었으나, 그가 왕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성군이 될 그릇은 아니었고, 그것이 내가 높이 산 점이었다. 그 힘겨운 자에게 충성 대신 연민을 바치매 군왕의 위엄에 흠이 되었다.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말이오? 이미 약조가 다 되어 있소. 그쪽으로 넘어가면 부귀영화가 넘칠 것이고, 새 아내를 맞을 터인데 왜 돌아오겠소? 기다린들 헛일이라오.”
“새 아내와 있다 보면 분명 제가 그리우실 터인데, 왜 아니 돌아오시겠습니까. 기다리면 될 일이지요.”
“저런, 생각이 짧으시오. 돌아간다면 가만둘 놈들이오. 목을 베려 들겠지.”
“그러니 몸조심하시어, 잘생긴 목일랑 아무에게도 주지 마시고 고이 간직해 오소서. 제 것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