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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디자인/공예 > 디자인이야기/디자이너/디자인 실기
· ISBN : 9788997714117
· 쪽수 : 294쪽
· 출판일 : 2013-04-08
책 소개
목차
책을 내며 11
환경 디자이너로 첫발을 딛다
모든 것은 의자의 색에서 시작되었다(서울 목동 실내빙상경기장) 19
공공건물에 CI를 고집한 까닭(서울 우이동 통일연수원) 39
흰색은 색채계획이 아니다?(오두산 통일전망대) 45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만남(조선일보 평촌사옥) 57
빛이 없는 공간을 디자인하다
장식용 색에서 기능을 가진 색으로(서울지하철 5~8호선) 69
30년 디자인 개념을 설계하다(대구 지하철 1호선) 85
열정과 환호의 공간을 창조하다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든 ‘회색’(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101
건축도 환경도 ‘다이나믹’하게(대전 월드컵경기장) 113
‘컬러 마케팅’의 장을 열다(2002 WORLD CUP Look Program) 119
역사의 도시에서 아시아의 축제를(제14회 부산 아시아드) 125
완공 2개월을 앞둔 도전(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 사인시스템) 131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를 꿈꾸며(알펜시아) 135
디자인으로 대한민국을 말하다
‘한국적인 것’을 새롭게 해석하다(북경 한국대사관) 145
밤에 더욱 빛나는 대한민국(주중 대사관저) 153
20년 만에 완성한 지하철 프로젝트
24개 정거장 전체를 모듈화하다(서울지하철 9호선) 167
“골드 라인이라 부르자”(9호선 노선색 디자인) 179
디자인으로 장소성 회복하기
마음속 상징성을 복원하기 위하여(한강공원) 195
“한강의 지도를 제대로 그려보자”(한강공원시설물 디자인 매뉴얼) 205
디자인으로 랜드마크를 만들자
오감을 통한 환경과의 교감(가든파이브) 215
평범한 건물을 매력적인 사옥으로(에스오일) 231
이 도시를 후세에 물려주기 위하여
도시에 천 년의 옷을 입히다(서울 송파구 도시디자인 가이드라인) 243
동해를 동쪽 바다의 대표 도시로(동해시 도시디자인 가이드라인) 251
물려줄 세상 만들기, 도시디자인부터(새만금산업단지 도시디자인 가이드라인) 265
에필로그 275
메카인의 눈으로 본 류인철 279
INTERVIEW
설계 단계부터 환경디자인이 도입되기를 35
환경디자인은 색채만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53
공장에 색채를 도입한건 놀라운 발상 63
디자인이 중심이 돼야 걸작이 나온다 80
디자인 직무교육에도 나서줬으면 94
국가 예산에 환경디자인비가 반영돼야 157
건축과 환경디자인은 어떻게 보면 한 영역 160
9호선은 평생 철도사업 중 가장 큰 자랑 187
저자소개
책속에서
모든 것은 의자의 색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목동 실내빙상경기장
내가 건물 짓는 일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여름, 서울 목동에 있는 빙상경기장 신축공사장에서였다. 관중석의 의자 색상을 골라 달라는 부탁을 받고 커다란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들어가니, 흙먼지가 날리는 한편에 세워지고 있던 커다란 시멘트 구조물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제품디자인을 전공했고 입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나름의 ‘조형적인 자신감’이 있었지만, 그 구조물의 엄청난 규모는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존재감으로 나를 압도했다.
현장의 분위기는 야전을 방불케 했다. 복장과 분위기도 낯설기만 했다.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건축도면과 관중석에 사용될 플라스틱 의자의 견본이 눈앞에 펼쳐졌다. 빨강, 노랑, 파랑, 하늘색이 칠해진 플라스틱 조각이 군번줄 같은 쇠줄에 묶여 있고,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만들어진 색상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이전에는 한두 가지의 견본 밖에 없었는데 색이 좀더 많아졌다고 한다.
내가 물었다.
“그런데 의자가 놓일 바닥은 어떻게 되죠?”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표정이다.
“우레탄이라는 재료인데 녹색이 흔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도 그 색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럼 천장은요?”
“철골 프레임이 노출되는 형태이고 아직 정해진 색은 없지만 보통 먼지 등에 의한 오염을 고려하여 회색을 많이 사용합니다.”
“벽면은요?”
“페인트 도장 할 텐데 대부분 미색(지금의 아이보리색)을 사용합니다.”
좀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어, 암모니아 냄새가 풋풋하게 풍기는 빙상경기장의 건축설계 도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세밀하게 꽉 짜인 제품 관련 도면만 보던 내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도면 어디에도 색채에 관한 설명이나 그에 대한 건축가의 의견이 보이지 않았다. 건축에 적용할 색을 선택하는 과정을 물어보니, 현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샘플을 몇 가지 준비해놓은 후 발주처와 관계자들이 그때그때 색을 결정해 나가면서 공사를 진행한다는 답변이다.
집의 벽지를 고를 때조차도 누구의 방인지에 따라 색상 선택을 다르게 하고, 장판이나 커튼 등과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해 고민하는데, 거대한 건축물이 이토록 허술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그 자리는 플라스틱 의자 색상을 결정하기 위해 온 것인데다 바로 앞에는 의자업체 직원도 있으니 어쨌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이게 생산되는 색 전부입니까?”
“우리나라에서 현재 경기장 의자로 생산되고 있는 색상은 이것뿐입니다.”
업체쪽 사람은 지금까지 다른 큰 경기장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묻느냐는 듯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플라스틱이란 재료는 원료 색채 배합에 따라 여러 색상으로 개발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오염이나 변색, 내구성을 고려하여 여러 방식으로 검증된 색상들입니다.”
그 순간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 나는 동대문 스케이트장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가보지 못했고, 어릴 때 물 막아 얼린 논두렁에서 썰매를 탔던 경험이 전부였기에 첨단시설을 갖춘 거대한 빙상경기장이 실내에 만들어진다는 것이 엄청난 일로 느껴졌다. 웅장하고 오랫동안 사용되고 국제 규모의 시합들이 거행될 건축물을 짓는 일이니만큼 전체를 고려한 신중하고도 세심한 계획이 당연히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장소장님에게 제의했다.
“외부에서는 어울릴지 모르지만 여기는 실내이며 빙상경기장의 특성상 내부 온도가 낮게 유지될 것이고 결국 항상 추운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공간입니다. 이러한 특성과 이용하게 될 사람들의 마음을 고려해서 의자 색상과 내부 마감재에 대한 색채를 선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의자 생산업체에서는 이곳에 사용될 의자의 수량이라면 주문 생산이 가능한지 본사에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천장의 철골 색채와 바닥 색채 등 모든 재료에 대해서 전체적인 검토를 한 후에 의자 색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물론 건축에 대한 환경색채계획이 어느 정도 일반화된 지금은 그때의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당시 건축 현장에서는 획기적이면서도 귀찮고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장소장님은 “바닥이나 벽체는 마지막 공정이라 색채를 선정할 시간이 조금 있지만, 천장에 노출되는 철골조 재료는 이미 발주가 된 상황”이라면서 자재 담당자에게 “공장에 연락해서 현재의 생산단계를 정확히 파악해보라”고 지시하는 등 나에게 도움을 주려 애썼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얻게 되었다.
일주일 후 다시 소장님과 마주 앉았다. 빙상경기장 디자인에서는 관중들의 심리적인 측면, 얼음판 위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정서와 경기력 측면, 빙상경기의 특징인 스피드와 파워에서 오게 될 흥분과 축제 분위기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공간 전체의 성격을 고려한 색채계획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배려해야 할 요소들과 취사선택할 내용을 설명하면서 색채계획의 방향을 제시했다.
프레젠테이션이라고 해봐야 지금처럼 컴퓨터로 현실감 있게 보여주는 시기가 아니어서 오로지 도면과 색채 견본을 놓고 상상력을 공유하는 것이 전부였다. 말주변이 없는 나로서는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뒤이어, 현장에 파견된 조달청 감독관들과의 미팅이 이루어졌다. 의자 색채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나서 건축물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디자인 계획이 필요함을 역설했지만, 회의는 아주 싱겁게 끝났다. 지금까지 수많은 건물들을 건설해왔지만 그러한 사례가 없었고 그래서 별도의 디자인 예산도 없었기에 디자인에 대한 지원을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의를 마친 후에 현장소장님이 “별도 예산이 없어 지원은 힘들지만, 꼭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며 요청해왔다. 빙상경기장의 성공적인 시공을 위해 체계적인 색채계획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당시 나는 대학 졸업 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또, 평소 좋아하던 교수님을 인사차 찾아뵈었다가 “졸업생 모두가 대학원 가서 교수 되려고만 하는데 자네는 사회에 나가서 디자인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디자인 분야를 개척해 나갔으면 한다.” 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들었던 터였다.
현장소장님의 제안은 내게 고민 해결의 열쇠를 던져주었다. 그동안 실내에서만 지내던 내게 뜨거운 햇볕과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가득 찬 현장은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실제 건축물에 색채계획을 적용해본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열망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대가를 따지는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현장에 공간을 만들어주시면 몇 개월 동안 작업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나는 색채 적용에 앞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해보았다. 스피드 있고 박진감 있는 빙상경기의 특징에 맞는 경기장 분위기 연출방법은 무엇일까? 얼음 면에 집중되는 조명과 반사되는 빛의 시각적인 눈부심을 고려하면서도 관중의 시각적 피로감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빙상경기장이라는 속성상 추울 수밖에 없는 실내이지만 시각적으로 온화함을 느끼며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전체적으로 세련된 공간으로 기억에 남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제품을 디자인할 때 대상이 지니는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 가능성에 대해 습관적으로 의문을 품고, 그 의문들을 풀어나가던 과정을 건축물에 대입했다. 건축물을 소비자가 사용하는 제품으로 이해하고 소비자의 관점에서 그 제품을 사용할 때 요구하고 바라는 것들을 적용시켜본 것이다.
건물의 구조와 마감 재료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과 이해가 이루어지자, 마침내 건물이 완성된 이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을 바탕으로 현재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세부적인 디자인 방향을 그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 이미지의 공유를 통해 현장 관계자 및 시공하는 분 모두의 머릿속에 전체적인 그림을 심어주는 과정이었다.
좀더 잘해보려다 혹 붙인 격이랄까, 처음으로 생긴 디자인 검토 과정이 부담스러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점차 현장의 모든 분들이 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조달청 감독관은 재료를 선택할 때마다 색채와 형태를 질문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점심시간에는 서로들 “막걸리 한잔해라”라고 할 정도로 작업하는 분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현장에서 작업하는 분들과 나누는 대화는 건축 재료와 재료별 시공성을 공부하는 수업 시간과도 같았다. 디자인 결과가 조금씩 보일 때마다 신뢰감도 쌓여갔다. 또한,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현장에 대한 애정도 깊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색채는 천장 부분을 노란색 계열로, 바닥은 파란색 톤에서 추출하여 정했다. 관람석의 의자는 파스텔 톤으로 하여, 삭막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실내경기장의 분위기를 완화시키면서 화사하면서도 명랑한 느낌이 들도록 조정했다. 내부 천장의 스페이스 프레임이 위치한 곳은 빙상면에 조명이 집중되기에 빛이 닿지 않는 부분이어서, 자칫 어둡고 칙칙한 실내 분위기를 만들기 쉬웠다. 관중석과 빙상면으로 이루어지는 하부의 파란색과 대비시켜 천장 부분을 노란색 계열로 한다면 어둡게 느껴질 수 있는 실내 분위기가 보완되고 공간의 상하 대비로 박진감 있는 경기장 분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회의가 끝날 때쯤 어떤 분이 심각하게 한마디 했다.
“이렇게 칠해놓고 괜히 오해받고 조사받는 것 아냐? 다른 색으로 하면 안 될까?”
공교롭게도 노란색은 당시 야당의 상징색이었던 것이다. 나는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색상에 대해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에 놀랐다.
땀으로 가득했던 여름날들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빙상경기장에 대한 디자인 계획이 끝났다. 1989년 12월, 목동 실내빙상경기장의 개장 행사가 열렸다. 시범경기와 여러 가지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 시선은 한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 경기장의 분위기가 어떤지, 선수들의 복장과 조화가 되는지, 관중석과의 조화는 어떤지, 관중들의 반응은 자연스러운지를 살피는 데 온 신경이 쏠렸다.
그 거대한 ‘제품’에 담고자 했던 디자인 의도가 낳은 결과는 다행히도 성공적이었다. 당시에는 마감재료별로 생산업체의 수준이 많이 달라서 색채 구현에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외부 색채에서 시설물,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디자인 개념을 가지고 진행하여 소기의 성과를 이룬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이후 현장에서 함께 하던 분들이 다른 현장으로 가게 되면 연락이 오곤 한다. “디자인 계획을 경험하기 전에는 부담 없이 벽에 베이지색을 쓱쓱 칠하곤 했는데 이젠 도저히 그렇게 못 하겠다”며 “예산은 없고 막걸리 한잔 살 테니 좀 와달라”는 요청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러 현장을 찾아가서 반갑게 만났다. 디자인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해주는 것 자체가 고마웠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건축물의 형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색채로 해결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고, 대한민국의 건축물들이 이런 식으로 지어지고 있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